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노숙인 사이에 몇 번 오고 갔던 짤막한 대화이다.
잘먹고, 잘 씻고, 무엇보다 제대로 잘 수 있는 삶이 주교좌성당 앞 노숙인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내 생각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매번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내 삶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노숙인들은 그야말로 사회적 ‘루저‘들인 셈이다.
아마 그 노숙인은 나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할 때마다 노숙인과의 그 대화를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라는 노숙자의 말은, 기존의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준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묻게 하는 말이다. 그 준거가 하느님의 뜻과 자연스럽게 상응하지 않는다면 내 삶을 다시 찬찬히 살펴봐야 할 일이다.

보다 행복하고 보다 평화롭고 보다 윤택한 삶을 살아야만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은 아닐 텐데, 우린 왜 매번 보다 나은 내일을 전제로 지금의 부족함을 제거의 대상으로만 여기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간다면, 세상을 바꾸려고 나서기 전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것이 내 눈에 하찮고 부조리하게 여겨지더라도, 먼저 차분히 바라보고 깊이 사유하며 고요히 묵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마태 18,4.10). 교회의궁극적 목표는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난다(마르 4,26-129). 이 세상이 불의와 부조리로 가득 차 보이는 것은 이미 하느님의 섭리대로 선하고 정의롭고 조화롭게 창조된 세상의 질서를 우리가 소홀히 한 때문이지 하느님 나라 자체가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불의와 부조리속에서도 저절로 자라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가며 이러쿵저러쿵 현실을 비난하고 재단하는 교만을 내려놓고, 본디 인간 됨과 본디 지켜야 할 것과 본디 행해야 할 것을 찬찬히 살펴보는 데서 하느님 나라 는 시작한다. 교회는 불의에 항거하는 영웅들의 투쟁 장소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 당신 뜻대로 머무시도록 준비하는 장소이다. 하느님 나라는 건설해야 할‘ 무릉도원이 아니라 창조 때의 본모습으로 회복해야 할‘ 우리의 본다 삶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멋지게 만들어 놓은 본래의 나를 내팽개치고, 나 아닌 나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세상의 논리에 내 삶을 저당 잡힌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데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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