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사람들이 보여주는 벌거벗은 미움을 종종 대면하게 됩니다. 선과 아름다움과 거룩함 앞에서 미움으로 응대하는 것, 이를조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처지입니다. 불행히도 이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며, 때로는 우리 역시 그렇게 악에 희롱당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험에도 불구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미움을 이겨내는 것, 그것은 오직 선한 마음, 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환자나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맡에 언제고 미리엘 씨(주교)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이 자기의 가장큰 의무이자 가장 큰 직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과부나 고아의 집에서는 일부러 청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자진해서 가주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자나 아들을 잃은 어머니 곁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침묵을 지켜야 할 때를 알고 있듯이 말을 해야 할 때를 알고있었다. 오, 오, 참으로 훌륭한 위안자였다! 그는 잊음으로써 고통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희망으로써 그것을 키우고 숭고하게 하려고 했다.
신비는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며,우리는 진리 안에서 사랑할 때 비로소 신비와 만나게 됩니다. 시몬 베유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범하게통찰합니다.
진리는 실재의 번득임이다. 사랑의 대상은 진리가 아니라실재이다. 진리를 욕망한다는 것은 실재와의 직접적 접촉을 욕망하는 것이다. 실재와의 직접적 접촉을 욕망하는것이 사랑이다. 진리를 욕망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진리속에서 사랑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의진리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사랑을 논하기보다는 사랑 속에 존재하는 진리의 정신을 논하는 편이낫겠다. 진정하고 순수한 사랑은 항상 그 무엇보다 온전히 진리 안에 거하기를 바란다.
미쓰하라 유리의「하얀 길」이라는 짧은 시 한 편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이제 겨울을 보내려합니다.
오랫동안 헤매이다 마침내 바른길 찾아오면 / 길은 아무말 하지 않아 칭찬도 나무람도 / 짐 될까 저어 돌아왔니한마디조차 / 다만 지금부터 걸어갈 길 오롯이 하얗게 가리킬 뿐 / 걸어온 길보담 / 지금부터 걸어갈 길이 / 늘 중요하니까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모차르트가 1787년 4월 4일 빈에서 보낸 편지에서 그의 신앙과죽음관이 감동적으로 표현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언제나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죽음 말이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은 우리 인생의 참된 최종 목적지예요. 그래서저는 지난 몇 년 이래로 이 인간에게 진실된 최고의 친구와 서로 잘 사귀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의 모습은 더이상 저에게는 겁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평화를 주고 위로를 준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그분이 이 행복을 저에게 부여하시고, 친구인 죽음이 우리의 진정한 복락을 위한 열쇠임을 배우게 하셨으니까요. 저는 사실 날마다 아마도 다시는 내일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적이 거의 없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때문에 그 누구도 나를 우울하거나 슬픔에 젖은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러한 영적인 행복에 대해 저는 매일매일창조주이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또한 진심으로 나의모든 벗에게도 이러한 행복을 기원한답니다. 모차르트가 죽음을 벗으로 대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에초연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음악은 〈레퀴엠)보다도 오히려 〈클라리넷 협주곡>입니다. 두 번째 악장이 영화 〈아웃오브 아프리카)에 삽입되어 대중에게 친숙해진 이 곡은 모차르트가 죽기 얼마 전에 작곡한 곡이기도 합니다. 이 곡을 듣다 보면 죽음을 벗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전해주는 위안이 얼마나 깊고 따뜻한지 알게 됩니다. 삶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염세적인 태도라기보다 쓸쓸함 속에서도 기쁨을 머금을수 있는 관대함에 가깝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음울하게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벗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지요.
현대 가톨릭 신학을 대표하는 스위스의 신학자 한스꿩 신부는 『음악과 종교』라는 책에서 음악과 신학의 관계를논하며, 이 곡이 자신의 젊은 시절에 선사한 기쁨과 위안에대해서 인상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정확히 두 달 전에 완성한 〈클라리넷 협주곡 KV 622),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강렬하고내면으로 들어가는 그의 마지막 관현악곡, 음울함과 절망감이 전혀 없는 이 협주곡이 35년 전 박사 과정에 있던 신학도에게 레코드판 열두어 장밖에 없는 파리의 다락방에서거의 날마다 새로운 기쁨과 힘과 위안을 주었다는 것, 요컨대 한 조각 작은 행복을 전해주었다는 것을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한다. 여러분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는누구나 한 번쯤 이런 작은 ‘행복‘의 순간을 느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의 2악장을 듣습니다. 봄에 움튼 생명이 영글어 피조물의 찬가로 터져 나오는 그신비로운 순간에 초대받은 느낌입니다. 모차르트 음악이 머금은 생기와 우아함에 물들어갑니다. 생명의 신비를 느끼는사람은 삶의 기쁨도 아는 법입니다. 그런 모차르트의 음악은삶의 기쁨에 바로 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때로는 이러한 찬란함이 어느 순간 마음을 아리게 해서, 화창한ㄷ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돕니다. 슬픔을 머금은 기날인데도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쁘이라 불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이런 인생의 신비를 담고있나 봅니다. 생명은 아픔, 슬픔, 상실, 이별을 품고 있다는것을 모차르트의 음악은 알려줍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가운데 예기치 않게 기쁨이 찾아오고, 즐거움의 교차로에서 애잔함과 맞닥뜨리곤 한다는 것을, 인생이 그렇다는 것을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그냥 알게 됩니다. 개신교 신학에 있어 거장인 카를 바르트(1886~1968)는 모차르트를 사랑했고 그에 관한 통찰로 유명한 글도 남겼습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자주 향하는 ‘영원한 아이, 경쾌하고 행복한 음악, 하늘이 내린 천재성‘ 같은 말들을 본디 그 의미속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모차르트가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이었고, 평생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으며, 일찍부터 죽음이 자신의친구라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순과 분열을 알면서도 하느님의 좋으심을 끝없이 신뢰했기에, 그의 음악 속 ‘쾌활함‘의 본질은 그러한 분열에 항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의 음악에는 지루한 평원도 없으며, 또한 바닥 모를 골짜기도 없습니다. 그는 일을 적당히 해치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멋대로 지나치게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한계 지어진 대로 표현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그의 아름답고감동적인 음악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말을 할 수 있는 음악가를 나는 모차르트 외에는 아무도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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