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화는 절대 나쁜 게 아니네. 진짜 어른이 되는 거니까. 남들보고 왜 날 안 봐주느냐고, 언제까지 졸라댈 건가.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지 않겠나. 그게 더 성숙한 자세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쁘게 살면안 된다" 맨날 그 타령이지. 토머스 웨인 같은 작자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갇혀 있는 거지.
생각해보라고, 자네가 왜 무시당하고 사는지. 그건 만만하기 때문이네. 자네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말대꾸도 제대로 않겠나? 정말 별거 아니라고 여기니까그런 거 아니냐고. 만약에 자네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그렇게는 못할걸? 네버(Never). 절대로,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다. 프로이트는 유머가 사람이 좌절했을 때 생겨나는 몇 가지 반응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미끼를 물었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됐다는 건 이 사회의 오래된 우화다. 성폭행 책임을 피해자에게 묻는 현실이 우화가살아 있다는 증거다.
"밤늦게 다니지 마라." "짧은 치마 입고 다니지 마라." "인적이 드문 곳에 가지 마라."
이런 말들은 모두 미끼를 문 자의 책임이라는 전제 위에 있다. ‘미끼를 물어버린 자의 책임’ 논리는 이 땅의 모든 사건,
모든 피해자에게 적용된다.
"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느냐?" "왜 세월호에 올랐느냐?" "그 위험한 장소에 왜 갔느냐?"
이 물음들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음모다. 무고한 피해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모함이다. 인간을 성욕의 제물로 삼은 자의 잘못이고, 독성물질이 들어간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자의 잘못이고, 바다에 떠서는 안될 배를 띄운 자, 구조하지 않은 자의 잘못이고, 사람에게 흉기를 휘두른 자의 잘못이다. 피해자는 죄가 없다.
모두가 피해자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사이 가해자는 유유히암흑 속으로 빠져나간다. 그는 다시 범행할 대상을 찾아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러다 그의 눈앞을 스치는 누군가가 피해자가 된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이유는 피해자 환원론에 있다.

"크면서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어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 일을 당한 걸까, 죄책감을 갖기도 했고…. 그런데 대학에 갔을 때 ‘당신은 성폭행피해자가 아니라 성폭행 생존자‘라는 상담사 말씀을 들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졌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생존자. 범죄의 고통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그 고통을 이겨낸 생존자다. 생존자라는 말과 함께 그동안 견뎌낸 한순간한순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괜찮다. 다 괜찮다. 인간은 악(惡)에 패배할 수 있지만 영혼까지 내주진 않는다. 악이 인간을 현혹해 죽일 수는 있어도 마언제기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는 것이음까지 빼앗아가지 못한다. 악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악이가질 수 있는 건 인간의 거죽뿐이다. 악마가 카메라에 담을 수있는 건 오직 죽은 자의 데스마스크뿐이다.
한없이 약한 인간도 악마가 갖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힘은 가족, 친구, 사람에 대한 마음이다. 오롯이 인간으로서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란 한계는 오히려 구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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