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받는 것은 제 삶의 자리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직결된다. 저마다 삶의 지향과 그 지향에 따른 구체적 실천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전투구와 약육강식에 가까운 경쟁과 대립은 우리를 하나의 삶의 방식에 집착하게만든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돈을 벌어야해!‘라는 논리가 언제부터 이리 광범위하게 우리 삶을 규정했는지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각각 고유한 가치를 지닌 삶이 특정 계급이 누리는 삶의 형식으로 저울질 당하게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지금과 달랐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돈보다 사람이 중요해‘라는 우리 어머니들의 정연한 가르침은 우리 삶 곳곳에살아 꿈틀거렸고, 그래서 저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자랐다. 하느님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셨다(야고 2,5). 모든 걸 버리고 예수ㄹ 따르는 삶이 실은, 모든 걸 얻는 부유한 삶이라는 것을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린 신앙인이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아직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제 식으로 찾아 나서고 쫓아다니면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 가난함을 유지해야 한다. 누군가 손 내밀 사람을 조용히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하다.
무슈‘라는 말을 듣는 것이 아직도 난 익숙하지 않다. 내가 공부한 성경을 두고 다른 의견을 내는 목소리, 비판을 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엔 더더욱 익숙하지 않다. 제 아무리 대단한 공부를 했다고 한들, 듣는 귀를 잃어버린 이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내게는 여전히 듣기 거북한 것들이 많다. 나의 고집과 우쭐거림 때문이다. 선택받고 싶으면 내려놓고 비워 내야 한다고 매일 매순간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도 ‘무슈‘, 그 한 마디 말에 평정심을 잃는 것이 내 모습이다. 선택받고자 하면서 매번스스로 선택하는 난, 뭣하나 싶다.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뭣이 중헌디?‘ 하고 또 다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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