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격려하기에 앞서, 그 사람이 과연 자기 안에사랑을 지니고 있는지, 그가 자기가 하는 일에 그 일이 무엇이든간에 흥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해요. 왜냐하면 어떤 일에몰두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관심을 지니는 일이니까요. 여기서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나뉘어요. 한쪽은 행동할 수 있는 비범한 여력이있는 사람들, 다른 한쪽은 제가 잠꾸러기‘라 부르는 사람들, 잠자는사람들은 굳이 흔들어 깨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을깨워봐야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까요. 그들은 아주 착하고, 행복하고,그 상태로 아주 좋아요. 인간적으로 볼 때 그들은 지금 그 상태로충분히 정당화되거든요.
주의라는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있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은누구나 자기 삶을 잃는 셈이다"라고요. 나아가서 부주의 때문에그의 삶은 무화無化된다고 까지 저는 말하죠. 유리창을 닦는 사람이건,명작을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건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항상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쓴 이 놀라운 구절로 돌아옵니다. "인간은자연의 혼돈 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그 혼돈을 정연하게조직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어서 어떻게 이런 조건 속에서 인간이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 많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자신의능력에 스스로 깜짝 놀라는지, 그것을 베르그송은 펼쳐 보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 나오는 한 구절을 저는 살면서 하루도빠지지 않고 생각합니다. "생각 없는 말言은 결코 하늘로 가지 못한다."
제가 당신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면, 저는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로마에 있었을 때 제 여동생 릴리는 열아홉 살, 그 애가 로마작곡대상을 받은 직후였어요. 더없이 우아하고 순수한 모습이던 동생과빌라 메디치의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공원을 걷는 우리는 청춘이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젊은이다운 환상을 갖고 있었어요. 그 공원에서늘 잡초를 뽑던 할머니 한 분이 있었는데, 피부는 주글주글했지만이목구비는 너무도 아름다웠어요. 그때가 1913년이었는데, 이 일은지금까지도 제 삶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옆으로지나갈 때 할머니가 고개를 들더니, 지울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인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좋은 하루, 그리고 하루 종일좋은 날Buon giorno, e per tutto il giorno." 이 말을 하면서 할머니는 우리를보고 미소 지었어요. 그 미소가 이미 선물이었어요. 우리는 그 말을듣고 할머니께 고맙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65년이 흘렀고,
동생은 1918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하지만 지금도 이 말이 귓가에들리면 저는 혼잣말을 합니다. "잊지 말자. 너의 하루하루가 축복받은날이라는 걸. 네가 그 날을 잘 활용하건 못 하건, 하루하루는 축복받은 날이야"

제 생각에, ‘주의‘란 우리로 하여금 있어야‘ 하는 것을 인식하게하는 상태입니다. 위대한 신비주의 명상가들이 보는 것이 바로이것이죠. 그들 신비주의자들 입장에서도 진정 주의를 기울이게되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 종종 떠오르는 인물은 아빌라의성녀 테레사예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인 그 대단한 성녀 테레사의경우에도 본인이 메마른 기도의 날‘이라고 이름 붙인 날들이 있다고해요. 그런 날이면 테레사 성녀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안 그래도 그분이 기도를 멈춘 적은 없었지요. 그러나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고 나면 문득, 소리가 들리는 날이 옵니다. 예술에서는 이런것을 ‘영감‘이라 부르지요. 그건 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 진짜 생각을밑바닥까지 포착해낼 수 있는 순간이며, 우리가 진실과 닿는 순간이고, 일치가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또 다른 차원에선, 최근에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가 오페라〈토스카Tosca)를 연습하는 자리에 함께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말이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사실 〈토스카>를 안 들어도 우린아무 탈 없이 잘 살지요. (토스카>가 걸작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어쨌든 그 곡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연습 장면을지켜본 기억이 제 뇌리에 남아 앞으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알겠더군요.
연습이 끝나자 로스트로포비치가 다가오더니 서툰 불어로 이렇게말했어요. "저는 뭐든 했다 하면, 할 수 있는 한 잘해야 합니다."
음 하나하나가 그에겐 본질이에요. 어떤 음 하나 심드렁하게 나는것을 그는 견디지 못해요. 첫 연습 결과에 만족한 사람이 많았어도그는 곡의 일정 부분을 아주 여러 번 되풀이하게 했지요. 그런데 너무나 기분좋게 반복시키고 또 전혀 안달복달하지 않는 태도로 연습을 시키니까 단원들도 기꺼이 반복 연주하면서 아주 기분이 좋아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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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오랫동안 몸담았던 대학교의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노년층을 타깃으로 한 헬스클럽으로 운동 장소를 바꿨고, 그곳에서 나이 든 여성의 행복을 생생히 보여주는 일화를 경험했다.

나는 두 시설의 탈의실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대학교 레크리에이션 센터의 탈의실은 불행과 스트레스에 짓눌린젊은 여성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늘 운동 파트너나 휴대전화 너머상대방을 향해 체중이나 재정 상황, 학점, 인간관계 등에 대한 불평을 늘어놨다. 옷을 벗을 때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몸을 웅크렸다. 누군가 주말이나 공휴일 계획을 자랑하는 짧은 순간을 제외하면, 그곳 분위기는 언제나 축 처져 있었다.
반면, 새로 등록한 헬스클럽의 탈의실에서는 나이 든 여성들이아무 거리낌 없이 벌거벗고 돌아다니거나 최소한의 속옷 혹은 수영복만 입은 채 자유롭게 활보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몸은 주름과 튼 살, 셀룰라이트로 가득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서로의 몸보다 수십 년의 기쁨과 고통이 새겨진 얼굴에더 큰 관심을 갖고, 종종 자신의 삶을 솔직히 공유한다.

이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뿐이며, 삶에서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법칙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없다는 것뿐이다. 인생의 이 시기에 다다른 우리는 이제부터 각종내적 · 외적 위기에 시달릴 것이다.
생애의 단계가 전환되고 정체성이 바뀌는 순간, 우리는 인생에서 새로운 목적과 의미에 대한 감각을 찾아내야 한다는 가장 큰 도전에 맞닥뜨린다. 이는 말처럼 쉬운 과제가 아니다. 의사였던 내남동생은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를 택해야 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목적이라는 게 그냥 원한다고 휙 얻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존의말이 옳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지, 어떻게 남을 도울지,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하나하나 선택하면서 인생의 의미를만들어나가야 한다.
물론 매일같이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날에는 늦잠을 자거나 친구들을 만나거나 영화를 보며 한가롭게지내고 싶을 수도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균형과 대조의 문제다.
일과 휴식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법을 찾아낼 때, 우리는 비로소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더욱 빨리 성장한다. 이 시기에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서 인생이 공기 중으로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현실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틈만 나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제 겨우 여행 갈 시간이 생겼는데, 어디로 떠나야 하지?"
"제일 친한 친구가 애리조나로 이사 가버렸으니, 이제 누구랑 영화를 본담?" "허리가 안 좋아졌는데, 이제 어떻게 13킬로그램짜리 사료통을 옮기지?"
동시에, 우리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탐구한다. 나는 시간과 재능을 현명하게 사용했는가? 지금은 어떤가? 나는 사랑을 베풀며 살았는가? 지금은 어떤가?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는가? 지금은 어떤가? 이 세상에서 내 자리는 어디인가?
우리는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 선택할 수 있다. 대부분은 행복과 고통의 조합을 통해 주어진 삶의 단계를 정의하고 성장을 촉진한다. 우리는 행복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동시에’일어나는 인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의한다. 행복은 희망과 활력을 주고, 고통은 공감능력을 향상시킨다. 이러한 모순은 노년이라는 삶의 단계에서 우리의 영혼을 넓혀주는 문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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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손가락질하는 악인은 과연 진짜 악인인가. 그에게침을 뱉고 지나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가. 소설은 그렇지 않다.
고 말한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것이다.
악(惡)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두말할 것 없이 요시노를죽인 살인자는 유이치다. 마스오에겐 법적인 책임이 없다. 그것으로 계산을 끝내기엔 한쪽은 뭔가 모자라고, 한쪽은 뭔가남는다. 유이치의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우리가 가져야 할 의문은 처음에 증오를 촉발시켰던 마스오가 가해자의 범주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과연 정의롭냐는 거다. 꼭대기의 돌은 무사한 대신 밑변의 돌만 사라지는 게 옳으냐는 거다.
악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다. 위에서 물이 넘치면 아래로 내려가듯이 악은 계속해서 피라미드 계단 아래로 흘러내린다.
직장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상사에게 되돌아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 아래에 있는 부하에게 내려간다. 스트레스 질량보존의 법칙일까. 갈 곳을 찾지 못한 스트레스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대상은 눈앞의 불특정 다수다.
"네가 뭔데 왜 기분 나쁜 눈으로 쳐다봐?"
"어깨를 치고도 왜 사과를 하지 않는 거야?"
멱살잡이를 하고, 주먹다짐을 한다. 거리에서 분노를 풀 용기조차 없는 자들은? 아내와 자녀에게 푼다.

"뭐가 그리 재밌나?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렇게 다른 사람이나 비웃으며 살면 되겠어? 아버지는 마스오를 향해 움켜쥐었던 스패너를 바닥에 던지고 돌아선다. 소설은 그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다. 증오 따위는 날려버리고도 남을만큼 서글펐다.
그가 철없는 악인, 마스오를 보고 느낀 것은 서글픔이다. 서글픔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됐을 때 가지는 감정이다. 한국 사회에도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서글픔을 안고 사는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 서글픔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바꿀순 없을까. 악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 보내는 시스템을 어떻게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까.

소설이 막바지로 치닫는 상황에서 두 개의 장면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는다. 장면 하나. 유이치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쫓기는 사이 가족들은 취재진에 포위된다. 기자들에 쫓겨 버스에 오른 유이치 할머니에게 버스 기사가 말한다.
"아줌마가 잘못한 거 없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해요."
"당신이 그렇게 키웠으니까 그렇게 됐지." "그러니까 죽은거지." 가해자 가족도, 피해자 가족도 선입견의 먹잇감이 된다. 스스로도 가슴 깊이 죄책감의 주홍글씨를 새기게 된다. 그러나 버스 기사의 말대로 할머니는 잘못한 게 없다. 손주를 자식처럼 키웠을 뿐이다.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선의는 일어설힘을 준다.

우리는 ‘너를 위한다‘는 속삭임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자식을 위한 게 아니라 부모 자신의 비교 우위를 남에게인정받기 위한 것은 아닐까. 후배 직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장이나 이사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문제는 많은 이들이 진짜 너를 위해 이런 것‘이라고 믿는다.
는 것이다. ‘너를 위해‘로 시작했다가 어느덧 나를 위해‘로 바뀌었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
면, 그러한 믿음을 그에게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한 개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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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선택지를 찾는두 번째 원칙은 ‘진짜 원하는 것 하나만 바라기‘ 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마음의 순결함은단 한 가지만 바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금 드라마틱한 표현이지만 자신이 가장 마음 쓰는 한 가지에 계속 집중하기 위해 다른 것들은 놓아버리는 것이 마음의 순결함을 지키는 방법이다. 인생을 성찰하다 보면 모든 것을다 가지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깨달음이 생긴다. 덴마크 시인 피트 헤인도 비슷한 말을 했다.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우리는 진짜 원하는 것 하나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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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화는 절대 나쁜 게 아니네. 진짜 어른이 되는 거니까. 남들보고 왜 날 안 봐주느냐고, 언제까지 졸라댈 건가.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지 않겠나. 그게 더 성숙한 자세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쁘게 살면안 된다" 맨날 그 타령이지. 토머스 웨인 같은 작자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갇혀 있는 거지.
생각해보라고, 자네가 왜 무시당하고 사는지. 그건 만만하기 때문이네. 자네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말대꾸도 제대로 않겠나? 정말 별거 아니라고 여기니까그런 거 아니냐고. 만약에 자네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그렇게는 못할걸? 네버(Never). 절대로,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다. 프로이트는 유머가 사람이 좌절했을 때 생겨나는 몇 가지 반응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미끼를 물었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됐다는 건 이 사회의 오래된 우화다. 성폭행 책임을 피해자에게 묻는 현실이 우화가살아 있다는 증거다.
"밤늦게 다니지 마라." "짧은 치마 입고 다니지 마라." "인적이 드문 곳에 가지 마라."
이런 말들은 모두 미끼를 문 자의 책임이라는 전제 위에 있다. ‘미끼를 물어버린 자의 책임’ 논리는 이 땅의 모든 사건,
모든 피해자에게 적용된다.
"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느냐?" "왜 세월호에 올랐느냐?" "그 위험한 장소에 왜 갔느냐?"
이 물음들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음모다. 무고한 피해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모함이다. 인간을 성욕의 제물로 삼은 자의 잘못이고, 독성물질이 들어간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자의 잘못이고, 바다에 떠서는 안될 배를 띄운 자, 구조하지 않은 자의 잘못이고, 사람에게 흉기를 휘두른 자의 잘못이다. 피해자는 죄가 없다.
모두가 피해자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사이 가해자는 유유히암흑 속으로 빠져나간다. 그는 다시 범행할 대상을 찾아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러다 그의 눈앞을 스치는 누군가가 피해자가 된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이유는 피해자 환원론에 있다.

"크면서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어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 일을 당한 걸까, 죄책감을 갖기도 했고…. 그런데 대학에 갔을 때 ‘당신은 성폭행피해자가 아니라 성폭행 생존자‘라는 상담사 말씀을 들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졌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생존자. 범죄의 고통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그 고통을 이겨낸 생존자다. 생존자라는 말과 함께 그동안 견뎌낸 한순간한순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괜찮다. 다 괜찮다. 인간은 악(惡)에 패배할 수 있지만 영혼까지 내주진 않는다. 악이 인간을 현혹해 죽일 수는 있어도 마언제기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는 것이음까지 빼앗아가지 못한다. 악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악이가질 수 있는 건 인간의 거죽뿐이다. 악마가 카메라에 담을 수있는 건 오직 죽은 자의 데스마스크뿐이다.
한없이 약한 인간도 악마가 갖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힘은 가족, 친구, 사람에 대한 마음이다. 오롯이 인간으로서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란 한계는 오히려 구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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