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순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 일울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을 더 온전히지 뜻에 맡겨야 하고,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향한 자기의 정신으로만 살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때의 체험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 가려는 마지막 노력이나 의지를 모두 내던져 버리는, 나를 묶고 있더 마지막 실오라기까지 풀어주는 느낌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는 말로 표현하면 너무 간단하지만 그 이후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영향을 미쳤다.

하느님 뜻은 내가 처한 상황 ‘저 쪽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황 자체가 바로 나에 대한 그분의 뜻 ‘그것‘이었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내가 상황을 그분 손에서 넘겨받듯이 받아들이고, 고삐를 풀어놓은 채 나 자신을 온전히 그분 섭리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분은 나에게 나 자신의 어떤 간섭이나 노력, 어떤 유보나 예외, 내가 조건을 붙이거나 주저할 수 있는 모든여지를 배제하는 철저한 신뢰를 요구하셨다.
그분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를 바라셨다. 여기에 요구되는 것은 절대적인 신앙이었다.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를 믿고, 그분이 아주 사소한일에도 관심을 두고 계심을 믿으며, 나를 받쳐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그분의 힘과 사랑을 믿는 그런 신앙이었다.
이는 마지막 남은 내면의 의혹, 곧 하느님께서 그곳에계시면서 나를 떠받쳐 주지 않으시리라는 마지막 두려움까지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가 곧잘 잊어버리는 평범한 진리가 있다.
바로 하느님이 육화를 통해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다는것이다. 우리는 이 교의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 곧 하느님이 육체를 지니신 까닭에 춥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통증을 느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아셨다는사실을 자주 묵상하지 않는다.
그분은 긴 세월 동안 목수로서 평범한 노동을 하셨고,
피곤한 몸으로 먼지투성이의 길을 걸으셨으며, 차가운밤공기나 스산한 비에 몸을 움츠리시고,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도 깨어 계셨고, 목마름과 더위를 겪으셨으며, 지치고 완전히 탈진하기도 하셨다.
그분은 추운 새벽에 뻣뻣하게 경직된 몸을 일으키는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아셨고, 온몸이 욱신거리는육체적 피곤과 두통, 치통도 아셨을 것이다. 때로는 근심과 번민을 하셨고 갈등을 겪기도 하셨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육화를 통하여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생활이 어떤 것이며, 인간이 두 손으로 일하는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셨다.

그런 환경에서도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졌고,
무슨 일에든 힘이 다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최선을다했다.
그것은 바로 그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시베리아에서 새 도시 건설에 협력한 것은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니키타 후르시초프가 원해서가 아니라하느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치른 고역은 결코 징벌이 아니라, 내 구원을 위해두려워 떨며 실현해 나가는 하나의 길이었다. 내가 하는일이 비록 들짐승이 내는 단말마의 비명처럼 처참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저주가 아닌 하느님께 향하도록 돕는 길이었다. 그러기에 이 일은 하느님의 손에서 친히 내게 부여된 것이고 품위를 높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나에게 제시된 하느님의 뜻이었다.

사제는 친구를 사귀려고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오는 수인들 앞에서 참으로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노력과 거의 무관한 하느님 은총의 역사役事라는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사제를 찾는 것은 그가 인격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제에게 현명한 조언이나 영적 권고 또는 갖가지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는 어떤 해답이 아니라 죄를 사해주는 성사의 힘을 기대하고 찾아왔다.
사제는 이러한 사실 앞에서 기쁨을 느끼는 한편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사제를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대변자,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하느님 일을 수행하는 이로 생각하고 사제를 찾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사제는 자신의 개인적 불편을 넘어 육체적으로 아무리 피곤하고 관리들한테 어떤 무서운 협박을 당하더라도 자신의봉사직과 사목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수인 한사람 한사람을 만날 때마다 현재이 시각, 이곳에서 내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과 그토록기묘하고 무시무시한 길을 거쳐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신하느님 섭리의 손길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하느님과 신앙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
이곳에선 신학을 통해 배운 교과서적 답변보다 하나의물음, 하나의 대화, 하나의 만남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 은총의 손길을 느낄 줄 아는 감각과 직관력, 끝없는연민의 마음만이 요구되었다.

성장에 요구되는 것은 어떤 계획된 접근 방법이나 계산된 실천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심지어는 속죄와 단식과 극기 같은 고행이라 해도 그것이 자기 뜻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도움 은커녕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사람은 늘 하느님 뜻을 성취하는 방법보다 그분이 우리 앞에 예비해 두신 사람과 장소와 사물 안에서 드러나는 그분 뜻에 일차적으로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설령 그것이 고통과 위기와 고독, 굶주림이나 질병 같은육체적 시련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느님 뜻을 실현 하고 있다는 의식이 기꺼이 희생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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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기며 우리가 만들어 낸 세계 속에서 평온하게 살아간다. 또한 제아무리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이미 타협해 사는 법을 터득한 기존질서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면서 하느님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우리의 판에 박힌 생활을 분쇄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에게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것,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당신과 영원토록 함께 살도록 조처해 두셨다는것, 세상의 사물이나 세상 자체가 결코 우리의 영원한 터전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당신 것이며 만사에 당신을 찾고 당신께 얼굴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기위해 일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어지도록 허용하심으로써 이 세계가 우리의 영원한 거처나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고, 올바른정신으로 참된 가치에 대한 감각을 되찾을 수 있게 우리생각을 당신께로 되돌리게 해주신다.

우리는 불만과 의심 많은 아이처럼 위기에 직면해서야비로소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께 얼굴을 돌린다. 크나큰손실이나 가족의 불상사로 깊은 절망감을 맛보게 될 때비로소 그분께 몸을 돌리고 ‘왜?‘ 라고 묻는다. 정말 어쩔수 없는 때를 맞아서야 그분께 얼굴을 돌리고 그분의 도우심과 지원과 위로를 구하는 것이다. 이하느님은 신비롭게도 당신 섭리로 우리의 비극을 이용해 당신 현존과 사랑, 우리에 대한 변함없는 관심과 배려를 우리의 타락한 인간 본성 안에 일깨워 주신다.
하느님은 결코 앙갚음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당신을 잊고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벌하고자 재난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그분은 항상 현존하시며 변함없이 충실하시다. 우리가평온하고 안락한 시기에는 그분을 바라보거나 찾지 않지만, 그분은 언제나 그곳에 계시면서 우리를 이끌고 보살피신다. 우리가 의지하고 또 날마다 우리를 부양해 준다.
고 믿고 있는 바로 그것을 그분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본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곧 우리는 기존질서와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지낼 때는 그 같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느님 뜻이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를 미리 규정하는 것과 하느님 뜻이 이것이어야 한다고 단정하게 만드는 그 생각을 합리화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빛어내는 소치일 뿐 아니라 가장 다루기 힘든 유혹의 근원이다

단순하고 평범한 진리,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변 환경한 장소와 사람들과 문제점을 통해 우리에게 하루하루그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곧 그분의 뜻이다. 이 뜻을 단순히 이론이나 하느님 은총으로 가끔씩 부여되는 섬광같은 통찰력이 아니라 그날그날 일상에서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나치게가을 쓸 필요는 없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뜻은 하루의모든 상황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므로 우리는 모든 사실을 그분이 바라보시고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그대로 관망하는 법을 터득하기만 하면 된다.)이런 사실을 하느님 뜻으로 보지 않고 지나치려는 것이 바로 유혹이다. 유혹은 너무나도 한결같고 사소하고단조롭고 일상적이라는 이유에서 지나쳐 버리는 대신,
하느님 뜻은 이러해야 한다는 우리 관념에 어울리는 더고상한 다른 어떤 ‘하느님 뜻을 찾으려는 데 숨어 있다.
테플라야 고라에서 우리가 겪은 유혹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것은 삶이 스스로 기대했던 그것이 아님을 돌연히깨닫게 된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유혹이다. 그에 대한해답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의 이 사실만이 진실로하느님 뜻임을 깨닫는 데 있다. 매일 매순간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어려움은 그것이 다른 모든 위대한 진리처럼 지나치게단순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더 까다로운 해답을 찾는 동안, 해답은 줄곧 우리 코앞에 모습을드러낸다.
이것은 하느님의 모든 진리가 지닌 단순함이라는 표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나 단순하게 보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것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모든 진리가 그렇듯 실천에서도 결코쉽지 않다. 이것은 너무 단순해 그런 확신에 머무를 줄모르는 인간 편에서 볼 때 따르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인간의 나약한 본성은 쉽게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환경은 지극히 단조롭고 일상적이며 판에박힌 듯 똑같아 보이지만 우리에게 그날그날 부여되는하느님 뜻은 그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를 빗나가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그 속에 몰입되어 비록 순간적일지라도 위대한 진리를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신적 진리를 파악해 그것을 따르고 행동하며, 그에게서 발산되는 영감의 빛을 통해 매순간을대면하고 그것만을 되새기며 유일한 원칙으로 삼아 그 방향으로 매진할때 우리는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변키거나 모든 악을 제거하고 온갖 병폐를 치유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과 섭리가 작요하는 상황 속에서 사람이 당신 뜻대로 행동해 주기만을기대하신다. 그리고 하느님 은총은 그가 행동하는 데 결코 부족함이 없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환경에서 체험하는 무력감은 그상황 안에 자신을 지나치게 개입시키려는 경향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무력감에 자신을 아무 가치 없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의식에 압도당한다.
우리는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우리가 할 수 있는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몰두하여 그분 뜻과 섭리는 모두잊어버린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의 존재 의미와 존엄성, 가치, 그리고 개인이 그분의 섭리 안에서 수행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역할 등을 한시도 잊지 않으신다. 그분에게 각 개인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똑같이 중요하므로 늘 보살피신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각 개인에게부여된 하루하루의 상황을 당신 손에 반드시 받아들이시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 주기를 기대하시며, 행동하는 데 필요한 은총을 내려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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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바람에 색깔을 칠하는 사람입니다. 분명 거기에있는데, 분명 무언가 있는 것을 느끼는데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우리 대신 표현해주는 사람입니다. 정제된감정을 집중하고, 고르고 골라 가장 순수하고 구체적인 이미지와 진실된 언어로 우리 대신 말해줍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머리가 완전히 폭발해버린 듯한 느낌을 받을 때 시를쓴다고 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목에 무언가 뜨거운것이 치밀면, 그것은 시를 쓰라는 신호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순간적이라도 지독한 사랑을 느낄 때의 감정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들은 그래서 모두 자신이 느끼는 사랑을 말로 옮긴 사람들입니다. 남녀간의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이웃 사랑, 나라 사랑, 한 마디로 뭉뚱그려 모두 삶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정시인 새러 티즈데일은 말합니다. "나의 노래를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심장입니다(It is my heart that makes my songs, not I)."
즉 자기의 심장으로 우리를 대변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입니다.

왜냐하면 시는 그렇게 사전적이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단순간결하게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그런 ‘선언‘으로는마음의 신비를 절대 전할 수 없습니다. 시는 정보 위주의선전문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상을 보고 그냥 ‘이건 책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시가 될 수 없지요. 그 책상에서친구와 함께 공부했던 추억, 그 친구의 얼굴, 그 시간의 소중함을 떠올리며 그 책상에 대해 마음과 이미지로 말하는것이 바로 시입니다. 그래서 시는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웅변으로 말하기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조그만 소리로 말하는것, 신작로처럼 뻥 뚫린 길을 놔두고 향기로운 오솔길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인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는 시란 문을 활짝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살짝 문을 열었다 닫고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육신의 생일은 9월이지만,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것이라는 <생일>을 읽으며, 나도 다시 한 번 태어나고픈 소망을 가져봅니다. 저 눈부신 태양을 사랑하고, 미풍 부는 하늘을사랑하고, 나무와 꽃과 사람들을 한껏 사랑하고, 로제티처럼
"My love is come to me!" 라고 온 세상에 고할 수 있는 아름다운 4월의 ‘생일‘을 꿈꾸어봅니다.

어른과 아이 - 앤 머로 힌드버그-

일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어른
밥벌이를 하고 내일을 계획하려
근심스럽게 저녁 하늘을 훑어보고
걸을때 서두르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어른
이웃을 의심하고 가면을 쓰고
갑옷 입고 행동하며 눈물을 감추는 것은 어른.

노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아이
미래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기쁨으로 노래하고, 경이로워하며 울 줄도 알고
가면 없이 솔직하고 변명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잘 믿고 가식도 전혀 없이,
사랑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아이.

아침마다 우리는 가면 쓰고 갑옷 입고 세상이라는 전쟁터로 나갑니다. 내 안의 순수한 마음, 남을 믿는 마음, 경이로움을느낄 줄 아는 마음을 억누르고 무관심과 무감각의 갑옷으로 단단히무장한 다음, 삶이라는 커다란 용과 싸우러 나갑니다.
밥벌이를 위해 서둘러 걷고, 남을 의심하고 또 미워하고, 내가 한 발짝이라도 더 올라서기 위해 남을 무시하고 짓밟기도합니다. 저녁이 되면 오늘의 싸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내일의 전투 계획을 짭니다.
오늘의 행복은 미래를 위해 접어두고, 가끔씩 왠지 사는 게서글퍼져 눈물이 날라치면 매몰차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딱딱한 갑옷 입고 총알 쏟아지는 적진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가면 없이 솔직하고, 기쁨으로 노래하고 사랑하기좋아하는 내 안의 아이는 참 살기가 힘듭니다.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고 떠받드는 유명인, 즉 ‘Somebody‘
가 되는 것은 마치 여름날 개구리가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것과 같이 의미 없고 허무한 일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선거에당선되기 위해 목이 터져라 이런 저런 슬로건을 부르짖는 일,
기계적으로 박수치며 입에 발린 말로 찬양하는 청중 앞에서와글와글 자기 이름을 외쳐대는 일은 얼마나 끔찍할까요.
미국 듀크 대학의 농구 감독 시셉스키는 모든 농구 지도자들의 꿈인 NBA 챔피언, LA 레이커스 팀의 감독직을 고사했습니다. 제자로부터 "한 명의 선수는 단지 손가락 한 개에 불과하지만, 다섯 명으로 뭉치면 단단한 주먹이 된다는 소중한교훈을 가르쳐주신 감독님, 감독님의 지도와 격려를 받기 위해 이 학교에 왔습니다. 저희의 감독님으로 남아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대중이 권력과 부로 찬양하는 ‘Somebody 보다는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으로 맞아주는 ‘Somebody‘로 남기를 택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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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사람의 세 가지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오는 것이 한 가지즐거움이고,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 오는 것이한 가지 즐거움이고, 나 혼자 외롭게 찾았던 곳을 마음이 맞는좋은 벗들과 어울려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다."

사람은 관물을 통해 사물의 가치를 사물의 이치로 인식한다.
사문의 이치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사물이 각기 지닌 가치를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관물의 이유는 사물의 이치를 인식해사물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데 있다. 단순히 사물을 보지 말고사물의 이치를 봐야 비로소 사물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관물이란 사물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고, 마음이 아닌 이치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낫고, 이치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보는 것보다 낫다. 이치로 사물을 바라보면 환히 통하여 보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관물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등下은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고, 중등中等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것이고, 상등上等은 이치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보면 한가지 사물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보면 한 가지 사물 밖의 다른 사물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치로 사물을보면 ‘일이관지一以貫之’ 곧 한 가지 사물로 만 가지 사물을 환히꿰뚫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봄날 햇볕처럼 따뜻하고 온화해야 넓은 도량을 갖출 수 있다. 또한 가을 서리처럼엄숙하고 엄정해야 높은 절개를 지킬 수 있다. 사람이든 일이든품을 때는 봄날 햇볕처럼 따뜻해야 하지만, 끊을 때는 가을 서리처럼 서늘해야 한다. 천하의 천한 일인 똥을 날라 먹고사는 엄행수의 덕을 높여 칭찬하고 벗의 정을 나눈 이덕무에게서 봄날 햇볕 같은 넓은 도량을 읽을 수 있다면,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출세를 멀리한 채 처사와 은사의 삶을 추구하는 이덕무에게서는가을 서리 같은 높은 절개를 엿볼 수 있다. 이덕무가 생각한 인격의 궁극적인 경지는 넓은 도량과 높은 절개를 함께 지니는 것이다. 가을을 좋아해 가을 시를 많이 남긴 이덕무가 그 못지않게‘
봄을 읊은 봄 시를 많이 남긴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고 웃는 것은 뒤쪽까지 환히 트인 줄 알기 때문이다. 서둘러 거울 뒤쪽을 보지만 단지 까맣고 어두울 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 왜 까맣고 어두운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기묘하다. 거리낌이 없어서 막힘도없구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무엇에도 막히지 않아야 참된 감정과 진실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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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 반듯하고 비스듬해 간추리기 어렵고 難齊萬品整
온갖 빛깔 옥돌, 해에 구운 노을이네 色色想雕日灸
먹는것 입는 것 다르지만 이치는 원래 하나 著雖殊元一致
누에 치는 이 농사짓는 이 조롱하며 웃을 건가 家未心酒耕家
< 아정유고 1>

이덕무는 조선과 중국의 역대 한시는 물론이고 일본의 한시까지 두루 섭렵했다. 이 사실을 안 어떤 사람이 이덕무에게 질문했다. "역대 시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좋습니까?" 이덕무는 어떻게 답했을까? "꿀벌은 꿀을 만들 때 꽃을 가리지 않는 법입니다. 만약 꿀벌이 꽃을 가린다면 꿀을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시를 짓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 집 안에 있는 물건 중 가장 좋은 것은 다만 『맹자』 7편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돈 200에 팔아버렸네. 밥을 배불리 실컷 먹고 희희낙락하며, 유득공의 집으로 달려가 크게 자랑했네. 그런데 유득공 역시 오랫동안 굶주려온 터라 내 말을 듣더니 그 즉시 『춘추좌씨전』을 팔아버렸네. 그리고 술을 사와 서로 나누어 마셨는데, 이것은 맹자가 손수 밥을 지어서 내게먹이고, 좌구명(『춘추좌씨전』의 저자)이 친히 술을 따라서 내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와 유득공은 서로 맹씨와 좌씨를한없이 높여 칭찬하였네. 우리 두 사람이 일 년 내내 이 책을 읽는다고 한들 어찌 굶주림을 조금이나마 모면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글을 읽어 부귀영화를 얻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우연한 행운을 바라는 술책일 뿐이니, 당장에 책을 팔아서 한때나마 굶주림과 술 허기를 달래는 것이 더 솔직하고 거짓 꾸밈이 없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네. 참으로 서글픈 일이지않은가!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자』를 팔아 밥을 사 먹고 『춘추좌씨전』을 팔아 술을 사 먹는이였으니, 이덕무와 유득공은 진실로 궁핍함과 가난함과 굶T과 추위를 함께한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지극한 벗‘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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