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 개새끼야!"
이런 말을 들으면 불쾌합니다. 화가 납니다. 인격을 손상당하는 상처를입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장의 측면에서 보면, 이 역시 엄연한 문장입니다. 짧은 감탄문이 다 그렇듯 말입니다. 다만 ‘너‘라는 주어가 생략되었고, 술어가 개새끼‘라는 명칭에 압축된 채 발화되었을 뿐입니다. "너는 인격이나 품성이 개처럼 못됐고 생각이나 감정이 동물의 수준에 불과한 존재야." 굳이 분석하자면 이런 의미와 의도를 담은 문장이지요.
이렇듯 욕설도 아주 짧은 문장입니다.

이렇게 ‘언어‘를 잣대로 청소년들의 삶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명확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짧은 문장만 반복하는 사람은 생각의 길이가 짧아지게 된다. 짧은 문장만 쓰는 사람은 긴 문장을 생산할 능력이 떨어져서 보다 나은 삶을 누리기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짧은문장에만 익숙해진 사람들은 성찰과 반성적 사고에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점입니다.

바야흐로 초超영상시대입니다. 학교나 학원에서 자습할 때를 제외하고아이들은 거의 모든 것을, 아니 세상 전체를 영상으로 만납니다. TV, 인데 게임, 특히 유튜브를 통해서요. 이렇듯 날로 진화하는 영상매체는시대의 산물이자 선물로서 많은 이점을 자랑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없지 않습니다. 우선 두 가지 문제점을 살펴볼게요.
첫 번째 문제는 수용자가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시각적 영상을 소비할 때에는 제공자가 요구하는 속도를 어쨌든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요. 이때 수용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은 천천히 살펴보면 좋은데 영상매체에서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미 방영된 것은 다시보기‘로 확인할 수 있지만 실시간으로 보아야하는 TV 프로그램이나 영화는 불가능하죠. 게다가 시각적인 것은 눈으로 보는 동안‘만큼은 자신이 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줍니다.

시적 표현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60일‘이라는 시간은 보통 두 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열정의 예순 번의 낮과 비통의 예순 번의 밤‘ 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시간이지만 표현에 담긴 내용과 느낌은 전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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