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그렇지. 서랍을 닫았다 열어본 것뿐이야. 영혼이니 뭐니 해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것, 새삼스런 일인가? 인생에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가끔 이런 곳에 와서 구경을 하고 가야 해. 슬프다, 외롭다는 말이 얼마나 쑥스러운 것인지 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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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음들의 조합이고 목젖과 혀로 음의 파열에서 생기는 다양한 음성인데, 이는 알라가 인간의 신체기관과 혀를 빌려 창조한 것이다.
인간은 생각을 말로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데 이것이 사고를 교류하는 첫 단계이다. […]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이, 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 후세의 사람, 동시대인이 아니어서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보내는 것이 두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글의교류로 이루어진다. (이븐 칼둔, 『무깟디마 2, 김정아 옮김, 소명, 2012,
386쪽)

누구든 천지인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그 순간 바로 진리의 전령사가 된다. 얇은 곧 교 동이므로, 그 파동에 몸을 맡기게 되어 있다.
서양에서는 문자의 역할이 훨씬 두드러졌다. 유대교는 특히
‘책의 종교‘였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은 그 의미 자체가 읽어라!‘라는 뜻이다. "신이 세계에 내려 준 것은 글이다. 아담이 동물에 처음으로 이름을 부여했을 때, 신은 단지 가시적이고 말없는 표지를 읽게 했을 뿐이다. 율법 역시 인간의 기억이 아닌 석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참된 말씀을 재발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책에서이다.

비주네르와 뒤레는 둘다 거의 동일한 용어로, 자연에서는 돌이고 어쩌면 인간의 지식에서조차, 글이 말보다 언제나 선행했다.
고 단언하곤 했다."(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75쪽)말과 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선하는가는 핵심이 아니다. 말과글은 늘 서로 갈마든다. 때론 유연하게 어울리고, 때론 심오하게맞서면서. 하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천지인을 연결하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신성한 행위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 우주적 차원의 SNS는 무한한 변주 속에서 스마트폰과 함께 ‘정보, 검색, 페북, 카톡‘ 등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도래했고, 또그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을것이다. 존재와 세계가 완벽하게 ‘통하는‘ 그 순간까지..

나무는 직립한다. 뿌리는 땅속 깊은 지하세계를, 가지는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간다. 사람의 형상과 닮았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 재라는 점에서 상통한다. 그래서인가. 나무는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태곳적 숲은 신성한 영역이었다. 나무는샤먼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문명이 시작되자 나무는 지식을 전달하는 전령사가 된다. 처음엔 죽간으로, 그다음에는 종이로, 종이가 발명된 지 1,900여 년, 문자는 종이와 만나서 책이 되었다. 문자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더 길게, 더 멀리 전달하고자 하는 열망은 마침내 책을 창조했다. 나무가 인류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 이다.

나무는 오행상 목(木)기에 해당한다. 목기는 태양과 동람, 그리고 교육을 상징한다. 배운다는 것은 곧 책을 읽는다는 지을 의미한다. 나무가 아니었다면, 종이가 없었다면, 지혜는 여지히 허공을 맴돌고 샤먼이나 가객의 기억을 통해 말로 전승되고 있을 것이다. 말이 문자로 변이되고, 그것이 다시 종이를 만나 책이되면서 지혜는 듣기에서 읽기로 변주된다. 배운다는 것은 듣고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듣기에서 읽기로 전환되면서 지식은 양적으로 폭발하고 질적으로 변이한다. 샤먼이나 사제들 혹은 엘리트라는 지배계급에서 점차로 보통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그늘을 허락하고 쉼터를 허락하는 나무, 그리고 그나무들의 집합체인 숲이 그러하듯이, 인도문명이 영성탐구의 센구자가 된 까닭도 북인도 지역을 장식하는 숲으로 인해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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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은 부정적인 영향도 미치지만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한다. 소위 명문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사람들은 단지 그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고정관념을 얻는다. 일종의 유리한 편견인데, 이것이 실제로 현실을 만든다. 일상적인 만남이나 각종 사회활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호의적으로 다가가고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명문대학의 학생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 성장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순환 고리 속에서 편견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다시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상대적으로 지방대생,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은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얻는다. 유리한 편견이 이익이 되듯이 불리한 편견은 불이익을 초래한다.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덜 우수하고, 덜 성실하고, 노력이 부족하며, 일을 잘 못할 것- 기대를 받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기대가 현실이 되곤 같다‘는 기대를 받는다

어빙 고프먼 Erving Goffinan은 부정적인 고정관념인 낙인 stigma 이 내면 화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 사회가 부여한 낙인을 자신 안에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개인적인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굳이 타인들이 노골적으로 차별하지 않아도 본인들이 소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차별적인 구조가 유지된다. 차별을 받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부족이고 열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저항을 하지도 않는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일수록 그 선택은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최대한 안전한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하기 마련이다.
켄지 요시노는 그의 책 『커버링 Covering에서, 손상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낙인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커버링‘ 이라는 말을 통해 그는, 소수자로서 완전한 주류가 되지 못하면서도 동화주의적으로 순응하도록 요구받는 삶의 압박을 이야기한다.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까?
고정관념과 편견이 없는 사회에서 자랐어도 우리의 관심과 적성이 정말 현재와 같았을까?

우리의 생각이 시야에 갇힌다. 억압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며 감수한다. 유리한 지위에 있다면 억압을 느낄 기회가 더 적고 시야는 더 제한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그래서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필요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지적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시야가 미치지 못한 사각지대를 발견할 기회이다. 그 성찰의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차별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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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카테고리쿠스 Homo categorics, 인간은 범주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범주로 구분하는습관이 있다. 어릴 때 즐겨하던 퀴즈를 생각해보자. 사과와 딸기의공통점은? (답은 과일이다.) 참외는 과일인가
채소인가? (이 답은언제나 알쏭달쏭하다.)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분류하는 사고의 과정을 통해 범주를 만들고 그 범주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고든올포트 Gordon Allport는 저서 『편견의 본질」The Nature of Prejudier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범주의 도움을 받아야 사고할 수 있다....그래야 질서 있는 생활이 가능하다."

고정관념은 일종의 착각이지만 그 영향은 꽤 강력하다. 일단 마음속에 들어오면 일종의 버그처럼 정보처리를 교란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사실에 더 집중하고 그것을 더 잘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그 고정관념을 점점 더 확신하는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반면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에는 별로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사례를 보더라도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 전형적이지 않은 특이한 경우라고 여기며 예외로 치부한다. 고정관념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반증 사례를 아무리 제시해도 별 효과가 없는 이유이다.

이런 연구들을 보면, 집단의 경계가 생각보다 공고하지 않다는사실을 알게 된다. 집단을 가르는 경계는 상황에 따라 만들어지고 또 움직인다. 한국사회의 경험을 보더라도 외국인이 이 땅에 발 딛는것에 반대하여 "국민이 먼저다" 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동시에 올림픽 경기를 위해 낯선 외국인을 국민으로 맞는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국적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 까지를 ‘우리’라고 보는지 주관적인 관념에 달려 있다. 분명한 건 그중 어떤 경계선을 따라 우리는 내부인에게 친절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고, 외부인에게는 매정하고 때로 잔인한 사람이 되는 경 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때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경계는 국적만이 아니라 성별, 장애, 나이, 종교, 가족상황, 학력, 지역,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 수많은 분류기준과 범주에 따라 다층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을 여러 차원의 범주로 구분할 수 있는 만큼 집단도 거의 무한대로 생성될수 있다. 당연히도 한 개인은 동시에 여러 차원의 집단에 속하게된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차별을 받는 집단에 속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특권을 누리는 집단에 속하기도 한다. 때로는, 차별을 받는 여러 집단에 속해 있어서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차별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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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감상하거나, 사랑을 나눌 때 인간은 왜 눈을 감을까요? 정답부터 이야기하면 다른 감각을 억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쉽지 않을 겁니다. 이 경쟁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시각을 이해해야 합니다. 시각은 시냅스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이 경쟁의 절대 강자입니다. 음악 감상시 청각이나 사랑을 나눌 때 성적 자극을 느끼는 감각은 시각의 강력한 등살에 느끼는 바를 뇌에 제대로 전달할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이 감각들은 이렇게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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