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랑스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소시민의 자세를 되짚어 보곤 한다. 적어도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내가 더 움켜쥐면 누군가는 덜 가질 수밖에 없고, 또 누군가는 아예 가진것마저 뺏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게 프랑스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느님 나라를 떠올리면 선물로 받은 기쁨과 영광, 혹은 넉넉함을 많이 생각한다. 문제는 ‘내가‘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당신이 받을 게 무엇인지는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서 돈도 좀 벌고, 성공도 좀 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은 생각을 얼마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마태 5,3.10을읽어 보면 이런 생각은 조금 손질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의로움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이 하늘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나‘ 위주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낯설고 불편한 말이다. 선도 쌓고, 덕도 쌓으며 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 같은데, 가난하게 사는 건 왠지 거북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것이고, 낮은 자리를 갈망하신 것이다.
나를 위해 사신 게 아니라, 너를 위해 ‘나‘를 뛰어너강력한 갈망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선물을 줄 수는 있어도 스스로 가난해지는 데는 익숙하지 못한 우리가, 가난해지려고 작정하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건 뭔가 모순된 일인 것도 같고,
너무 힘든 일이라 과연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두렵기도하다. ....예수께서 가난을 사신 것은 가난 자체를 목적으로 둔 것이 아니다. 가난을 만들어 낸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사회를 비판하고, 그런사회에서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든 이들과 친구가 되셨기 때문에 가난해지셨다.

돈에 대한 미련도, 권력에 대한 욕구도, 명예에 대한 욕망도 모두 내려놓고 방에만 틀어박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것이 가난한 삶은 아니다. 헐벗고, 목마르고, 배고프다고해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더욱 아니다. 또한 없이 사는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게 반드시 신앙적인 것만도 아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라고 예수님은말씀하셨다. 또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는 가르침을 주신 경우도 다반사였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고, 당시 사회에서 인간 취급 받지 못하던 어린이가 오는 걸 막지 않으셨고, 죄인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기셨다. 모두가 ‘너‘를향한 갈망이었고, 그 갈망 덕택에(?) 예수님은 가난해지셨고, 급기야 수난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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