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점유’,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이들이 있다. 간편하술자리, 지인들과의 독서모임, 크고 작은 회의 등 일상의 이에서도 그 욕구를 내려놓지 못한다. 발화할 권력은 대개 지와 나이의 높낮음에 따라 결정된다. 나도 먹어가는 나이에 비 례해 이전보다 말이 늘어간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가장 좋은 어른은 후배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의 말을 내려놓았다. 그를 떠올리며 나도 입을 닫고 귀를 열기로 한다. 그 내려동음이 나와 당신을 조금 더 높은 자리로 데려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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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느 한편의 자기만족을 위한 발화를 듣는 것은없다.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이나 이해 당사자가 아닌, 특히 노동의사용자와 이용자로 만난 관계에서는 더욱 상호 예의를 갖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나에게는 (타인에게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의무가 없다.
우리 일상에서도 대화 상대를 타인의 운전석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 이들이 있다. 직위가 높아서, 나이가 많아서, 아니면 남성이어서 그래도 된다고 여긴다.………그러나 그들이 지갑을 열기보다는 자신의 귀를 열기를 더욱 바란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의 처지에서 사유하는 연습을 한다면, 상대방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보상이 된다. 굳이 지갑을 열지 않아도 어디에서든 환영받는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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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전하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정확히는 답을 정해두고 하는 일방적인 전달과 강요다.
그들앞에서 나는 노력하지 않는 세대의 대표가 되고, 그들은 스스로 노력한 세대의 대표가 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과 과시, 타인에 대한 걱정과 무시로 이어진다. 나는 그들의 기분이 상할까 걱정되어서, 혹은 어떠한 폭력을 불러올까 두려워서 웃으며 수긍하는 것이 고작이다. "네, 맞습니다" 하는 대답과 동의가 필요하고, 가끔은 "대단하십니다" 하는 찬사까지 보낸다. 애초에 타인의 운전석에서 하는 발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그런 이들일수록 자신의지갑을 여는 일은 더욱 없다. 정해진 금액만을 건네거나 아니면 비용을 깎으려는 시도를 한다.
나는 "아니 사장님, 그렇게 돈이 많다고 자랑하시더니 대리비1,000원을 왜 깎으려고 하십니까?" 하고 묻고 싶은 심정이 된다. 물론 내가 한 노동 이상의 대가를 바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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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지금을 기록해야하며, 그것으로 과거를 추억하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규정이 우리를 경계인으로서 타인을 감각하며 살아가게 할 것이고, 다음 세대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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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완벽한 중심도 주변도 없다. 우리 모두는 경계인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아가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서서 자신의 모습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관조해보는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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