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자라난다는 것은 어린 소년이 이미 커버렸다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고, 또 겨울이 가버렸다는 것만큼이나 서글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제 말을 오해하셔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고독, 크고도 내밀한 고독뿐인 것입니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기, 그리고 한동안 누구와도 만나지 않기 이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능력입니다. 어린 시절의 당신이 그러했듯 한껏 고독해지시기 바랍니다. 아이의 눈에는 중요하고 대단하게 비칠 만한 여러 가지 일들에 어른들이 몰두하고 있을 때, 겉보기에는 그토록바쁘게 보이면서도 정작 자신들도 그게 정확히 무엇인가를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들에 어른들이 매진하고 있는 동안, 남겨진 아이가 느껴야 했을 바로 그 고독감 안으로 다시 한 번 뛰어드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사유하는 운명, 우리가 알 수 있는 운명…… 그렇습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것들을 통해 강해지거나 확신을 얻으려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결국 바깥으로부터 우리를 들여다보는, 우리를 꿰뚫어 보는, 우리를 더는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운명 인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른바 "눈먼 운명"에 매여 있다는 것,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시선에, 혹은 우리의 순수한 바라봄에 꼭 필요한 조건이됩니다. 우리의 운명이 "눈먼" 상태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는 이 세계가 자아내는 저 놀라운 먹먹함을, 다시 말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우리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과 한층 내밀한 관계를 맺으며….

모든 생성하는 존재들에는 저마다의 법칙이 존재한다는그런 사실을 되새겨 보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법칙들은 결코 뒤늦게 발현되는 법이 없으며, 우리가 가볍게 지나쳤던 작은 돌멩이나 깃털들에서조차도 스스로를 증명하고 지켜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있을 것입니다. 모든 혼란스러움이나 잘못들은, 결국 우리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저 법칙을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비롯되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아울러 그 해결은 우리가 사건들의 사슬 안에 파고들어, 그 기울어진 균형을 우리의 의지로써 되돌리고자 하는 집중과 진력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사 삶의 의미가 일순간 스쳐 가는 아름다움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해도(뭐가 더 있긴 한지 의문스럽지만요), 그걸로 족합니다. 빗물 속에서 첨벙대거나 바람과 싸우며 나아가는 시간, 햇빛을 받으며 눈길을산책하는 시간, 어둠 속으로 스러져 가는 저녁노을을 지켜보는 시간만으로도 삶을 사랑할 이유는 차고넘칩니다. 죽음더러 와 보라고 하세요. 그동안에 나는 사우스다코타의 자줏빛 언덕을, 저녁 하늘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반짝이는 별빛을 보았으니까요.

내가 본 바에 따르면 총체의 일부로 서로 협조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차장에서 친구들과 공놀이나 하며 빈둥대는소위 ‘촌뜨기‘들이 외톨이 사상가들보다는 훨씬 행복하지요.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한 발 물러난 채 고립 속에서 퇴화해 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지요. "총체가 되거나 총체에 참여하라"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단순히 이론적인 차원을 넘어서) 집단의 일부로 여긴다면 우리의 삶은 한층 충만해지고 어쩌면 더욱더 의미심장해질 겁니다.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자아보다 더 크고 수명보다 오래가는 목적을 가져야합니다.

모건타운에서 피츠버그까지 가는 이 기차 안에는 함박웃음을 띠고 자기 아이와 놀아 주는 여자가 있습니다. 아, 도시의 불행한 지성인들이여! 당신네가 저여성보다 심오하다고 생각합니까? 총체의 일부에지나지 않으면서 다른 일부를 이해해 보겠다고 헛되이 애쓰는 소피스트 과학자여, 저 여성이 당신보다.
더욱 위대한 철학자라는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그는 부분으로서의 자신을 잊고 총체 속에서 자신의자리를 찾아낸 것입니다.

나로 말하자면 -다른 여러 사람에게 제시했던 질문에나 역시도 직접 대답해 보고 싶거든요- 삶의 의미를 내 가족과 내 저술이라는 다소 협소한 범위에서 찾는 듯합니다. 더욱 거창한 대의에 공헌한다고 자랑할 수있다면 좋겠지만 말이지요. 내 활력은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적 이타주의에서 비롯됩니다. 갈채를 받고싶은 욕망, 내게 의존하는 사람들을 위한 열성적 헌신이지요

내 노력의 목적과 원동력은 무엇이냐고요?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궁극적으로는 나보다 뛰어난 이들에게 인정받는 것입니다. 내 행복의 근거는? 내 집과 책들, 내 잉크와 펜이지요. 나 자신이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처럼 주변에가난과 고통이 활개 치는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충분히 행복할 수 없지요. 하지만 나는 적어도 삶에 만족하며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게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이 세상 모든 것입니다.
인간은 최대한 많은 쇠를 달구어 두어야 하거든요.
행복을 온전히 한 가지 근거에 내 아이들, 명성, 인기, 심지어 건강에도- 의지해서는 절대 안 되며, 반면 그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충분한 만족감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지요. 설사 다른 모든 근거를 잃는다 해도 말입니다. 아마도 나의 궁극적 가치는 자연이라고 말해야겠군요. 내게 주어진 다른 모든 재능과 물질이사라진다고 해도 들판과 하늘만 있다면 나는 계속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적어도 그러길바라니까요). 만약 시력마저 잃게 된다면 나는 감미로운 소리의 집합에서 혹은 행복했던 어느 하루에 대한 시인의 회상에서 살아갈 용기를 구하겠지요

그러나 예전의 신앙이 나를 떠나갔고 이젠 어떤 정신적 위로도 주지 않는다 해도,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그 추억의 향기가 남아 있습니다. 꽃을 치운 후에도 그 잔향이 한동안 방 안에 떠돌듯이 말이지요. 이처럼 옛 신앙의 여운이 남아 있기에 나는 우리 세대의 대부분을 만족시켰던 조야한 기계론을 받아들이지못하고, 지금도 여전히 중세의 신앙에서 상징적 깊이를 발견하며 기뻐합니다. 어쩌면 계속 내 마음속에서 아우성치던 신앙이 종국에는 나의 회의를 깨뜨릴지도 모르고, 그러면 나는 위스망스와 체스터턴이갔던 길을 따르게 되겠지요. 내가 늙은 뒤에 쓴 글을읽을 때면 독자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겁니다.
지금 내게 불멸의 의미는 우리 모두가 총체의 일부, 생명이라는 몸을 이루는 세포라는 점입니다. 일부의죽음이 총체에 새로운 생명을 주며, 개체로서의 우리가 사라진다 해도 총체는 우리의 존재와 기여로 영구적 변화를 겪는 것이지요. 내게 신이란 제1원인*혹은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게 만드는 모든 생명과 동력의 원천입니다. 또한 목적인 **이고 우리분투와 열망의 목표이자 실현이며, 현존하지 않지만언젠가는 존재할지 모를 아득한 완벽성이기도 하지요. 어쩌면 완전한 일체,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이들이 헌신했던 그 존재가 미래의 종교에서는 신이라 불릴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 모든 조언이 얼마나 헛되고 속물적인 것인지나 역시 잘 압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한다.
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요. 하지만 오셔서나와 한 시간만 함께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숲으로 난 오솔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가진책 속의 모든 논쟁보다도 그쪽이 당신을 만류하는 데더욱 효과적일 테니까요. 오셔서 내가 얼마나 어수룩한 낙관주의자인지 말해 주십시오. 내 논리를 실컷 공격하고 이 중간계를 마음껏 저주하십시오. 나는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겠습니다(당신의결론만 제외하고요). 그러고 나면 우리 함께 평화의빵을 나누어 먹읍시다.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 속에 우리의 젊음을 되살리면서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나 롬브로소의 답장

편지는 감사히 받아 보았습니다. 당신이 제시한 문제는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고민해 온 것들입니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은 사랑이야말로 존재의 진정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서로 묶어 줍니다. 마치 삶이 우리에게서 떠나간 자들과 우리 후손들을 묶어 주듯이 말이지요. 어린 시절 내 삶이 우리 아버지의 삶과 풀 수 없을 만큼 단단히 묶여 있다고 느꼈던 게 생생히 기억납니다. 나는 오직 아버지를 돕기 위해 태어난 거라고, 그분이 돌아가시면 나도 함께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나는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내 남편과 아이들에게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요, 삶의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입니다. 그중에도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수월하지요.

어느 봄날이었지요
따스한 햇볕과 산들 바람이 학생들을 유혹해 수업에서 끌어내리려는듯한 날씨였어요. 산타야나는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었습니다. 수강생들은 앉거나 느슨히 기대어 있었지만 하나같이 무관심한 태도였지요. 산타야나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습니다. 그의 눈이 학생들을 죽 훑다가 마침내창밖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한 그루에 멈추었지요.
나뭇잎은 작고 부드러우며 새로 난 잎답게 파릇파릇했습니다. 산타야나는 책을 덮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요. 그리고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생 여러분, 봄입니다!" 그렇게 모자를 쓰고 나가서는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길 바랍니다. 떠나간 그가자신만의 외골수 여정에 올라서 이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길 바랍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만의 불안 속에서 뭔가를,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규명해 줄그 무엇을 찾고 있겠지요. 그러한 탐색에 수반되는부단한 활동에서 자신만의 기쁨을 얻겠지요 (아마도요).

오언 C. 미들턴(뉴욕 싱싱교도소 종신형 죄수 79206번)의답장(1931. 6. 20)

어느 유명 작가이자 철학자가 해묵은 질문에 대한답을 구한다고 하더군요. 인생의 의미 혹은 가치는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이지요. 그 사람만큼이나 유명한 어느 출판사에서는 나에게 현재의 상태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물어 왔고요.
철학자에게 내가, 즉 종신형을 받고 감방 벽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나에게 인생의 의미란 거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나 자신의능력, 교훈을 배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그 능력 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한마디로 인생의 가치란 딱 그것을 쟁취하고활용하려는 나의 의지만큼인 것이지요.
출판사에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삶이란, 심지어감방 안에서도 바깥에 있는 사람의 삶만큼이나 흥미로우며 가치로울 수 있다고요. 그 자신의 인생철학이 건전하다고 믿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내 인생철학은 투박하며 진실만을 길잡이 삼는 단순한 믿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루소가 걸을기회를 놓치는 법은 없었다. "그 정도로 사색하고 그 정도로 존재하고 그정도로 경험하고 그 정도로 나다워지는 때는 혼자서 걸어서 여행할 때밖에 없었던 것 같다. 두 발로 걷는 일은 내 머리에 활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할까, 몸 이 움직여야 마음도 움직인다고 할까. 시골 풍경, 계속 이어지는 기분 좋은 전망, 신선한 공기, 왕성한 식욕, 걷는 덕에 좋아지는 건강, 선술집의 허물없는 분위기, 내 예속된 상태와 열악한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들의부재. 바로 이런 모든 것이 내 영혼을 속박에서 풀어주고, 사유에 더 많은용기를 불어넣어주고, 나를 존재들의 광활한 바다에 빠지게 해준다. 그덕분에 나는 그 존재들을 아무 불편함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껏 결합하고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루소가 그려 보이는 보행은 물론 이상적인 보행, 즉 건강한 사람이 쾌적하고 안전한 길에서 자발적으로선택한 보행이다. 나중에 루소의 무수한 상속자들이 행복, 자연과의 조화, 자유, 미덕의 표현이라고 여기게 되는 보행도 바로 이런 보행이다.

걷는 경험 속에서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사유가 된다. 자신으로부터도피하기란 불가능하다. 43 순례길에 나선다는 것은 가족 관계, 애착 관계, 지위, 의무와 같은자신의 복잡한 세속적 자리를 뒤로하고 일개 순례자로서 걸어간다는 뜻 이다. 순례자들 사이에는 서열이 없다. 은총과 헌신의 서열이 있을 뿐이다. 터너 부부는 순례를 경계선 상태(timinality)라 말한다. 과거 정체성과 미래 정체성 사이의 경계선에 놓인 상태, 따라서 기성 질서 밖에 있는 상태이자 가능성의 상태이다. 경계선 상태가 문턱을 뜻하는 라틴어 limin에서 온 단어라고 할 때, 순례자는 상징적 의미로 보나 물리적 의미로 보나 그런 문턱을 넘어가 있다. "문턱을 넘어간 사람(liminar)은 지위와 권위를 빼앗긴 사람, 권력에 의해서 인정되고 유지되는 사회구조에서 쫓겨난사람, 수련과 고행을 통해서 밑바닥 층으로 낮아진 사람이다. 그러나 성스러운 힘이 세속적 힘없음을 보상해준다. 성스러운 힘이란 약자들의 힘으로서, 구조적 권력이 사라지고 본성이 부활함으로써 생겨나기도 하고성스러운 인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나기도 한다. 이 힘이 사회구조에속박돼 있던 많은 것들, 특히 동지애와 공동체 감각을 해방한다.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
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신을 닮기란 불가능하지만, 신이 걸어간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일은 가능하다. 예수가 인류의 실족(Fall)을 대속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 발을 헛디디고 진땀을 흘리고 상처입고 세 번 넘어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14처에서다. 하지만 이 14처가 어느 성당에서나, 아니, 아무 데서나 볼 수있는 일련의 그림이 되면서, 신도들이 따라가는 것은 이제 수난의 장소가 아니라 수난 이야기가 되었다. 성당에 그려진 14처는 신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는 통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속으로들어가는 통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째서 삶의 의미를 삶 그 자체가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 합니까?" 그가 물었다. "우리의 전설이 말하는왕이 실제로 존재하느냐고요? 나도 모르지만, 그건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지구의 반사광 아래로 달의 산들이 아름답게빛난다는 사실입니다.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왕을보거나 들을 수 없었으니 나 역시 그의 실제성을 의심할 만하지요. 하지만 나는 삶을, 순간의 아름다움을, 행동하는 기쁨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소피스트들은 인생이라는 별의 궤도에서는 찰나에불과하며 패배와 죽음 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나는 승리와 삶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관해 무엇을 압니까? 영혼이 불멸한다면 우리는 죽지 않을 것이고, 영혼이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영원한 존재인 것처럼 살아가십시오. 지구가 텅 비어 버렸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서여러분의 삶이 바뀌었다고는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지구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 안에 살고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