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서운 게 경험이다. 하기 전까지는 막연히 두렵고던 것이 해보고 나니 그 속에 있는 장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해보니 괜찮은 점이 있다는 걸 느끼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코로나19로 어쩔 수 없이 직장을 한시적으로 폐쇄하고 재택근무와 원격근무를 시도했던 기업들이 이후에도 이 방식을 계속 적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2015년 메르스 때도 재택근무를 시도해본 국내 기업들이 있었지만 잠시였을 뿐이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 때는 달랐다. 임시적 조처가 아니라,이를 계기로 업무 방식의 전환을 모색하는 기업이 늘었기 때문이다. 마침한국의 대기업들이 2019년부터 조직 문화 혁신, 성과 위주 승진, 수평화,애자일 agile을 더욱 적극 받아들이며 한국식 위계구조 중심의 조직 문화에서 탈피하려고 강력하게 혁신하던 중이었다. 그동안 재택·원격근무확산되지 못한 것이 한국식 조직 문화가 가진 문화적 장벽 때문이었다.
의도치 않게 코로나19가 기업에게 혁신의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

이렇게 100년여 동안 사무실 공간은 눈에 띄는 변화를 겪어왔다. 이건단지 공간의 변화만이 아니라 산업 구조와 조직 문화의 변화, 일하는 방식과 사회의 변화 얘기다. 20세기 컨택트 기반의 일하는 방식이 21세기언컨택트 기반의 일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도 이런 변화에 따른 것이다. 재택·원격근무는 결국 진화의 산물이다. 기업이 더 높은 생산성과효율성을 얻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지, 굳이 사무실 나오지 않고서도 일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하는 게 결코 아니다. 언컨택트는 수단이지목적이 아니다.

물리적으론 비대면, 비접촉이지만 네트워크 연결에선 과잉여결에선 과잉 대면, 과잉서 시간 관리와 커뮤니케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원격근무를 위해선 시간 관리와 기이션 관리가 중요하다. 경계를 확보하기 위해 업무시간 외에는 직장과 이부러 연결을 끊는 직원들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원격근무를 위한 법은 아니지만, 프랑스는 2017년 1월 1일부터 연결되지 않을 권리 right to disconnect‘를 발효시켰다. 말 그대로 퇴근 시간 이후에는 회사와 상사로부터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는다.
2013년 독일 노동부는 업무시간 이후엔 비상시가 아니면 상사가 직원에게 전화나 이메일로 연락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침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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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contact는 비접촉, 비대면, 즉 사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거나 접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에겐 사람과의 연결과 접촉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언컨택트다. 언컨택트는 불안하고 편리한시대에 우리가 가진 욕망이자, 미래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메가 트렌드다.
언컨택트는 우리의 소비 방식만 바꾸는 게 아니라 유통 산업을 비롯, 기업들의 일하는 방식도, 종교와 정치, 연애도, 우리의 의식주와 사회적 관계, 공동체까지도 바꾸고 있다. 우린 지금 언컨택트의 시대를 맞이했다.
단어가 주는 첫인상 때문에 오해하면 안 된다. 언컨택트는 서로 단절되어 고립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연결되기 위해서 선택된 트렌드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불안과 위험의 시대, 우린 더 편리하고 안전한 컨택트를 위해 언컨택트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사람에게 사람이 필요없어지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가진 연결과 접촉의 방식이바뀌는 것일 뿐, 우린 앞으로도 계속 사람끼리 연결되고 함께 살고 일하는 서로가 필요한 사회적 동물이다

컨텍트 시대의 종교는 지도자의 권위를 중심으로 강화된다. 예배나 설교를위한 공간은 좌석 배치만 봐도 리더를 중심으로 일방향으로 되어있다. 수평적 관계가 아닌 수직적 관계로 일방적 권위가 만들어지기 쉬은 구조인 것이다. 하지만 언컨택트 시대의 종교에선 상호적 관계, 수평적 관계가 중요해질 수 있다. 일방적 권위가 아니라 신뢰에 따른 존중이더 중요해진다는 말이다. 기존 종교의 방식에선 이것이 분명 단점이 될수 있다. 하지만 넘어서야 할 숙제다. 당장은 아니지만 가야 할 방향임은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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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몽테뉴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던 질문,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완하는 아주 중요한 주제다. 앞의 주체(knower)가 인간인 경우에는 이 질문이 특히 중요하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단어,
수학적 개념, 추론을 덧붙이고, 감각의 산물에 논리적 연역을 가하는 존재는 호모 사피엔스뿐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개념이 사실은 각각 진리의 한 측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 이둘은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각자 사실들을 표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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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애도(사별의 슬픔을 극복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종교관보다 지금까지 살면서 인생을 얼마나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겨왔는지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하이테크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뭔가를 통제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연습이다. 그리고 바로 죽음은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절대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한다. 죽음은 그 어떤 자연법칙보다 강력하게 우리 역시 우주의 여러 규칙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끔 한다. 죽음은 우리를 지식의 한계와도 직면하게 한다. 이 일에누군가 책임이 있다면, 대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알아낼 수없기 때문이다. 왜 이 사람이 죽었는가?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왜 이렇게 일찍 또는 왜 이렇게 끔찍하게?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느끼는 얼토당토않은 부당함의 책임을 우리는 대체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인가?

빛나는 지성인 루이스는 애도과정에서 지적 교만을 버렸고, 대신에 훨씬 더 포괄적인 지혜를 선물로 받았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종종 애도를 통해 그의 가치관이 변했다.
고 말한다. 전에 중요하게 보였던 것들이 갑자기 그리 중요하지않은 것이 되고, 전에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던 것들이 중심으로 들어온다.

초월의 경험은 스펙터클한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당사자의 사고 지평을 더 넓혀주고, 선입견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준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은 이 제 이런 특별한 감각적 인상을 자신의 신앙이나 세계관으로 편입하려고 할 것이다. 기독교건, 불교건, 이슬람교건, 힌두교건 또는 무신론자건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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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자, 장자크 상페 그림, 박종대 역자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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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어찌 저리 태연하고도하고 창백하고 무표정할 수 있을까! 자신감에 넘치는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경꾼들은 눈가가 촉촉해지고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자신들은 그렇게 두고 싶지만 감히 두지 못하는 수를 이 젊은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은가! 물론 젊은이가 왜 저렇게 두는지는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쩌면 그들도 저 친구가 지금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젊은이처럼 두고 싶다. 저렇게 당당하고, 승리의 자신감에 넘치고, 나폴레옹처럼 영웅적으로 싸우고 싶다. 장처럼 소심하게망설이듯이 질질 끌며 두고 싶지는 않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 자신이 실전에서는 장과 똑같이 두기 때문이다. 다만장이 그들보다 더 잘 둘 뿐이다. 장의 게임은 이성적이다. 정석적이고 정연하면서도 상대의 진을 빼놓기에 충분할 만큼질기고 무미건조하다. 반면에 흑은 한 수 한 수가 기적이다.
이방인은 비숍을 G7으로 진출시키려고 퀸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하는데, 대체 그런 수를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 행동에 가슴 깊이 감동한다. 이제 이방인은 자신이 원H
하는 대로 둘 것이고, 그들은 그의 그런 수를 하나하나 끝까지 따라갈 것이다. 그 과정이 황홀한 기쁨이든 쓰라린 고통이든 간에, 그는 이제 그들의 영웅이고, 그들은 그를 사랑한다 .

지금껏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바로 전 판을 머릿속으로하나 복기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실수는 없었다. 단 한 치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형편없는 시을 한 것 같다. 정상적으로 두었다면 초반에 진작 상대를 인통으로 몰아넣어 게임을 끝냈어야 했다. 퀸을 갬비트로 허되이 허비해 버리는 그런 한심한 수를 두는 인간은 체스의〈체 자도 모르는 신출내기가 분명했다. 지금까지 장은 그런초보자들을 기분에 따라 어떤 때는 슬슬 봐주면서, 어떤 때는 인정사정없이 잔인하게 요리하곤 했는데, 어떤 경우든 때가 되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신속하게 짓밟아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상대의 진짜 약점을 간파하는 촉수가작동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아니면 자신이 너무 비겁했을까? 저 거만한 사기꾼 자식을 그에 걸맞게 간단하게 처치해버릴 용기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실상은 더 나빴다. 그는 상대가 그렇게 한심한 초짜라고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훨씬 더 나빴던 것은 판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도 그 낯선놈이 아예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인간이라고는 믿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인간의 자신감과 천재성, 젊은 패기는절대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비쳤다. 그가 과도할 정도로 그렇게 신중하게 둔 것도 사실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의 행동을 설명하기엔 충분치 않다.

... 그와 함께 자신이 수년 전부터 그렇게 기다려온 패배를 마침내 그 인간이 최대한 강렬하고 기발한 방식 이로 맛보게 해주기를 소망했다고 말이다. 그래야 자신은 언제나 최고여야 하고 어떤 상대든 무너뜨려야 하는 짐을 벗어던질 수 있고, 그래야 질투로 찌든 그 망할 놈의 구경꾼들에게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고, 그래야 스스로 평온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번 승리는그의 삶에서 가장 역겨운 승리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 승리를 피하려고 체스를 두는 내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욕보였고, 그로써 천하의 그 한심한 풋내기에게 항복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체스 챔피언 장이 이 일로 무슨 커다란 정신적 깨달음을얻은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옆구리에 체스판을 끼고 손에는기물 상자를 들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분명히 깨달은 것은 하나 있다. 오늘 실제로 패배한 사람이 자신이라는것이다. 그것도 복수할 기회가 영영 없고, 미래의 어떤 빛나는 승리로도 만회할 수 없기에 더더욱 비참하고 결정적인 패배였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무슨 거창한 결심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이날만큼은 한 가지 굳은 결심을 했다. 체스를 영원히 그만두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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