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먼로의 초창기 사진에는 그 유명한 이 매력점이 거의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결점으로 생각하여 화장으로 가렸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드 버그만이나<모감보>의 에바 가드너에 비하면 특색이 명확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충고일 수도 있고, 화장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스스로 발견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입가의 점을 더 이상 가리지 않았고, 매력점이 있는 먼로의 얼굴은누구나 한번에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쉐퍼의 하얀 점이 뭔가 허전했던 쉐퍼를 완성했던 것처럼, 매력점이 먼로의 얼굴을 완성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눈은 신기하다. 완성도가 100퍼센트가 되어야 비로소 눈길을 주고 성공을 인정한다.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100퍼센트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만년필에 통용되는 기준이지만 쉐퍼 역시 초기산이 중요하다. 초기산을 판별하는 가장 쉬운 기준은 클립에 달려 있는구슬의 크기다. 구슬이 클수록 초기산이다. 이후로는 점차 작아진다. 초기산을 구매해야 하는 이유는 펜촉에 금을 더 많이사용했고, 클럽의 내구성도 높기 때문이다.

이 필기구들은 다른 경쟁자를 소멸시킬 수 없었다. 새로운 필기구는 기존의 필기구의 단점을 보강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며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기다운 형태를 갖추며 진화했다. 디지털 펜 역시 새로운영역을 위해 태어난 존재다. 성공 여부는 자기다운 형태를 갖추느냐다. 기존의 펜을 모방하면서 태어나는 것은 새로운 펜의 숙•명이다. 하지만 성공하려면 자기 진화를 거쳐야 한다.

"제가 원하는 라디오는 음악만 나오면 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드는 라디오를 찾고 수리하는 수고까지 포함된 물건이에요.

한글과 한자, 일본 가나假는 획의 길이가 짧고 끊어 쓴다.
영문은 회전이 많고 이어 쓴다. 펜촉은 어떤 문자를 쓰냐에 따라 다르게 길이 든다. 약간 다른 예지만 새 몽블랑이나 파커의경우 영문은 잘 써지지만 한글을 쓸 때는 불편한 경우가 있다.
만년필들은 영문에 맞게 펜 끝을 어느 정도 조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만년필과 볼펜은 다르다. 만년필은 새것일 때와 길이 들었을 때의 필기감이 다르고, 같은 모델이라도 쓰는사람과 문자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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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측이 틀릴 수도 있고,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 만년필 덕분에 나는 ‘박목월‘이라는우리 현대 문학의 거장이 남긴 작품을 다시 읽었고, 그와 가장가까운 사람에게 선생의 삶을 풍부하게 엿들을 수 있었다. 만년필이라는 작은 물건의 힘이고, 내가 만년필을 계속 사랑하는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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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형의 삶 (양장) - 김민철 파리 산문집
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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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 집은 안 돼. 김민철은 우리의 로망을 실현하러 가는 거야. 우리의 로망에 걸맞은 집에 살아줘."
어떤 말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휴가가 아니라 여행. 여행이 아니라 삶. 한 시기의 삶. 기어이 내가마련한 삶. 20년간의 회사 생활을 저축해 얻어낸 이자 같은 삶.
거기에 합당한 삶의 모양을 취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곳에서의 모든 순간을 잘게 잘게 쪼개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야금야금 뜯어 먹을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완벽한여행이 아니라 나를 위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파리 살기가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로망 살기의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마침내 파리행 비행기가 떠올랐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마법에 걸려 용이 된하쿠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 용의 비늘이 후두두두 벚꽃잎처럼 떨어진다. 그는 마침내 오롯한 하쿠로 돌아와 자유롭게 하늘을 날게 된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시간부터 이름조차 붙일 수 없었던 감정까지, 그 모든 것들이후두두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날 알았다. 똑같은 그림을 나에게 넣고 섞었는데, 슬픔이나왔던 시절이 있었고, 용기가 나오는 시절이 있다는 걸. 내가바뀐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이 바뀐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건 나의 색깔대로 살아버려도 된다는 용기였다. 좋은 롤모델이 없더라도, 좀 이상해 보이더라도, 내 마음의 방향대로 살아버리는 것. 스스로가 나의 롤모델이 되어버리는 것. 내가 긋고싶은 선을 긋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색을 칠하는 거다. 불안과 싸우며, 의심을 떨쳐내며, 계속 나아가는 거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시작된 거니까.

19년을 다닌 회사였다. 이 퇴사의 이유를 뭐라고 말해야 할까. 팀원들에게는 뭐라 말해야 할까. 나의 오랜 팀장님에게는또 뭐라 말해야 하나. 어떤 말을 해야 19년 만의 퇴사가 설명될까. 지금의 내 일을 모욕하지 않으면서 답을 하는 게 가능할까. 퇴사 후에 무얼 할 거냐 물으면 또 뭐라 대답해야 할까. 뭘하고 싶은지 찾기 위해 그만둔다는 말은 마흔두 살에겐 무리일까. 더 늦었다가는 계속 이 자리에 머물 것 같다는 그 불안감을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지하철 위로 붕붕 떠다녔다. 갑자기 지하철 안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지하철이 이제 한강을 건넌다는 신호였다. 한 정거장후면 회사. 그때였다. 야속할 만큼 푸른 하늘 위로 갑작스럽게
‘파리‘라는 단어가 둥실 떠올랐다.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그단어는 문장으로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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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누군가 읽어주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꿈틀거리며 살아난다. 이야기는 그렇게 읽는 사람의 상상력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움직인다.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원한다고 엄마는 데이빗에게속삭이곤 했다. 이야기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라고, 그래야만 이야기 속의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건너

어째아들 데이빗은 건강하지 못하다. 심장이 온전치 못하다. 엄마와 아빠는 계속 데이빗에게 "뛰지 마라"라고 한다.
외할머니는 그런 데이빗에게 다른 말을 해준다. "데이빗아,
데이빗아, 너는 아주 스트롱 보이야."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다. 우리 스스로가 약하다고 생각하고 못났다고 생각할 때, 누군가 건네는 "너는강해, 너는 아름다워"라는 말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줄수 있다. 그 말을 건네는 사람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수도 있다.

영화 제목을 ‘미나리‘로 정한 것 역시 그런 이유일 테다. 미나리는 흔히 볼 수 있는 채소다. 물만 가까이 있다면쑥쑥 잘 자란다. 미나리를 알아보고 다가서는 순간, 미나리는 특유의 알싸한 향을 우리에게 내뿜는다. 모든 존재가 특별한 곳에 쓰임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쓸모없는잡초‘라는 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는것 자체가 쓸모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높은 산을 집요하게, 끝까지 오르려는 사람. 그리고 여러 산을 두루두루 보면서 경험을 쌓는 사람. 앞쪽을 ‘높은 산‘이라 하고, 다른 쪽을 ‘여러 산‘이라고 해보자. 어느 쪽이 더낫다고 할 수는 없고, 마음속 질문이 이끄는 곳으로 갈 뿐이다. ‘높은 산‘과 ‘여러 산‘은 상호 보완적이며, 서로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높은 산‘은 다양한 산을 부러워하고, ‘여러산‘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자신의 성향을 한심해하며 하나의 확실한 정답을 간절히 원한다.

브루노와 피에트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잘 알고 있다. 백 년 전의 일처럼 모든 게 까마득하지만 술을 마시는 그 순간에는 빙하가 녹기 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빙하가 멋진 이유는 계속 움직이기 때문이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유에서 인생은 슬프기도 하다. 알프스 풍경을 담은 <여덟 개의 산>은 무척 아름답지만 솟아 있는 봉우리들은 슬프게 보이기도 한다. 어떤 봉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목표처럼 보이지만, 어떤 봉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기억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에트로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가장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이 되든 여덟 개의 산을헤매는 사람이 되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 빙하처럼 계속 녹고 있다는 사실. 삶은 점점 무거워지고, 무거운것이 가라앉듯 어디론가 계속 흘러간다는 사실. 옆에 함께흘러가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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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특히 나무를 사랑했던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는 나무들 하나하나가 고유한 형태와 특별한 상처를 가진 모습으로 자신만의 삶을 사는 모습을 가만히 목격하며 감탄하곤 했다. 프뢰벨이 그와 만났다면 아마 ‘고유하게 예쁜 꽃들이 모여 삶을 사는 공간‘으로서의 유치원에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최근『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이라는 책을 읽고 현재 내 삶이자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새삼 깨달았다. 헤세가 말하듯 우리보다 오랜 삶을 지녔기에 긴 호흡으로 평온하게 생각하는 나무들, 우리가 귀담아듣지 않아도 항상 우리보다 더 지혜로운 대지와 자연. 우리는 뜰로, 정원으로, 자연으로 나가는 법을왜 잊었을까.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을 때, "한국에 친정이 하나더 있다고 생각하게"라는 말로 큰 위로를 주신 분이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되새겨도 여전히 따뜻하고 뭉클한 말이다. 친정親庭이라는 말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친한 뜰‘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우리는 뜰에서 컸고, 뜰에서 힘을 얻는 존재들이다. ‘친한 뜰‘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풍경이 있는 건 축복이고, 우리 어른들은 그런 축복을 더 많이 누리며 컸다. 나는 아파트나 빌라가 동네를모두 먹어치우기 전에 성인이 되었으므로 정원이 있는 집에서 꽤 오래 살았다. 거기서 개미한테 과자도 주고, 구름이 변하는 풍경을 보느라 한나절을 보내기도 하고, 대추도따 먹고, 엄마가 꽃사과를 따서 술 담그는 것도 보고, 강아지를 쓰다듬고 분꽃 씨를 따 모으며 놀았다. 작은 뜰이었어도 도시 꼬마에게는 운동장만 한 우주였다. 유치원 정원이든, 학교 운동장이든, 동네 공원이든, 세상에 온 지 얼마되지 않은 작은 생명들이 오래도록 든든하게 기억할 친한

"엄마, 이음이는 세 밤 자면 던져져."
최근에 들은 귀여운 문장이다. 세 밤 자면 유치원을 졸업한다는 뜻이다. 독일 유치원에는 재미있는 풍습이 있다. 라우스부르프(Rauswurf, 실제 발음은 ‘라우스부어프‘에 가깝다), 혹은 라우스슈미스 Rausschmiss라고 하는데, 선생님이 졸업하는 아이들을 유치원 밖으로 던져주는 것이다. 물론바닥에 폭신하고 두터운 매트리스를 겹겹이 깔아두고.이것이 독일 유치원 졸업식의 하이라이트다.

라우스부르프 Rauswurf는 ‘던짐‘을 뜻하는 명사 부르프Wurf에 ‘바깥쪽으로‘라는 의미의 접두사 라우스raus가 붙은말이다. 원래는 자의에 반해 쫓겨나거나 그만두게 되는일, 즉 퇴출이나 제명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다. 하지만 유치원에서는 말 그대로 졸업하는 아이를 밖으로 던져주는세리머니를 지칭한다. 베르펜(werfen, 실제 발음은 ‘베어펜‘에가깝다)과 슈마이센schmeiken은 모두 ‘던지다‘라는 뜻의 동사고, 여기에서 ‘밖으로 내던짐‘이라는 의미의 라우스부

rin이소라는 단어가 있다. 어린 새가 자라서 둥지를떠나는 걸 말한다. 뜻을 알게 된 순간 이 단어는 내 마음속에 둥지를 틀었다. 까치집 같은 아이들 머리통을 보며자주 그 단어를 떠올린다. 아름답고 슬픈 단어다. 미소라는 단어와 비슷한 느낌이라 어쩔 수 없이 작은 미소를 짓게 된다. 나중에 우리가 따로 살게 될 거라고 말하면 첫째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눈동자에 원망을 가득 담아 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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