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시위‘라는 것은 본래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를 뜻하는 영어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이라는 말 자체가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인데, 자신을 감추는 시위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실 시위의 부정, 즉 반시위입니다. 이러한 반시위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두려움입니다. 한국인들은 정치의 광장에서는 부당한 국가 권력에 맞서 자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지만, 일상의 공간에서는 공개적으로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정치의 민주화는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일상의 민주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얘깁니다.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약자와 공감하고 연대하며, 불의에 분노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태도 - 이러한 심성을 내면화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지 못하는 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독재의 야만으로 추락할 수 있다. 이것이광장의 촛불이 내 마음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타올라야 하는 이유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에 들어온 연합군은 나치 체제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고민에 빠집니다. 과연 기업 영역에선 어떻게 나치즘을 청산해야 할까? 이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치가 기업 전체를 완전히 장악해서 삽시간에 전쟁 기업으로 전환시킬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권력이 너무나 약했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치즘과 같은 재앙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기업 내부에서 노동자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결국 나치즘의 역사가노사공동결정제의 탄생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된 셈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때론 참으로 역설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노사공동결정제는 1961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모든 기업에 이 제도가 적용된 것은 아닙니다. 몬탄(Montan)이라고 불리는 석탄과 철강 관련 기업들이 먼저 노사공동결정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사회에 노동자가 50퍼센트를 차지하면서, 오히려 회사가 더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노사간에 서로 갈등도 없고 협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생산성도 높아진 것이지요....
여기서 정말 놀라운 것볼프강 미슈니크(Wolfgang Mischnick)는 1976년에결정제 법안을 대표 발의한 인물입니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것은 미슈니크가 자유민주당(FDP)의 원내 대표였다는 사실입니다.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는 일은 통상 사회민주당이라든가 노동당 같은 정당에서 떠맡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유민주당은 가장 강력하게 자유시장경제를 주장하고 기업가의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인데, 그런 정당의 원내 대표가 이 법안을대표 발의한 것입니다. 이 자체가 너무도 놀라운 사건입니다. 저는 미슈니크가 당시에 법안을 발의하면서 한 연설을 보고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울컥했습니다. "우리 시민들은 국가 시민(Staatsburger)으로서는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주권을가진 존재이다. 그러나 경제 시민(Wirtschaftsbürger)으로서는 노예로 산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유민주당의 원내 대표가 이렇게 노동자의 ‘존엄성을 역설했고, 그에 이어 표결에 들어갔습니다. 389 대 22. 압도적인 다수로 법안은 통과되었습니다. 이렇게 세계 최초로 노동자가 이사회의 50퍼센트를 차지하도록 보장하는 법안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사실 많은 교수들이 저항도 했습니다. 그러나 68세대의 대다수 젊은 교수들은 이제야말로 대학도 새로운 문화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다니던 브레멘 대학에서도 교수와 학생은 서로 이름을 불렀습니다. 또한 많은 교수들이 "나는여러분과 함께 연구하는 사람으로서(ich als Mitstudierender)"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는데, 저는 교수들이 스스로 학생과 동격으로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 혹은 학생들을 자신과 동격의 연구자로 대우하는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느꼈습니다. 교수들이 자신을 학생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진리의 독점자가 아니라 학생과같이 연구하는 학문의 동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문화 민주화에 대한 하나의 사례입니다. 사실 충격적인 일이지요. 거창한 존칭과 수식어를 걷어내고 이름만을 부르는 순간 사람들의 관계에는 엄청난 변화가 시작됩니다. 문화라는 건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들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 민주화란 바로 이 관계들의 민주적 변화를 뜻하는 것이지요. 남성과 여성,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이런 관계들이 수평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68혁명을 통해서 이런 문화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우리에게는 아직도 요원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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