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빨아들이려면, 작은 것을 커다랗게 느끼려면, 미지근하기만 한 대기를 청량한 것으로 바꿔서 받아들이겠다면 어느 정도 메마른 상태여야만 가능하다. 물론 이 사실은, 여행에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엄살을 부리며 사는 건 그래서다. 우리가 자주 메말라 있는 것은 곧 좋아질 거라는 잠재적 신호가 왔음을 알려주는 것.

누굴 좋아한다는 건, 기분좋은 어느 맑은 날이 가슴에 한가득 들어와 있는 상태다. 청소하려고 손에 낀 고무장갑이 청소를 마친 후에쉽사리 벗겨지지 않는 상태가 사랑이라면, 그나마 잘 벗겨지는 쪽이좋아하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게 노를 젓지 않고도 마음이 움직여 바다를 건너 섬에 안착하는 거라면, 사랑하는 건 눈동자에 물감 한 통이 통째로 주입되어 시야와 감정 모두가 그 색으로물들어 빠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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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외치고 저항하신 이유는 ‘조화‘에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구별을 통해세상이 질서 정연한 곳이 되기를 원하셨다. 빛이 생기고그 빛이 어둠과 조화를 이루어 창조의 첫날 하루가 완성되었다(창세 1,5), 하루의 완성은 이틀, 사흘째 날로 이어지며공간을 구별하고 각 공간마다 고유한 생명체들이 제 종류대로 자리 잡는다(창세 1,25), 서로 다른 공간, 서로 다른 생명체들은 저마다 가진 제 색깔을 뽐내며 ‘다름의 향연‘을펼치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본래 모습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성서학자 폴 보샹(Paul Beauchamp)은 창조의 마지막 날, 곧 이렛날을 가리켜 ‘하느님 절제의 시간이라 말한 바 있다. 이렛날에 빗대어 묘사하고자 한 것은 유다 사회의 안식일인데, 히브리 말로 ‘싸밧(v)‘이라고 한다. 흔히 안식일이라 하면 ‘쉼‘을 떠올릴 텐데, ‘싸밧의 사전적 의미는 ‘중지‘이다. 일을 잠시 멈추신 하느님은 당신이 만든 것들의 조화를 감상하셨다.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멈추신 것은, 우리 역시 멈추고 주위를 돌아볼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시기 위함이다(신명5.14~15).
내가 쉬어야 너도 쉬고, 서로가 쉬면서 서로의 다름이 얽히고설킨 삶의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 그것이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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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노숙인 사이에 몇 번 오고 갔던 짤막한 대화이다.
잘먹고, 잘 씻고, 무엇보다 제대로 잘 수 있는 삶이 주교좌성당 앞 노숙인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내 생각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매번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내 삶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노숙인들은 그야말로 사회적 ‘루저‘들인 셈이다.
아마 그 노숙인은 나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할 때마다 노숙인과의 그 대화를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라는 노숙자의 말은, 기존의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준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묻게 하는 말이다. 그 준거가 하느님의 뜻과 자연스럽게 상응하지 않는다면 내 삶을 다시 찬찬히 살펴봐야 할 일이다.

보다 행복하고 보다 평화롭고 보다 윤택한 삶을 살아야만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은 아닐 텐데, 우린 왜 매번 보다 나은 내일을 전제로 지금의 부족함을 제거의 대상으로만 여기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간다면, 세상을 바꾸려고 나서기 전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것이 내 눈에 하찮고 부조리하게 여겨지더라도, 먼저 차분히 바라보고 깊이 사유하며 고요히 묵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마태 18,4.10). 교회의궁극적 목표는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난다(마르 4,26-129). 이 세상이 불의와 부조리로 가득 차 보이는 것은 이미 하느님의 섭리대로 선하고 정의롭고 조화롭게 창조된 세상의 질서를 우리가 소홀히 한 때문이지 하느님 나라 자체가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불의와 부조리속에서도 저절로 자라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가며 이러쿵저러쿵 현실을 비난하고 재단하는 교만을 내려놓고, 본디 인간 됨과 본디 지켜야 할 것과 본디 행해야 할 것을 찬찬히 살펴보는 데서 하느님 나라 는 시작한다. 교회는 불의에 항거하는 영웅들의 투쟁 장소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 당신 뜻대로 머무시도록 준비하는 장소이다. 하느님 나라는 건설해야 할‘ 무릉도원이 아니라 창조 때의 본모습으로 회복해야 할‘ 우리의 본다 삶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멋지게 만들어 놓은 본래의 나를 내팽개치고, 나 아닌 나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세상의 논리에 내 삶을 저당 잡힌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데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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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받는 것은 제 삶의 자리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직결된다. 저마다 삶의 지향과 그 지향에 따른 구체적 실천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전투구와 약육강식에 가까운 경쟁과 대립은 우리를 하나의 삶의 방식에 집착하게만든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돈을 벌어야해!‘라는 논리가 언제부터 이리 광범위하게 우리 삶을 규정했는지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각각 고유한 가치를 지닌 삶이 특정 계급이 누리는 삶의 형식으로 저울질 당하게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지금과 달랐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돈보다 사람이 중요해‘라는 우리 어머니들의 정연한 가르침은 우리 삶 곳곳에살아 꿈틀거렸고, 그래서 저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자랐다. 하느님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셨다(야고 2,5). 모든 걸 버리고 예수ㄹ 따르는 삶이 실은, 모든 걸 얻는 부유한 삶이라는 것을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린 신앙인이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아직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제 식으로 찾아 나서고 쫓아다니면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 가난함을 유지해야 한다. 누군가 손 내밀 사람을 조용히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하다.
무슈‘라는 말을 듣는 것이 아직도 난 익숙하지 않다. 내가 공부한 성경을 두고 다른 의견을 내는 목소리, 비판을 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엔 더더욱 익숙하지 않다. 제 아무리 대단한 공부를 했다고 한들, 듣는 귀를 잃어버린 이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내게는 여전히 듣기 거북한 것들이 많다. 나의 고집과 우쭐거림 때문이다. 선택받고 싶으면 내려놓고 비워 내야 한다고 매일 매순간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도 ‘무슈‘, 그 한 마디 말에 평정심을 잃는 것이 내 모습이다. 선택받고자 하면서 매번스스로 선택하는 난, 뭣하나 싶다.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뭣이 중헌디?‘ 하고 또 다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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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까지의 나의 길은 내가 걸어온 나의 길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서 닦여진 길이었으며,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진 책과 교실이었다. 생각하면 이것은 나의 선택은 아니었다. 심부름 같은 길이었다.[냇물아, 22]

아버님은 그 책에서 사람은 그 부모를 닮기보다 그 시대를 더많이 닮는다고 하였지만 내가 고향에 돌아와 맨 처음 느낀 것은 사람은 먼저 그 산천을 닮는다는 발견이었습니다. 나무야, 14】

그 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나는 되도록 1등을 하지 않아ㅇ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들로부터 벌을 자초하는 장난을 저지르는 일을 계속했다. 운동장 한가운데 그려 노은 동그라미 안에 꿇어앉아 있는 벌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아침 조회 시간에 운동장을 달리는 벌을 자초하기도 했다. 교단의 교장 선생과 앞에 줄지어 선 선생들의 뒤를 돌아 학생들의 뒤까지 크게 운동장을 몇 바퀴 달리는 동안 전교생이 머리를 돌려 바라보기도 했다. 어수선한 조회 분위기 때문에 교장선생이 벌을 중지한 적도 있었다. 전교생을 상대로 하는 이벤트였던 셈이다.(냇물아, 943)

세월이란 강물처럼 흘러가면 그만인 것, 굳이 1월 1일이라고무엇을 각오하라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렸던 우리들도 충격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었지만 우리교실은 그 말이 갖는 철학(?)적 깊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 공부도 운동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친구였습 니다. 신나게 리듬을 타고 숙제 아니면 심부름을 댔던 나로서는 뼈아픈 후회로 남았습니다. 담론, 4141

어쩌면 우리는 오늘의 현실 생리(現實生理)에 맞지 않는 이국인(異國人)일지 모른다. 우리는 오만한 자들에 의해 우리의 영토(領土)를 틀림없이 짓밟히고 있다. ……… 우리는 한낱 그늘진 곳에서만 울 수 있는 슬픈 인간군(人間群)들인지도 모른다.
…… 나는 이제부터는 새로운 나의 생명(生命)을 호흡(呼吸)할작정이다. …… 과감히 피의 정화를 기해야겠다.(대학 시절 친구에게 보낸 편지) [배진, 읽기,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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