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형의 삶 (양장) - 김민철 파리 산문집
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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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 집은 안 돼. 김민철은 우리의 로망을 실현하러 가는 거야. 우리의 로망에 걸맞은 집에 살아줘."
어떤 말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휴가가 아니라 여행. 여행이 아니라 삶. 한 시기의 삶. 기어이 내가마련한 삶. 20년간의 회사 생활을 저축해 얻어낸 이자 같은 삶.
거기에 합당한 삶의 모양을 취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곳에서의 모든 순간을 잘게 잘게 쪼개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야금야금 뜯어 먹을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완벽한여행이 아니라 나를 위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파리 살기가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로망 살기의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마침내 파리행 비행기가 떠올랐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마법에 걸려 용이 된하쿠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 용의 비늘이 후두두두 벚꽃잎처럼 떨어진다. 그는 마침내 오롯한 하쿠로 돌아와 자유롭게 하늘을 날게 된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시간부터 이름조차 붙일 수 없었던 감정까지, 그 모든 것들이후두두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날 알았다. 똑같은 그림을 나에게 넣고 섞었는데, 슬픔이나왔던 시절이 있었고, 용기가 나오는 시절이 있다는 걸. 내가바뀐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이 바뀐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건 나의 색깔대로 살아버려도 된다는 용기였다. 좋은 롤모델이 없더라도, 좀 이상해 보이더라도, 내 마음의 방향대로 살아버리는 것. 스스로가 나의 롤모델이 되어버리는 것. 내가 긋고싶은 선을 긋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색을 칠하는 거다. 불안과 싸우며, 의심을 떨쳐내며, 계속 나아가는 거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시작된 거니까.

19년을 다닌 회사였다. 이 퇴사의 이유를 뭐라고 말해야 할까. 팀원들에게는 뭐라 말해야 할까. 나의 오랜 팀장님에게는또 뭐라 말해야 하나. 어떤 말을 해야 19년 만의 퇴사가 설명될까. 지금의 내 일을 모욕하지 않으면서 답을 하는 게 가능할까. 퇴사 후에 무얼 할 거냐 물으면 또 뭐라 대답해야 할까. 뭘하고 싶은지 찾기 위해 그만둔다는 말은 마흔두 살에겐 무리일까. 더 늦었다가는 계속 이 자리에 머물 것 같다는 그 불안감을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지하철 위로 붕붕 떠다녔다. 갑자기 지하철 안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지하철이 이제 한강을 건넌다는 신호였다. 한 정거장후면 회사. 그때였다. 야속할 만큼 푸른 하늘 위로 갑작스럽게
‘파리‘라는 단어가 둥실 떠올랐다.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그단어는 문장으로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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