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완전한 평정상태‘라는 표현으로 정의럼 보인다. 키니코스주의자라면 인간의 비참이 사회전약과 관습에서 비롯한다고 할 것이고, 에피쿠로스주라면 이기적 관심과 쾌락을 좇는 태도에, 회의론자라면잘못된 의견, 즉 억견에 이 비참의 원인을 돌릴 것이다.
헬레니즘 철학들이 소크라테스의 유산을 자기 것으로 내세웠든 그러지 않았든 간에, 이 철학들은 인간이 무지하기 때문에 비참, 불안, 악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모두 소크라테스와 견해를 같이했다. 사물에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물에 대해 내리는 가치판단에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치판단을 바꿀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따라서 이 철학들은 치유의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인간이 가치판단을 바꾸기위해서는 근본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유방 !
식, 존재방식을 바꾸겠다는 선택. 이 선택이 바로 철학이 다. 철학 덕분에 인간은 내적 평화, 영혼의 평정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좋은 휴가는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고 스스로를 ‘잘 돌보는시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휴가는 철학의 시가‘ 이라 말할 수 있지요. 그렇기에 휴가로 얻는 좋은 열매란청학과 마찬가지로 평정심‘이 아닐까요. 이는 곧 감정과 느끼의 억압이 아니라 내면과 육신의 숱한 일렁임들이 만족과절제로 조화를 이룬 상태이겠지요. 이는 눈앞의 일들과 욕구와 비교에 사로잡힌 ‘지금‘에 사는 게 아니라, ‘언제나‘와 ‘영원함‘을 마음에 담은 사람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역설적으로이런 이에게 ‘지금‘의 소중한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영원을 담고 있는 ‘지금‘을 알아보는 것을 철학자들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보다.
맛깔스런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일상과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향유하는 법을 배우라고 권고합니다.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존재를 풍요롭게 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지요.

우리는다른 사물들과 똑같이 별 가루로 만들어졌고, 고통속에 있을 때나 웃을 때나 환희에 차 있을 때나 존재할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세상 만물이 별의 먼지‘라는 것은 과학적 진술일뿐더러, 깊은 의미에서는 시의 언어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이 신비를 가리키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우리는 별을 바라보며 경탄하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별의 먼지이자 신에게서 온, 그래서 신을 닮은 사랑의 작품이기 때문이지요.
깊어가는 여름 안에서 휴가를 보낼 때는 이처럼 별을 바라보며 우리의 인생을 성찰하는 귀한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현대인들은 성과 중심의 문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여가를 잘 보내는 것은 육신을 위해서나 정신적, 영성적 측면에서나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여가를 단순한 휴식이나 소일, 여흥과 구분할 필요가 있고, 여가를 향유!
하는 것이 우리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성숙시킨다는 점을기억해야 합니다.
휴가와 여가의 본래 뜻이 가장 고귀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도야하는 시간을 가지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한 사람이 바로 요제프 피퍼입니다.

독일의 가톨릭 철학자 요제프 피퍼입니다. 그는 보석 같은 책『여가와 경신』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의 수도원 전통에 힘입어 여가의 본질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요하면서도 우리에게 생기와 의욕을 주는 휴가는 삶을 성숙시킵니다. 손에 움켜쥔 것을 가만히 놓아보고, 보고 싶어하는 것만이 아닌 존재 자체를 여유 있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관조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체험은 우리가 하는 일을 새로운 관점으로 대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더 이상닦달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근본 목적을 음미하며 때로는 멈추고 기다릴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성서는 예수님께서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닦달하지 않는‘ 언어입니다. 자유로움과 관조하는 여유 속에서 그러한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세속적, 삶의 번잡함에서 잠시 벗어나 여가를 갖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삶의 요소이며, 낭비와 무위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굳은 심지를 통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결실의 시간입니다.

가을에 관한 유명하고 아름다운 3편의 시들인 「가을날Herbstag」 「가을의 끝Ende des Herbstes」 「가을herbst은 거의 연이어 배치되어 독자들이 가을의 정취와신비에 깊이 잠기게 합니다.
「가을의 끝」의 첫 연은 릴케에게 가을은 그저 좋은 풍광의시절이 아니라 뼈저린 인식의 시간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얼마 전부터 나는 모든 것이 /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 무언가가 일어나 움직이며 / 죽이고 고통을 주고있다.

한편, 「가을」의 마지막 연은 비록 가을이 나뭇잎이 떨어지듯죽음의 그림자가 서리는 조락의 때임에도, 결국은 우리에게구원의 시간이라는 위안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 두 손으로 받아내는 어느 한 분이 있다.
그러나 가을을 노래한 릴케의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역시 「가을날」입니다. 이 시를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다 보면, ‘감사‘와 ‘기도‘만이 존재의 신비‘에 다가서는 참다운 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 들녘엔 바람을풀어놓아 주소서. //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하소서.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길 사이로 /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시는 앞부분에서 우리를 절대자에게 향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절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지요.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부분을 읊조리면서는 누구나 스스로의 내면이 얼마나 성숙되고 무르익었는지를 한 번쯤 겸허하게 살펴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신의 그림자 속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며,
자연 또한 신의 숨결로 충만하고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안에 깃든 신을 발견하고 신의 가르침으로 자신이 성숙해지고 깊어져가는지를 진지하게 살피는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기에만 단단해지고 강해져서 흔들림 없어 보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과 주관을 고집하는 완고함보다는, 마음에부드러움을 지니고 우리 안에 깃든 신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의미들에 눈뜨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서 성숙함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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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기도하기를 바라지요. 내가 내속에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 안에서, 늘 새삼 우리가 하느님이과고 부르는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신 신비에 얼마나 인접해 있는지를 것작 알아차린다면, 그리고 마치 이 신비에 나를 맡기듯이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자세를 취한다면, 내가 이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나는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 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곡진한 대답이다. 신비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신비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거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보다 먼저,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 자신을인간에게 주신다. 하나님의 자기 전달‘selbstmiteilung Gottes 이다. 이것이 라너가 말하는 ‘은혜‘다. 그 은혜로 인해 우리는 이미 곁에 와 있는 신비를온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기도한다. 그래서 믿는다.

그들은 당신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들이과 마음을 초조하게 하는 처음과 끝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 없이도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속속들이 잘 압니다.당신 없이도 뭐든 스스로 계획하고 추진합니다. 그들에게 당신은 그저 세상이 지금처럼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가도록 해주시는 분, 그래서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인 그런 분 아닐까요?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들에게도 생명의 하나님이십니까? 주님, 내가 사람들에 관해 말한 것이 참인지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누가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의 마음도 (내가 아니라) 당신만이 아십니다. 나는 그저 다른 이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시지요. 당신은 내마음 깊은 곳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은 숨어 계신 분, 그러나 당신 앞에서는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속에도 내 눈에 비친 다른이들처럼 살고 싶은 바람이 슬며시 고개를 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께, 당신에 대해 말하려 하면, 내 마음은 어쩔 줄을 모릅니다. 당신을 내 생명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그 어떤 이름도 당신을 정확히 말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자꾸만 당신 아닌 다른 것으로 슬쩍 옮겨 가려는 충동을 느낍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존재를 찾으려고 합니다. 당신의 낮설음과 두려움보다는 내 마음이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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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노래하든 슈만의 이 연가곡은 마음속의 동경을 일깨워줍니다. 그리움과 갈망이 귀한 것은 살아 있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의 기쁨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봄은 그런 때 여야 합니다.

영화를 다 본 후, 저 나름대로 ‘내 안에 나의 숲, 나의 정원을간직하자‘라고 영화의 메시지를 정리해보았습니다. 귀농은이 메시지를 위한 상징일지도 모릅니다. 살다가 지쳐 쓰러지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를 때, 다시 생명력을 회복할 수있는 곳을 우리는 나름대로 틈틈이 가꾸고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 때 찾아갈 수 있는 나만의 치유 공간은 곧 행복의 비밀이지 않을까요. 그 공간에 따스한 사람의 온기까지더해진다면 더욱 좋겠지요.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를 보며 잔잔한 음악이 참 좋다 싶었습니다. 엔딩곡인 융진의 〈걷는 마음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와 함께 개인적으로 떠오른 음악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재즈 피아니스트 티에리 랑의 너무나 아름답고 명상적인 곡 나의 정원Private garden)입니다.

왜 사람들은 행복한 시간에 굳이 상실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것일까요? 행복한 순간이 흘러가야 다른 행복한 순간이 오는것이 이치인데, 그걸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쓸쓸한 마음에 이렇게 자문하다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세속현자‘인 코헬켓의 권고를 곰곰 새겨봅니다.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코헬 7, 14)좋은 것을 그늘진 마음 없이 즐기기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좋은 것을 누리면서도 기뻐할 줄 모르거나, 행복한순간에도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앞서곤 하지요.
그래도 애를 써야 합니다. 인생에는 좋았던 순간에 집착하며사라지는 것을 미리 두려워하고 서글퍼하는 것과는 다른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배워야 합니다.

곧이어 그녀는 절망적으로 묻습니다.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인간이 있을까요? 매 순간마다요?" 이런 그녀의질문에 작가의 분신이라 할 ‘무대감독‘은 대답합니다. "없죠.
성인들이나 시인들이라면 아마…."
죽음의 문 앞에서 우리의 삶은 일회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더없는 무게를 얻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우리 삶의 모든존재를 담게 됩니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명상은 우리가생생하게 살아 있는 지금의 삶을 살게 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죽음으로 단절되는 유한한 삶에서 슬픔과 허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삶의 빛나는 조각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살아 있는 희망이지요.

하나 여행은 이렇게 달콤쌉씨름한 탐미적인 항유만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는 불편함과 한계들 속에서 많은 것을 새롭게 깨닫는 배움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실뱀테송은 지리학을 전공한 후 여행자로서의 삶을 살고, 그 깨달음을 글로 전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를 사랑하는독자가 적지 않지요. 그는 자신의 에세이 『여행의 기쁨』에서여행과 유랑에서 단련되는 몸과 정신, 확장되는 시선에 대해인상적인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고되게 걷는 여행과 유랑이 사물들의 본모습을 보여준다고 믿었습니다. 다음의 글에서 말하듯이 말입니다.
내가 신발 밑창만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통을즐기는 취향 때문이 아니라, 느림이 속도에 가려진 사물들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차나 자동차의유리창 뒤로 풍경을 흘려보내면서 풍경의 베일을 벗길 수는 없다.

. 『불안의 책』의 시작은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을 믿었듯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에 태어났다. (…) 그러니 나처럼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얼마 안 되는이들에게서 단념이라는 삶의 방식과 숙명이 된 관조를 빼고 나면 무엇이 남겠는가? 종교적인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알 능력도 없다.
페소아의 시적, 철학적 탐구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가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떠남‘에서 시작됩니다. 파스칼 메르시에의 소설 『리스본행야간열차』에서 페소아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모든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내가 아니기 m문이다. 내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모든 불가능하것들 중에서 가장 불가능하게 여겨지므로 날마다 열망하는 것이고, 슬픈 순간마다 체념하는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을 때 저는 독일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있었습니다. 그 어느 여름의 시작에 혼자 이국의 영화관에서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나의 리스본은 어디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구나 여름에 여행을 꿈꾸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로의 여행,
일상의 참 의미를 찾는 여정이 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일상과 애써 ‘낯설어 지고 지금까지 욕망하고 바라던 것이 정말 의미 있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절박하다는 것을 적어도 우리의 무의식이 알고, 신호를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를 보고 생각에 잠겼던 그때가 기억납니다.
‘이제 메르시에도, 페소아도 낯선 이름들이 아닙니다만, 때때로나의 인생이 나 자신에게 낯설어야 한다는 그 여름의 깨달음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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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사람들이 보여주는 벌거벗은 미움을 종종 대면하게 됩니다.
선과 아름다움과 거룩함 앞에서 미움으로 응대하는 것, 이를조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처지입니다.
불행히도 이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며, 때로는 우리 역시 그렇게 악에 희롱당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험에도 불구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미움을 이겨내는 것, 그것은 오직 선한 마음, 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환자나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맡에 언제고 미리엘 씨(주교)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이 자기의 가장큰 의무이자 가장 큰 직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과부나 고아의 집에서는 일부러 청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자진해서 가주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자나 아들을 잃은 어머니 곁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침묵을 지켜야 할 때를 알고 있듯이 말을 해야 할 때를 알고있었다. 오, 오, 참으로 훌륭한 위안자였다! 그는 잊음으로써 고통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희망으로써 그것을 키우고 숭고하게 하려고 했다.

신비는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며,우리는 진리 안에서 사랑할 때 비로소 신비와 만나게 됩니다. 시몬 베유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범하게통찰합니다.

진리는 실재의 번득임이다. 사랑의 대상은 진리가 아니라실재이다. 진리를 욕망한다는 것은 실재와의 직접적 접촉을 욕망하는 것이다. 실재와의 직접적 접촉을 욕망하는것이 사랑이다. 진리를 욕망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진리속에서 사랑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의진리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사랑을 논하기보다는 사랑 속에 존재하는 진리의 정신을 논하는 편이낫겠다. 진정하고 순수한 사랑은 항상 그 무엇보다 온전히 진리 안에 거하기를 바란다.

미쓰하라 유리의「하얀 길」이라는 짧은 시 한 편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이제 겨울을 보내려합니다.

오랫동안 헤매이다 마침내 바른길 찾아오면 / 길은 아무말 하지 않아 칭찬도 나무람도 / 짐 될까 저어 돌아왔니한마디조차 / 다만 지금부터 걸어갈 길 오롯이 하얗게 가리킬 뿐 / 걸어온 길보담 / 지금부터 걸어갈 길이 / 늘 중요하니까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모차르트가 1787년 4월 4일 빈에서 보낸 편지에서 그의 신앙과죽음관이 감동적으로 표현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언제나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죽음 말이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은 우리 인생의 참된 최종 목적지예요. 그래서저는 지난 몇 년 이래로 이 인간에게 진실된 최고의 친구와 서로 잘 사귀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의 모습은 더이상 저에게는 겁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평화를 주고 위로를 준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그분이 이 행복을 저에게 부여하시고, 친구인 죽음이 우리의 진정한 복락을 위한 열쇠임을 배우게 하셨으니까요. 저는 사실 날마다 아마도 다시는 내일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적이 거의 없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때문에 그 누구도 나를 우울하거나 슬픔에 젖은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러한 영적인 행복에 대해 저는 매일매일창조주이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또한 진심으로 나의모든 벗에게도 이러한 행복을 기원한답니다.
모차르트가 죽음을 벗으로 대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에초연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음악은 〈레퀴엠)보다도 오히려 〈클라리넷 협주곡>입니다. 두 번째 악장이 영화 〈아웃오브 아프리카)에 삽입되어 대중에게 친숙해진 이 곡은 모차르트가 죽기 얼마 전에 작곡한 곡이기도 합니다. 이 곡을 듣다 보면 죽음을 벗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전해주는 위안이 얼마나 깊고 따뜻한지 알게 됩니다. 삶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염세적인 태도라기보다 쓸쓸함 속에서도 기쁨을 머금을수 있는 관대함에 가깝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음울하게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벗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지요.

현대 가톨릭 신학을 대표하는 스위스의 신학자 한스꿩 신부는 『음악과 종교』라는 책에서 음악과 신학의 관계를논하며, 이 곡이 자신의 젊은 시절에 선사한 기쁨과 위안에대해서 인상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정확히 두 달 전에 완성한 〈클라리넷 협주곡 KV 622),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강렬하고내면으로 들어가는 그의 마지막 관현악곡, 음울함과 절망감이 전혀 없는 이 협주곡이 35년 전 박사 과정에 있던 신학도에게 레코드판 열두어 장밖에 없는 파리의 다락방에서거의 날마다 새로운 기쁨과 힘과 위안을 주었다는 것, 요컨대 한 조각 작은 행복을 전해주었다는 것을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한다. 여러분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는누구나 한 번쯤 이런 작은 ‘행복‘의 순간을 느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의 2악장을 듣습니다.
봄에 움튼 생명이 영글어 피조물의 찬가로 터져 나오는 그신비로운 순간에 초대받은 느낌입니다. 모차르트 음악이 머금은 생기와 우아함에 물들어갑니다. 생명의 신비를 느끼는사람은 삶의 기쁨도 아는 법입니다. 그런 모차르트의 음악은삶의 기쁨에 바로 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때로는 이러한 찬란함이 어느 순간 마음을 아리게 해서, 화창한ㄷ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돕니다. 슬픔을 머금은 기날인데도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쁘이라 불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이런 인생의 신비를 담고있나 봅니다. 생명은 아픔, 슬픔, 상실, 이별을 품고 있다는것을 모차르트의 음악은 알려줍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가운데 예기치 않게 기쁨이 찾아오고, 즐거움의 교차로에서 애잔함과 맞닥뜨리곤 한다는 것을, 인생이 그렇다는 것을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그냥 알게 됩니다.
개신교 신학에 있어 거장인 카를 바르트(1886~1968)는 모차르트를 사랑했고 그에 관한 통찰로 유명한 글도 남겼습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자주 향하는 ‘영원한 아이, 경쾌하고 행복한 음악, 하늘이 내린 천재성‘ 같은 말들을 본디 그 의미속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모차르트가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이었고, 평생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으며, 일찍부터 죽음이 자신의친구라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순과 분열을 알면서도 하느님의 좋으심을 끝없이 신뢰했기에, 그의 음악 속 ‘쾌활함‘의 본질은 그러한 분열에 항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의 음악에는 지루한 평원도 없으며, 또한 바닥 모를 골짜기도 없습니다. 그는 일을 적당히 해치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멋대로 지나치게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한계 지어진 대로 표현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그의 아름답고감동적인 음악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말을 할 수 있는 음악가를 나는 모차르트 외에는 아무도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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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노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세계는 신비로운 주발 같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지 못한다. 그것을 붙잡으려는 사람은 오히려 잃어버린다.
비밀스런 주발인 땅은 부서질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땅을 잔인하게 착취하고 마모시키면서 그를 통해 완전히 파괴하는 중이다.
땅을 보호하라는 명령, 곧 땅을 아름답게 대하라는 명령이 땅에서 나온다. 보호하다schonen‘ 라는 낱말은 어원으로보아 ‘아름다운 것dem Schönen‘이라는 말과 친척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호할 의무, 아니 명령을 내린다. 아름다운 것은 보호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이 옳다. 땅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의 절박한 과제이자 의무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 뛰어난 것이니 말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두 요소, 곧 스투디움 studium과 풍크툼 punctum을 구분한다. 스투디움이란 우리가 사진에서 읽어 낼 수 있는 정보들을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사진을 탐구할수 있다. 그에 반해 풍크툼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말 그대로 하자면 그것은 새겨진 것‘이라는 의미로, 라틴어 낱말pungere(새기다)‘에서 나온 것이다. 풍크툼은 관찰자의 마음을 꿰뚫고 흔들어놓는다.
내게 있어 《밝은 방의 풍크툼은 그의 유일한 애인인 어머니가 서 있는, 책에서 보여주지 않는 겨울정원[온실이라는의미도 있음]이다. 여기서 나는 겨울정원을 이중의 모습으로본다.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위한 상징적 장소, 형이상학적애도노래의 장소다. 밝은 방은 내 눈에는 꽃피는 정원, 겨울어둠 속의 밝은 빛, 죽음 한가운데의 생명, 오늘날의 죽은삶 한가운데서 다시 깨어나는 삶의 경축이다. 형이상학의빛 한 줄기가 검은 방chambre noir을 밝은 방chambre claire으로, 밝은 겨울정원으로 바꾼다.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시간을 다르게 느낀다. 시간이 훨씬 더 느리게 흐른다. 시간이 확장된 것이다.
다음 봄까지의 시간이 거의 영원처럼 느껴진다. 다음번 단풍은이루 말할 수 없이 멀리에 있다. 여름도 끝없이 길다. 겨울은 영원히 계속된다. 겨울정원에서의 노동이 겨울을 더 길게 만든다.정원사 노릇 첫해만큼 겨울이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나는 추위와 얼음서리로 몹시 고통을 겪었으나 나자신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겨울에 꽃피는 식물들, 눈과 얼음서리 한가운데서도 피어난 꽃들 때문이었다. 나의걱정, 나의 염려는 무엇보다도 꽃들을 향했다. 정원은 나를이기적 자아에서 한 발짝 더 멀리 떼어놓았다. 나는 자식이없다. 하지만 정원에서 다른 이를 위한 걱정, 염려라는 것이무슨 뜻인지 천천히 배우고 있다. 정원은 사랑의 장소였던것이다.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 가을크로커스와 봄크로커스는 모습은 비슷해도 시간감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식물이 매우 뚜렷한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 어쩌면 오늘날 어딘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 부족한 인간보다 심지어 더욱 시간의식을 갖는다는것이 놀랍다.

아도르노Adorno는 내가 슈베르트에게 품고 있는 정열에대해 철학적인 설명을 해준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슈베르트의 음악 앞에서는 영혼에 먼저 물어보지도 않고 눈에서눈물이 쏟아진다. 즉 우리는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로 운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행동주체인 자아를 무장해제시킨다. 자아를 뒤흔들어 성찰 이전 비슷한, 성찰 같은 눈물을흘리게 한다.

‘디지털‘은 프랑스 말로는 뉘메리크numérique이다. 즉,
숫자로 된 것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신비로움을 없애고 시詩를 없애고, 세상을 낭만적이지 않게 만든다. 세상에서 온갖 비밀, 온갖 낯섦을 없애고, 모든 것을 알려진 것, 진부한것, 친숙한 것, 내 마음에 드는 것,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모든 것은 동일하게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디지털화에 직면하여 세상을 다시 낭만화하고, 땅을, 땅의 시를 다시 찾아내고, 땅에 신비로움, 아름다움, 고귀함의 품격을 되찾아주어야 할 것이다.

구원이란 위험에서 구해낸다는 뜻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풀어주어 본래의 본질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땅을 구원한다는 것은 땅을 이용한다거나 땅을 위해애쓴다는 것 이상의 의미다. 땅의 구원은 땅을 지배하지않고, 땅을 예속하지 않는 일이다. 지배와 예속에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바로 무제한 착취다. 죽어야 할 인간은 하늘을 하늘로 맞아들이는 한에만 지구에 산다. 태양과 달과별들이 각기 제 길을 가도록 그대로 두고, 계절들이 각각의 축복과 재앙을 주도록 해야 한다. 밤을 낮으로 만들고,
낮을 헐레벌떡 쫓기는 불안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다.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전에 몰랐던, 강하게 몸으로 느끼는 특이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땅의 느낌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세계의 디지털화라는 행진을 하면서 땅을 떠났다. 생명을 살리고 행복하게하는 땅의 힘을 우리는 더는 느끼지 못한다. 그 힘은 모니터 크기로 줄어들고 만다. 노발리스에게 땅은 지복과 구원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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