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손가락질하는 악인은 과연 진짜 악인인가. 그에게침을 뱉고 지나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가. 소설은 그렇지 않다.
고 말한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것이다.
악(惡)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두말할 것 없이 요시노를죽인 살인자는 유이치다. 마스오에겐 법적인 책임이 없다. 그것으로 계산을 끝내기엔 한쪽은 뭔가 모자라고, 한쪽은 뭔가남는다. 유이치의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우리가 가져야 할 의문은 처음에 증오를 촉발시켰던 마스오가 가해자의 범주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과연 정의롭냐는 거다. 꼭대기의 돌은 무사한 대신 밑변의 돌만 사라지는 게 옳으냐는 거다.
악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다. 위에서 물이 넘치면 아래로 내려가듯이 악은 계속해서 피라미드 계단 아래로 흘러내린다.
직장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상사에게 되돌아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 아래에 있는 부하에게 내려간다. 스트레스 질량보존의 법칙일까. 갈 곳을 찾지 못한 스트레스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대상은 눈앞의 불특정 다수다.
"네가 뭔데 왜 기분 나쁜 눈으로 쳐다봐?"
"어깨를 치고도 왜 사과를 하지 않는 거야?"
멱살잡이를 하고, 주먹다짐을 한다. 거리에서 분노를 풀 용기조차 없는 자들은? 아내와 자녀에게 푼다.

"뭐가 그리 재밌나?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렇게 다른 사람이나 비웃으며 살면 되겠어? 아버지는 마스오를 향해 움켜쥐었던 스패너를 바닥에 던지고 돌아선다. 소설은 그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다. 증오 따위는 날려버리고도 남을만큼 서글펐다.
그가 철없는 악인, 마스오를 보고 느낀 것은 서글픔이다. 서글픔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됐을 때 가지는 감정이다. 한국 사회에도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서글픔을 안고 사는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 서글픔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바꿀순 없을까. 악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 보내는 시스템을 어떻게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까.

소설이 막바지로 치닫는 상황에서 두 개의 장면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는다. 장면 하나. 유이치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쫓기는 사이 가족들은 취재진에 포위된다. 기자들에 쫓겨 버스에 오른 유이치 할머니에게 버스 기사가 말한다.
"아줌마가 잘못한 거 없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해요."
"당신이 그렇게 키웠으니까 그렇게 됐지." "그러니까 죽은거지." 가해자 가족도, 피해자 가족도 선입견의 먹잇감이 된다. 스스로도 가슴 깊이 죄책감의 주홍글씨를 새기게 된다. 그러나 버스 기사의 말대로 할머니는 잘못한 게 없다. 손주를 자식처럼 키웠을 뿐이다.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선의는 일어설힘을 준다.

우리는 ‘너를 위한다‘는 속삭임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자식을 위한 게 아니라 부모 자신의 비교 우위를 남에게인정받기 위한 것은 아닐까. 후배 직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장이나 이사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문제는 많은 이들이 진짜 너를 위해 이런 것‘이라고 믿는다.
는 것이다. ‘너를 위해‘로 시작했다가 어느덧 나를 위해‘로 바뀌었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
면, 그러한 믿음을 그에게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한 개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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