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노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세계는 신비로운 주발 같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지 못한다. 그것을 붙잡으려는 사람은 오히려 잃어버린다. 비밀스런 주발인 땅은 부서질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땅을 잔인하게 착취하고 마모시키면서 그를 통해 완전히 파괴하는 중이다. 땅을 보호하라는 명령, 곧 땅을 아름답게 대하라는 명령이 땅에서 나온다. 보호하다schonen‘ 라는 낱말은 어원으로보아 ‘아름다운 것dem Schönen‘이라는 말과 친척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호할 의무, 아니 명령을 내린다. 아름다운 것은 보호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이 옳다. 땅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의 절박한 과제이자 의무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 뛰어난 것이니 말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두 요소, 곧 스투디움 studium과 풍크툼 punctum을 구분한다. 스투디움이란 우리가 사진에서 읽어 낼 수 있는 정보들을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사진을 탐구할수 있다. 그에 반해 풍크툼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말 그대로 하자면 그것은 새겨진 것‘이라는 의미로, 라틴어 낱말pungere(새기다)‘에서 나온 것이다. 풍크툼은 관찰자의 마음을 꿰뚫고 흔들어놓는다. 내게 있어 《밝은 방의 풍크툼은 그의 유일한 애인인 어머니가 서 있는, 책에서 보여주지 않는 겨울정원[온실이라는의미도 있음]이다. 여기서 나는 겨울정원을 이중의 모습으로본다.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위한 상징적 장소, 형이상학적애도노래의 장소다. 밝은 방은 내 눈에는 꽃피는 정원, 겨울어둠 속의 밝은 빛, 죽음 한가운데의 생명, 오늘날의 죽은삶 한가운데서 다시 깨어나는 삶의 경축이다. 형이상학의빛 한 줄기가 검은 방chambre noir을 밝은 방chambre claire으로, 밝은 겨울정원으로 바꾼다.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시간을 다르게 느낀다. 시간이 훨씬 더 느리게 흐른다. 시간이 확장된 것이다. 다음 봄까지의 시간이 거의 영원처럼 느껴진다. 다음번 단풍은이루 말할 수 없이 멀리에 있다. 여름도 끝없이 길다. 겨울은 영원히 계속된다. 겨울정원에서의 노동이 겨울을 더 길게 만든다.정원사 노릇 첫해만큼 겨울이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나는 추위와 얼음서리로 몹시 고통을 겪었으나 나자신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겨울에 꽃피는 식물들, 눈과 얼음서리 한가운데서도 피어난 꽃들 때문이었다. 나의걱정, 나의 염려는 무엇보다도 꽃들을 향했다. 정원은 나를이기적 자아에서 한 발짝 더 멀리 떼어놓았다. 나는 자식이없다. 하지만 정원에서 다른 이를 위한 걱정, 염려라는 것이무슨 뜻인지 천천히 배우고 있다. 정원은 사랑의 장소였던것이다.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 가을크로커스와 봄크로커스는 모습은 비슷해도 시간감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식물이 매우 뚜렷한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 어쩌면 오늘날 어딘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 부족한 인간보다 심지어 더욱 시간의식을 갖는다는것이 놀랍다.
아도르노Adorno는 내가 슈베르트에게 품고 있는 정열에대해 철학적인 설명을 해준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슈베르트의 음악 앞에서는 영혼에 먼저 물어보지도 않고 눈에서눈물이 쏟아진다. 즉 우리는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로 운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행동주체인 자아를 무장해제시킨다. 자아를 뒤흔들어 성찰 이전 비슷한, 성찰 같은 눈물을흘리게 한다.
‘디지털‘은 프랑스 말로는 뉘메리크numérique이다. 즉, 숫자로 된 것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신비로움을 없애고 시詩를 없애고, 세상을 낭만적이지 않게 만든다. 세상에서 온갖 비밀, 온갖 낯섦을 없애고, 모든 것을 알려진 것, 진부한것, 친숙한 것, 내 마음에 드는 것,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모든 것은 동일하게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디지털화에 직면하여 세상을 다시 낭만화하고, 땅을, 땅의 시를 다시 찾아내고, 땅에 신비로움, 아름다움, 고귀함의 품격을 되찾아주어야 할 것이다.
구원이란 위험에서 구해낸다는 뜻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풀어주어 본래의 본질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땅을 구원한다는 것은 땅을 이용한다거나 땅을 위해애쓴다는 것 이상의 의미다. 땅의 구원은 땅을 지배하지않고, 땅을 예속하지 않는 일이다. 지배와 예속에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바로 무제한 착취다. 죽어야 할 인간은 하늘을 하늘로 맞아들이는 한에만 지구에 산다. 태양과 달과별들이 각기 제 길을 가도록 그대로 두고, 계절들이 각각의 축복과 재앙을 주도록 해야 한다. 밤을 낮으로 만들고, 낮을 헐레벌떡 쫓기는 불안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다.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전에 몰랐던, 강하게 몸으로 느끼는 특이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땅의 느낌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세계의 디지털화라는 행진을 하면서 땅을 떠났다. 생명을 살리고 행복하게하는 땅의 힘을 우리는 더는 느끼지 못한다. 그 힘은 모니터 크기로 줄어들고 만다. 노발리스에게 땅은 지복과 구원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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