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무서운 시간의 속도를 달리면서 삶의 중요해가치 두 가지를 꼽게 되었어요. ‘건강함‘과 ‘자연스러움이요 과장된 의미 두기로 힘들어 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을 건강하게 꾸리는 것. 몰아닥치는 시간의 흐름에 더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 건강한 노력은 아낌없이 하되, 애써도닿지 않을 것은 억지로 붙잡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직 자연스럽지 못하고 언제나 실수투성이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애틋함입니다. 입버릇이 된 ‘지극함‘과도 비슷한 말이지만 애틋함은 연민의 근원이지요 이리가 사는 일에는 모두 연민의 힘이 필요합니다. 연민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일로 바쁩니다. 그래서더 많은 법과 재판이 필요하게 되었고 죄와 벌이 많아진 세상이 되었습니다.
- 이것을 극복하는 일은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에요. 우리 억지로라도 그 마음을 배워 갑시다. 때때로 쓸쓸하고 억울해도 그렇게 살다간 아름다운 영혼들이있음을 기억해 냅시다. 의식과 무의식의 모든 경계 속에서우리는 존재합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야말로 ‘자발적 가난이 필요하다고요. 기대를 내려놓고 곁을 내어 주는것이 편하게 우정을 나누는 방법이겠죠. ‘나라면 아닐 텐데말고 ‘너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 또 편해집니다. 그리고 천천히 관계를 풀려고 마음먹으면 조급함이 가시고 얼마간 평정이 찾아옵니다. 그렇게 시간의 힘에 기대어 괜찮아지곤 했어요.

...사람에게 기대면 함께 넘어집니다. 사람은 그저 내가 사랑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사랑은 절대 기대는 것이 아닙니다. 동행이란 나란히 걷는 것이죠. 내가 홀로 서고, 상대방도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인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기대는 울타리가 아니라 서로 바라봐 주고 그저 사랑하는 것만이 절실한 거지요. 기대는 것 말고, 기대하는 것 말고, 그냥 기다림은 어떨까요. 무관심은 위험한 것이니까요.
기다려 주고 다시 기다려 주고…. 나중 보면 모두 돌아와 우리 앞에 아름다운 꽃으로 피지 않을까요. 기다릴 줄 아는사람은
아직 피지 않은 꽃잎과 향기를 믿는 사람입니다. 기다림이 곧 배려이고 환대이며 인문정신입니다.
순간순간이 모여 영원이 됩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모여 영원한 사랑이 되는 것이지요. 잠시 일손을 멈추고 편지를 쓰는 이 시간 또한 영원일 거예요.

쿠바엔 아무리 많은 불만이 있어도, 어떠한 욕망이 있어도, 그 불만이나 욕망이 사람들을 삼켜 버리지 못합니다. 쿠바인들에겐 근원적인 생명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강인해 보이고 당당해 보였나 봐요. 쿠바에서 지내다 보면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다가오고 그실천은 가능하다고 믿게 됩니다. 결국 욕망의 문제입니다.
욕망을 다스리려면 감수성의 회복이 우선이고 이를위한 문화예술을 구조적으로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겠지요.
사실 처음엔 저도 겹겹 껴입고 있었던 문명 때문에 쿠바의하루하루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소유를 따라가면 불편한 것투성이던 쿠바가 존재를 따라가자 이만큼 편하고 유쾌한 곳이 없게 다가왔어요.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욕심이 오히려 순간의 느낌을 이해할까 봐 하나씩 천천히 모든 것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지루할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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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개새끼야!"
이런 말을 들으면 불쾌합니다. 화가 납니다. 인격을 손상당하는 상처를입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장의 측면에서 보면, 이 역시 엄연한 문장입니다. 짧은 감탄문이 다 그렇듯 말입니다. 다만 ‘너‘라는 주어가 생략되었고, 술어가 개새끼‘라는 명칭에 압축된 채 발화되었을 뿐입니다. "너는 인격이나 품성이 개처럼 못됐고 생각이나 감정이 동물의 수준에 불과한 존재야." 굳이 분석하자면 이런 의미와 의도를 담은 문장이지요.
이렇듯 욕설도 아주 짧은 문장입니다.

이렇게 ‘언어‘를 잣대로 청소년들의 삶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명확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짧은 문장만 반복하는 사람은 생각의 길이가 짧아지게 된다. 짧은 문장만 쓰는 사람은 긴 문장을 생산할 능력이 떨어져서 보다 나은 삶을 누리기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짧은문장에만 익숙해진 사람들은 성찰과 반성적 사고에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점입니다.

바야흐로 초超영상시대입니다. 학교나 학원에서 자습할 때를 제외하고아이들은 거의 모든 것을, 아니 세상 전체를 영상으로 만납니다. TV, 인데 게임, 특히 유튜브를 통해서요. 이렇듯 날로 진화하는 영상매체는시대의 산물이자 선물로서 많은 이점을 자랑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없지 않습니다. 우선 두 가지 문제점을 살펴볼게요.
첫 번째 문제는 수용자가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시각적 영상을 소비할 때에는 제공자가 요구하는 속도를 어쨌든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요. 이때 수용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은 천천히 살펴보면 좋은데 영상매체에서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미 방영된 것은 다시보기‘로 확인할 수 있지만 실시간으로 보아야하는 TV 프로그램이나 영화는 불가능하죠. 게다가 시각적인 것은 눈으로 보는 동안‘만큼은 자신이 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줍니다.

시적 표현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60일‘이라는 시간은 보통 두 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열정의 예순 번의 낮과 비통의 예순 번의 밤‘ 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시간이지만 표현에 담긴 내용과 느낌은 전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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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슈만은 언젠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작곡은 제게 큰 기쁨입니다. 창작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생활 속에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자기를 잊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자기를 잊는 경험’, ‘자기 관리‘, ‘자신만을 위한 시간‘, ‘나만의 시간’ 뭐라고 부르든 이 여성은 이런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클라라 슈만(결혼 전의 성은 비크)은 경외심을 일으키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19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암보로 연주한 최초의 유명 콘서트 아티스트로 음악사에 이름을 남겼고(이후 악보 없이 연주하는 관행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리스트, 쇼팽, 브람스 등 당대 음악계의 주요 인사들은 클라라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 평론가는 열여덟 살의 클라라가 빈에서 열었던 일련의 연주회에 참석한 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 예술가의 등장은 획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평범한 패시지와 가장 통상적인 모티프가 창조적인 손길을 거쳐 중요한 의미와 색채를 얻는다. 이러한 색채는가장 유능한 예술가만이 부여할 수 있다."
완벽한 기교를 갖춘 미증유의 예술가였던 클라라는 여덟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는 슈만가의 살림을 거의 혼자 힘으로 꾸렸다. 돈을버는 가장이었고, 아들 펠릭스가 죽은 뒤에는 손자까지 보살폈으며, 많은가족 구성원의 다양한 심리적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바쁘고 헌신적인 교사였으며 많은 작곡가들의 뮤즈였다. 클라라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여러 곡의 놀라운 작품(스무 곡의 피아노곡을 비롯해 수십 곡의 가곡, 실내악곡, 기악곡 등)까지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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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소은은 산에 있고 대은大隱은 시장에 있다.
고 합니다. 정말 큰 수행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서 관계를 푸는 데 있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깊은산속에서 면벽하는 수행자보다 먹고사는 일로 그악스럽게밀고 당기며 사랑의 기술을 배워가는 민중들이 더 큰 수행자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정 씨가 선택한길을 스스로 갸륵해 하고 격려하길 바라요.
인연은 관심의 다른 이름입니다. 관심이란 무엇일까 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소리와 향기에 고요히 귀를 기울이고 오래 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햇살 묻은 존재의 솜털을 눈부시게 아프게 발견하는 일입니다.

먼 데서 서울로 돌아왔다‘라는 사실이 일상의 의미 를 다시 일깨워 주었어요. 이제 저에게 서울은 여행과 일상그 사이에 있더라고요. 여행은 일상의 도피처가 아니고, 일 상은 도피해야 할 굴레가 아님을 조금씩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일상은 삶의 가장 큰 무게를 가진 중심이죠.
그러니 버텨 내야 할 것이 아니라 잘 꾸려야 함을 새삼스레깨닫습니다. 일상을 버티려고만 할 때 저는 삶에 끌려갔습니다. 속도와 방향도 온통 제 손에서 벗어나 버렸고요. 그래서 일상의 주인이 되자고 자주 마음을 다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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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엇보다 먼저 저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 심히 행복하려고 해요. 때로는 숨차 헐떡이는 날들도 있겠지 요. 하지만 제 생명의 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 나름 아름다.
울 것이고, 스스로를 사랑할 때 타자에게로 한 발 나아갈 수있을 거란 선생님의 말씀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소리, 하면 저절로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하나는 깨우는 힘입니다. 절에 가면 북, 종, 구름판, 목어, 사물四物이 있지요. 모두 삼라만상을 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잠을 깨우는동시에 깨달음의 의미도 있겠지요. 이렇게 보면 주변의 소리는 내 일상과 내면을 깨우는 에너지입니다. 또 하나는 끊임없이 헤엄쳐 나가는 힘입니다. 아마도 소리의 리듬이 만드는파장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연상되는지도 모르겠네요.

선율은 먼 데까지, 오래,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잖아요.
소리는 바람처럼 모든 틈에 스밉니다. 아무리 어둡고 적막한곳에라도 닿을 수 있지요. 또 소리는 소리를 창조하고 더불어 춤춥니다. 우리는 이를 화음이라고 하죠. 그래서 음악이있는 곳에는 쉽게 화해가 스미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일까요. 소리는 철학이고 소리는 삶이다‘라는말도 있죠. 소리는 정말 중요한 에너지라서 나만의 연주, 나만의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건 중요한 것 같아요. 여린 현에서울려 나오는 선율, 폭풍같이 내려치는 선율 사이사이에 우리가 앉아 있지요. 가끔 희디흰 침묵이 번집니다. 그 사이로 길이 납니다. 자기만의 소리를 찾아 떠나는 우리들의 모습이무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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