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고통 없는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 포기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을 추구하면서 사랑받는 존재에게 고통당할 각오가 없다면, 사랑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하고 삭막한 세상에서 사랑을 택한 사람의 삶은 고통의 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받는 고통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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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에 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사계절이 있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무성해지다가 마침내는 시드는 날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갈 수 있는 곳까지묵묵히 걸어가기. 끝을 알면서도 감당해내는 태도가 결국성장의 증거가 아닐까. 내가 인생에 대해 아는 유일한 사실은 삶의 길목 어딘가에 죽음이 기다린다는 냉혹한 진실뿐인데도 나는 삶을 감당한다. 여행의 끝은 결국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나는 늘 다시 떠난다.
한 번 떠났다 돌아올 때마다 집은 조금 더 아늑해지고 일상은더 애틋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은 조금씩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이후 죽음은 내게도 이제 낯설지 않다. 그렇게 떠돌다가는객사 혹은 고독사가 운명‘ 이라는 농담에 서른의 나는 웃어넘만 쉰을 앞둔 나는 담담히 미소 짓는다. 더 나아가 객지에서의 고독사‘가 내 운명이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니 떠날때마다 뒷자리를 생각하고 정리에 들이는 시간이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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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다시 찾아갔을 때 나는 눈물이 핑 돌 만큼 안도했다. 이 낡은 서점의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사실에. 벚나무 아래 서서 바라보는 서점의 초록색간판도,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으로 보이는 ‘비트’, ‘로스트제너레이션‘, ‘셰익스피어‘ 등으로 구분된 서가도, 이가 슬은낡은 버팀목들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쓰인 시구도 그대로였다.
"I wish I could show you when you are lonely or inidarkness the astonishing light of your own being(당신이 외롭거어둠 속에 있다고 느낄 때 당신이라는 존재가 발하는 그 환한 빛여주고 싶네)."

나는 나무를 보기 위해, 숲을 걷기 위해 도시를 떠나곤 했다. 하늘을 가리는 콘크리트 빌딩과 흙을 밟을 수 없는 도로가 싫었다. 나는 끝없이 자연을 찾아 도시를 탈출했다. 잠깐벗어났다가 도시로 돌아와 다시 편리함을 누리는 일상이었다. 나에게 도시는 자연과 나를 분리하는 장벽이었고, 나를비롯한 인간은 자연을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침략자에 불과했다. 이 책은 당연하다고 믿었던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제동을 걸었다. 자연이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연안에 속한 야생의 존재라니!
내게는 영화 <식스센스>급 반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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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에는 일상의 힘이 살아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그 든든한 일상의 힘이 나는 고마웠다. 내 친구 마미코가 어떻게든 끌어안고 버텨낸 그 일상이었다. 여행보다. 일상은 힘이 세다.
여행보다 일상은 끈질기다. 나는 점점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무너진 삶을 살아가지만, 일상의 소중함은 나날이 커간다. 마미코의 일상을 지지하는 힘이 어린 쌍둥이라면, 내 일상을 버티게 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내가 아니면 누구도 나를 챙기지 않으니까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되는 삶이라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지만, 실은 아니었다. 나 아닌 누군가가 늘 가까이에 있었다. 내 삶의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우리가 서점에 가는 이유도 이 넓은 지구에서 내가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서점은 섬처럼 외로 떨어진 우리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책과 나를, 이 세계 다른 세계를 연결해주는 통로, 온라인에서 책을 살 수도 있고 전자책을 다운받을 수도 있는데(심지어 더 저렴한 가격에) 왜 굳이 서점을 찾아가는 걸까. 기껏해야 몇십 평 남짓한공간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빛이 비치는 서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드넓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슬며시 서점 안을 둘러보며 주인의 취향을 가늠해볼 때면 나쁜 짓이라도 하는 듯 심장이 두근거린다. 시류에 호응하는 책들 사이에 놓인 비주류의책이 고집스러운 주인의 취향을 은근히 드러낼 때면 슬며시웃음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소중히 놓여 있는 모습을보면 취향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다.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빼내 손에 들 때면 묻어 있는 먼지조차 사랑스럽다. 맨 뒷장을 넘겨 몇 쇄를 찍은 책인지 슬쩍 확인할 때면 안도와 슬픔이 동시에 치민다. 이 좋은 책을 읽은 이들이 겨우 이것뿐이라니. 이 책을 발견한 사람은 75억 인구 중에 고작 수천 명. 얼- 이름도 모르는 그들과 나는 그 순간, 작은 비밀을 나눈것 같은 관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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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이 별로 없으나 가난을 모르는 사람들, 잃을 것이많지 않아 경계심도 적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주소 없는 삶은나를 흔들었다. 두 시간이면 해체와 조립이 가능한 집 게르를싣고 이동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집착이 없는 삶을 뜻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게르를 방문할 때면 그들은 늘 우리를 환영했지만 돌아서는 우리를 잡은 적도 없었다. 물질에 대한 집착또한 그 땅에서는 생존을 방해하는 요소로만 보였다. 더 많이가질수록 이동은 더 어려워질 테니까.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아마 내 생애 동안 그곳 알타이에서, 심지어 몸이 아플 때조차도 가장 많은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진짜 미소 말이다."
나는 완벽하게 이 구절을 이해했다. 알타이가 아니어도 몽골에는 무한하고 광활한 풍경이 주는 위안이 있었고, 오래된삶의 방식을 지켜가는 사람들이 주는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이제 나는 정착과 유목이 나를 분열적인 존재로 만드는 화해할 수 없는 욕망이 아니라 내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모순임을안다. 유목을 향한 갈망이 내 세계를 끝없이 확장시켜주는 만큼 정착을 향한 동경은 내 일상을 견고하게 지탱해준다. 이두 개 중 무엇도 포기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 인간은 저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세상은 한 몸, 누군가 아프면, 모두가 아프다."
하페즈 못지않게 사랑받는 이란의 시인 사디의 시 구절이었다. 이란에서 시는 일상이다. 정치적 논쟁에서도 시를 읊고, 경조사도 시를 인용해 알린다. 전국에 시인의 이름을 딴거리와 광장, 찻집이 즐비하다. 사디 광장 옆 하페즈 거리 루미 찻집에서 약속을 잡는 일이 허다하다. (*이란 대사였던 송웅엽 씨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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