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이란 도시적 삶의 근본 조건이다. 도시의 익명성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서로 모르기에 더 자유롭게 당신과 만나고 싶다. 군림하는 권력이 아니라믿고 기대며 다가설 수 있는 이 시대 권력을 요구하면서, 내가 디딘 이 시간, 이 공간을 넘어서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미래를 위한 기록을 남기면서.
‘길은 똑바르다‘라는 현대의 선입견과는 달리 성 안의 길은리 똑바르지 않았다. 몇 가닥의 주요 길 외에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오래된 역사도시에 관광을 가면 매료되는 미로와 같은 작은길들이 바로 그런 길이다. ‘미로도시‘는 이른바 중세도시, 근대 이전의 도시에 자주 나타난 패턴이다. 옛 서울, 한양을 봐도 그렇다. 성곽을 세우는 게 첫째 미션이고주요 길은 남북축 주작대로(지금의 세종대로)와 동서축 종로 그리고남북축에서 약간 비껴서 보신각과 숭례문을 이어주는 남북 방향 길뿐이었다. 직선으로 뚫리면 적의 공격에 취약하니 택한 방식이다. 나머지 길들은 좁고 휘고 돌아가는 미로 같은 길들이 대부분이다. 지형을 따라서, 때로는 먼저 들어선 집들에 맞추어, 집 크기에 따라돌고 돌아 마치 나뭇가지처럼 뻗어서 생긴 길이다. 집들은 마치 나뭇가지에 열매가 달린 것처럼 길 주변에 뭉쳐 있다. 생각해보자. 왜 미로도 괜찮았을까? 집을 찾기는 쉬웠을까? 안전 문제는 걱정되지 않았을까? 거리도 멀어지는데 왜? 여기서 길과공동체 성격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다. 꼬치꼬치 다 알지는 않더라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통용되는 사회가 공동체다. 동네 가 하나의 공동체이므로 그 안에서의 길은 똑바를 이유가 없다.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길을 잃어도 상관없다. 우리 공동체 안에는 비슷한 우리가 살고 있으므로 겁낼 이유가 없다. 구석구석 속속들이알고 있거니와 만약 나에게 위험이 닥치면 누구든 나와서 도와주리라는 믿음이 있다.
왜 그 오래 전에 격자도시가 쓰였을까? 격자도시는 ‘계획 도시‘ 였다는 뜻이다. 계획의 주체가 확고해야 한다. 강력한 권력 집중화가 필요하며, 단기간에 도시 성장을 이루는 경제력도 필요하고 토지소유권과 사용권을 규제해야 하며 인구수를 엄격히 관리해야 했다. 중국은 일찍이 중앙 집중을 이루어 그 조건을 갖춘 국가였고 격자도시를 쉽게 계획할 수 있었다(물론 통치 이념, 사회 구성 이념 등 이념적인 측면도 많다), 중국의 격자도시 모델이 우리나라와 일본 문화에 전파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고대 신라의 경주와 고구려의 국내성, 발해 동경의 도시계획은 정확히 격자도시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는 교토와 나라가 가장 전형적인 격자도시로 그 흔적이 지금까지도 완연히 남아 있다. 서구에서는 격자도시가 왜 식민도시에 주로 쓰였을까? 그리스가 세운 식민도시인 밀레토스Miletos (현재 터키 영토에 속하는 지역이다) 이후의 패권을 잡은 로마제국이 유럽과 아프리카 곳곳에 세운 식민도시들은 하나같이 격자도시로 지어졌다. 그중에서도 독일 쾰른은 상당한 규모의 격자도시로 로마제국 시대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식민도시란 한마디로 이방인들의 도시다. 이주민도 많고 유목민도 상인들도 많이 드나든다. 컨트롤이 생명이다. 정확한 도량과 정확한 축척,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 숨을 구석이나 감출 구석이 없는 도시로 만들어야 일상의 컨트롤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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