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순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 일울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을 더 온전히지 뜻에 맡겨야 하고,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향한 자기의 정신으로만 살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때의 체험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 가려는 마지막 노력이나 의지를 모두 내던져 버리는, 나를 묶고 있더 마지막 실오라기까지 풀어주는 느낌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는 말로 표현하면 너무 간단하지만 그 이후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영향을 미쳤다.

하느님 뜻은 내가 처한 상황 ‘저 쪽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황 자체가 바로 나에 대한 그분의 뜻 ‘그것‘이었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내가 상황을 그분 손에서 넘겨받듯이 받아들이고, 고삐를 풀어놓은 채 나 자신을 온전히 그분 섭리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분은 나에게 나 자신의 어떤 간섭이나 노력, 어떤 유보나 예외, 내가 조건을 붙이거나 주저할 수 있는 모든여지를 배제하는 철저한 신뢰를 요구하셨다.
그분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를 바라셨다. 여기에 요구되는 것은 절대적인 신앙이었다.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를 믿고, 그분이 아주 사소한일에도 관심을 두고 계심을 믿으며, 나를 받쳐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그분의 힘과 사랑을 믿는 그런 신앙이었다.
이는 마지막 남은 내면의 의혹, 곧 하느님께서 그곳에계시면서 나를 떠받쳐 주지 않으시리라는 마지막 두려움까지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가 곧잘 잊어버리는 평범한 진리가 있다.
바로 하느님이 육화를 통해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다는것이다. 우리는 이 교의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 곧 하느님이 육체를 지니신 까닭에 춥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통증을 느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아셨다는사실을 자주 묵상하지 않는다.
그분은 긴 세월 동안 목수로서 평범한 노동을 하셨고,
피곤한 몸으로 먼지투성이의 길을 걸으셨으며, 차가운밤공기나 스산한 비에 몸을 움츠리시고,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도 깨어 계셨고, 목마름과 더위를 겪으셨으며, 지치고 완전히 탈진하기도 하셨다.
그분은 추운 새벽에 뻣뻣하게 경직된 몸을 일으키는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아셨고, 온몸이 욱신거리는육체적 피곤과 두통, 치통도 아셨을 것이다. 때로는 근심과 번민을 하셨고 갈등을 겪기도 하셨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육화를 통하여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생활이 어떤 것이며, 인간이 두 손으로 일하는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셨다.

그런 환경에서도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졌고,
무슨 일에든 힘이 다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최선을다했다.
그것은 바로 그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시베리아에서 새 도시 건설에 협력한 것은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니키타 후르시초프가 원해서가 아니라하느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치른 고역은 결코 징벌이 아니라, 내 구원을 위해두려워 떨며 실현해 나가는 하나의 길이었다. 내가 하는일이 비록 들짐승이 내는 단말마의 비명처럼 처참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저주가 아닌 하느님께 향하도록 돕는 길이었다. 그러기에 이 일은 하느님의 손에서 친히 내게 부여된 것이고 품위를 높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나에게 제시된 하느님의 뜻이었다.

사제는 친구를 사귀려고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오는 수인들 앞에서 참으로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노력과 거의 무관한 하느님 은총의 역사役事라는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사제를 찾는 것은 그가 인격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제에게 현명한 조언이나 영적 권고 또는 갖가지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는 어떤 해답이 아니라 죄를 사해주는 성사의 힘을 기대하고 찾아왔다.
사제는 이러한 사실 앞에서 기쁨을 느끼는 한편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사제를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대변자,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하느님 일을 수행하는 이로 생각하고 사제를 찾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사제는 자신의 개인적 불편을 넘어 육체적으로 아무리 피곤하고 관리들한테 어떤 무서운 협박을 당하더라도 자신의봉사직과 사목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수인 한사람 한사람을 만날 때마다 현재이 시각, 이곳에서 내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과 그토록기묘하고 무시무시한 길을 거쳐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신하느님 섭리의 손길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하느님과 신앙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
이곳에선 신학을 통해 배운 교과서적 답변보다 하나의물음, 하나의 대화, 하나의 만남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 은총의 손길을 느낄 줄 아는 감각과 직관력, 끝없는연민의 마음만이 요구되었다.

성장에 요구되는 것은 어떤 계획된 접근 방법이나 계산된 실천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심지어는 속죄와 단식과 극기 같은 고행이라 해도 그것이 자기 뜻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도움 은커녕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사람은 늘 하느님 뜻을 성취하는 방법보다 그분이 우리 앞에 예비해 두신 사람과 장소와 사물 안에서 드러나는 그분 뜻에 일차적으로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설령 그것이 고통과 위기와 고독, 굶주림이나 질병 같은육체적 시련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느님 뜻을 실현 하고 있다는 의식이 기꺼이 희생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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