국회 건물을 대상으로 하는 씁쓸한 유머가 있다. "돔 뚜껑을 열면 마징가 제트가 튀어 나온다"는 말이다. 실제 그러기라도 했으면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베를린에서 폐허로 있던 옛 의회 건물을 복원해 통일 독일의 새 연방의회로 삼으면서 돔을 새로 만들었다. 유리로 말이다. 하늘로 열린 이 유리 돔은 회의장에 자연 채광을끌어들일 뿐 아니라, 돔 꼭대기로 올라간 시민들에게 회의장을 내려다보는 기회를 선물한다. 투명하고 언제나 국민에게 열려 있는 상징으로서의 의회 공간을 만듦으로써 통일 독일은 지향하는 정치 개념을 공간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한 예가 되고 있다.

도시 공간 중에서도 권력 공간은 특히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지향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또는 중심을 잡아가고 있는지 우리 사회의 수준과 모순과지향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권력 공간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빼어 닮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권력인가, 권위인가? 두려움인가, 신뢰인가? 존경인가, 사랑인가? 하향식인가, 상향식인가? 소통인가, 지시인가? 권력의 축은 어떻게 움직이며, 눈에보이는 권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관계는 무엇인가? 어떤 공간이 건강한 권력 개념을 만드는가? 인간들이 모여 사는 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권력의 존재, 그 건강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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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랑스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소시민의 자세를 되짚어 보곤 한다. 적어도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내가 더 움켜쥐면 누군가는 덜 가질 수밖에 없고, 또 누군가는 아예 가진것마저 뺏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게 프랑스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느님 나라를 떠올리면 선물로 받은 기쁨과 영광, 혹은 넉넉함을 많이 생각한다. 문제는 ‘내가‘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당신이 받을 게 무엇인지는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서 돈도 좀 벌고, 성공도 좀 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은 생각을 얼마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마태 5,3.10을읽어 보면 이런 생각은 조금 손질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의로움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이 하늘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나‘ 위주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낯설고 불편한 말이다. 선도 쌓고, 덕도 쌓으며 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 같은데, 가난하게 사는 건 왠지 거북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것이고, 낮은 자리를 갈망하신 것이다.
나를 위해 사신 게 아니라, 너를 위해 ‘나‘를 뛰어너강력한 갈망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선물을 줄 수는 있어도 스스로 가난해지는 데는 익숙하지 못한 우리가, 가난해지려고 작정하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건 뭔가 모순된 일인 것도 같고,
너무 힘든 일이라 과연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두렵기도하다. ....예수께서 가난을 사신 것은 가난 자체를 목적으로 둔 것이 아니다. 가난을 만들어 낸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사회를 비판하고, 그런사회에서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든 이들과 친구가 되셨기 때문에 가난해지셨다.

돈에 대한 미련도, 권력에 대한 욕구도, 명예에 대한 욕망도 모두 내려놓고 방에만 틀어박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것이 가난한 삶은 아니다. 헐벗고, 목마르고, 배고프다고해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더욱 아니다. 또한 없이 사는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게 반드시 신앙적인 것만도 아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라고 예수님은말씀하셨다. 또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는 가르침을 주신 경우도 다반사였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고, 당시 사회에서 인간 취급 받지 못하던 어린이가 오는 걸 막지 않으셨고, 죄인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기셨다. 모두가 ‘너‘를향한 갈망이었고, 그 갈망 덕택에(?) 예수님은 가난해지셨고, 급기야 수난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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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이란 도시적 삶의 근본 조건이다.
도시의 익명성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서로 모르기에 더 자유롭게 당신과 만나고 싶다.
군림하는 권력이 아니라믿고 기대며 다가설 수 있는
이 시대 권력을 요구하면서,
내가 디딘 이 시간, 이 공간을 넘어서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미래를 위한 기록을 남기면서.

‘길은 똑바르다‘라는 현대의 선입견과는 달리 성 안의 길은리 똑바르지 않았다. 몇 가닥의 주요 길 외에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오래된 역사도시에 관광을 가면 매료되는 미로와 같은 작은길들이 바로 그런 길이다. ‘미로도시‘는 이른바 중세도시, 근대 이전의 도시에 자주 나타난 패턴이다.
옛 서울, 한양을 봐도 그렇다. 성곽을 세우는 게 첫째 미션이고주요 길은 남북축 주작대로(지금의 세종대로)와 동서축 종로 그리고남북축에서 약간 비껴서 보신각과 숭례문을 이어주는 남북 방향 길뿐이었다. 직선으로 뚫리면 적의 공격에 취약하니 택한 방식이다.
나머지 길들은 좁고 휘고 돌아가는 미로 같은 길들이 대부분이다.
지형을 따라서, 때로는 먼저 들어선 집들에 맞추어, 집 크기에 따라돌고 돌아 마치 나뭇가지처럼 뻗어서 생긴 길이다. 집들은 마치 나뭇가지에 열매가 달린 것처럼 길 주변에 뭉쳐 있다.
생각해보자.
왜 미로도 괜찮았을까? 집을 찾기는 쉬웠을까? 안전 문제는 걱정되지 않았을까? 거리도 멀어지는데 왜? 여기서 길과공동체 성격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다. 꼬치꼬치 다 알지는 않더라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통용되는 사회가 공동체다. 동네 가 하나의 공동체이므로 그 안에서의 길은 똑바를 이유가 없다.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길을 잃어도 상관없다. 우리 공동체 안에는 비슷한 우리가 살고 있으므로 겁낼 이유가 없다. 구석구석 속속들이알고 있거니와 만약 나에게 위험이 닥치면 누구든 나와서 도와주리라는 믿음이 있다.

왜 그 오래 전에 격자도시가 쓰였을까? 격자도시는 ‘계획 도시‘
였다는 뜻이다. 계획의 주체가 확고해야 한다. 강력한 권력 집중화가 필요하며, 단기간에 도시 성장을 이루는 경제력도 필요하고 토지소유권과 사용권을 규제해야 하며 인구수를 엄격히 관리해야 했다.
중국은 일찍이 중앙 집중을 이루어 그 조건을 갖춘 국가였고 격자도시를 쉽게 계획할 수 있었다(물론 통치 이념, 사회 구성 이념 등 이념적인 측면도 많다), 중국의 격자도시 모델이 우리나라와 일본 문화에 전파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고대 신라의 경주와 고구려의 국내성, 발해 동경의 도시계획은 정확히 격자도시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는 교토와 나라가 가장 전형적인 격자도시로 그 흔적이 지금까지도 완연히 남아 있다.
서구에서는 격자도시가 왜 식민도시에 주로 쓰였을까?
그리스가 세운 식민도시인 밀레토스Miletos (현재 터키 영토에 속하는 지역이다) 이후의 패권을 잡은 로마제국이 유럽과 아프리카 곳곳에 세운 식민도시들은 하나같이 격자도시로 지어졌다. 그중에서도 독일 쾰른은 상당한 규모의 격자도시로 로마제국 시대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식민도시란 한마디로 이방인들의 도시다. 이주민도 많고 유목민도 상인들도 많이 드나든다. 컨트롤이 생명이다. 정확한 도량과 정확한 축척,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 숨을 구석이나 감출 구석이 없는 도시로 만들어야 일상의 컨트롤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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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빨아들이려면, 작은 것을 커다랗게 느끼려면, 미지근하기만 한 대기를 청량한 것으로 바꿔서 받아들이겠다면 어느 정도 메마른 상태여야만 가능하다. 물론 이 사실은, 여행에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엄살을 부리며 사는 건 그래서다. 우리가 자주 메말라 있는 것은 곧 좋아질 거라는 잠재적 신호가 왔음을 알려주는 것.

누굴 좋아한다는 건, 기분좋은 어느 맑은 날이 가슴에 한가득 들어와 있는 상태다. 청소하려고 손에 낀 고무장갑이 청소를 마친 후에쉽사리 벗겨지지 않는 상태가 사랑이라면, 그나마 잘 벗겨지는 쪽이좋아하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게 노를 젓지 않고도 마음이 움직여 바다를 건너 섬에 안착하는 거라면, 사랑하는 건 눈동자에 물감 한 통이 통째로 주입되어 시야와 감정 모두가 그 색으로물들어 빠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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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외치고 저항하신 이유는 ‘조화‘에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구별을 통해세상이 질서 정연한 곳이 되기를 원하셨다. 빛이 생기고그 빛이 어둠과 조화를 이루어 창조의 첫날 하루가 완성되었다(창세 1,5), 하루의 완성은 이틀, 사흘째 날로 이어지며공간을 구별하고 각 공간마다 고유한 생명체들이 제 종류대로 자리 잡는다(창세 1,25), 서로 다른 공간, 서로 다른 생명체들은 저마다 가진 제 색깔을 뽐내며 ‘다름의 향연‘을펼치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본래 모습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성서학자 폴 보샹(Paul Beauchamp)은 창조의 마지막 날, 곧 이렛날을 가리켜 ‘하느님 절제의 시간이라 말한 바 있다. 이렛날에 빗대어 묘사하고자 한 것은 유다 사회의 안식일인데, 히브리 말로 ‘싸밧(v)‘이라고 한다. 흔히 안식일이라 하면 ‘쉼‘을 떠올릴 텐데, ‘싸밧의 사전적 의미는 ‘중지‘이다. 일을 잠시 멈추신 하느님은 당신이 만든 것들의 조화를 감상하셨다.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멈추신 것은, 우리 역시 멈추고 주위를 돌아볼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시기 위함이다(신명5.14~15).
내가 쉬어야 너도 쉬고, 서로가 쉬면서 서로의 다름이 얽히고설킨 삶의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 그것이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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