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보는 묵상독서 - 품위 있는 인생 후반기를 위하여
임성미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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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심리 치료사는 집안일을 ‘묵상의 길‘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은 우리의 성격뿐 아니라 삶 전체의 질에도영향을 미친다는 것이겠지요. 매일 집안에서 해야 할 일, 밥 짓는일에서부터 방을 쓸고 닦고, 의복을 세탁하는 일들이 우리의 영혼에 생기를 줍니다. 집안일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을 보내는 집안 구석구석과 사용하는 물건 하나하나가 우리의 심상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벽에 걸어놓은 십자고상이나 화가의 그림을 바라보는 일,
그것 자체가 묵상이 됩니다. 빨래를 널고 거둬서 개키는 순간에도우리는 가족들을 삶을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 매체와 책에서 ‘고독‘이나 ‘외로움‘, ‘혼밥‘ 등은 부정적인 단어로 쓰입니다. 하지만 위의 그림책 주인공처럼 고독 속에서 자기내면으로 들어가 일상을 편하게 지내는 모습은 오히려 자신의 영혼과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문득 우리나라 옛이야기 『팥죽할멈과 호랑이』가 떠올랐습니다. 산속에서 홀로 살던 할머니를 호랑이가 나타나 잡아먹으려고 할 때집안에 있던 밤톨, 맷돌, 쇠똥, 지게, 멍석 같은 사물들이 머리를 써서 할머니를 구해주는 내용입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저자인 류시화 시인은 "정원사가 있는 곳에 정원이 있다"는 말을 하였는데, 저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합니다. 일상 안에서 스스로를 기쁘게 만드는 공간의 창조자가 되라는 뜻일 겁니다. 영혼을 만나려면, 즉 영혼을 잃지 않으려면 소박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정성을 다해야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멈춤과 묵상이 필요함을 다시 깨우치게됩니다.

실제로 2013년 런던에서 두 명의 코미디언이 무신론자들의 교회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노래 부르기, 소집단 유대감 형성,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하면서 모임을 가진다고 합니다. "더 잘 살고, 자주돕고, 더 많이 감탄하라"가 그들의 모토이고, 자신들을 ‘인본주의 신비가‘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무신론자로 반종교적 논쟁가로알려진 샘 해리스는 열성적인 명상가입니다. 그는 깨달음의 방법으로 명상을 적극 추천하면서 온라인으로 명상 강의를 합니다. 그는 명상하기 위해 꼭 경전을 외거나 종교에 귀의할 필요는 없으며,
그저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것이면 충분하다고주장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를 쓴 세계적인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는 생각과 감정, 마음, 의식이라는 말의 개념을 조금 구분지어설명합니다. 생각과 감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외부의 사물과 사건에 반응함으로써 형성된 것들입니다. 주로 과거에 경험한 기억에 의해 재생되고, 강화되며, 종래에는 습관으로 남아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과 감정은 미래에 대한 온갖 시나리오들을 만들어냄으로써 두려움과 불안과 같은 파장을 일으킵니다. 마음이란 이러한 생각과 감정들의 집합체인데요, 불행한 마음,행복한 마음과 같은 말들처럼 우리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면 ‘의식‘은 근원적인 에너지와 같습니다. 생각과 감정의 숲을 헤치고 더깊이 들어가면 순수의식의 세계를 만날 수 있고, 톨레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베네딕트회 사제로 수많은 영성 책을 낸 안셀름 그륀은 영혼이자리 잡고 있는 그곳을 옹달샘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어린 왕자』에서 왕자가 사막에서 우물을 찾아냈던 것처럼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있는 영혼을 ‘우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물론 영혼은 어떤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편의상 그렇게 설명하는 것뿐이지요

첫째, 푹 자고 걷기: 어느 저명한 강연자는 이런 말을 했다. "20킬로미터를 걸은 날에는 절대 연설에 실패하지 않는다" 푹 자고걷기가 중요하다.
둘째, 편지쓰기: 생각이 고갈되었다고 느낄 때 오랜 친구에게 편지를 써보라. 편지를 쓰면서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솟아날 것이다.
셋째, 양질의 대화 나누기 : 좋은 대화는 와인처럼 우리를 도취시킨다. 공감의 불 주위에 모이면 우리의 마음은 따뜻해지고 활발해진다. 지적인 활동은 전염성이 있다.
넷째, 고독한 시간 갖기: 숲속에 혼자 있는 시인이 적은 내밀한언어가 도시의 북적이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듯이 가장사적이고도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인 진실이다.

다섯째, 아침을 성스럽게 유지하기: 위대한 사상가들은 아침마다 한 시간씩 명상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발견했다.
여섯째, 자연 속에서 시간 보내기: 어떤 음악가의 작품도 바람의소리에 견줄 수 없다. 자연의 목소리를 영혼의 목소리다. 이 소리는 어떤 교회의 오르간도 도달하지 못한 신성한 곳으로 우리를 들어 올린다.
일곱째, 한 걸음 물러나기: 특정한 문제나 프로젝트로 인해 답답할 때 필요한 것은 풍경의 변화이다. 때로 익숙한 일상을 떠나는것만으로 창조성에 불이 붙는다.
여덟째, 새로운 책 읽기: 좋은 문학 작품은 삶을 긍정하고 신뢰하게 해준다. 우리의 감각과 영혼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다. 최고의 책은 영감을 주는 책이다.
아홉째, 인내하기: 의지력은 영감의 적이 아니라 협력자이다. 신의 은총을 품은 바람은 항상 불고 있지만 당신이 돛을 높이 올려야만 소용이 있다.

철학자 움베르트 에코가 "태초에 장미는있었고 장미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이제는 장미는 없고 장미라는이름만 있다"라고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실재로서의 장미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게 아니라, 이미 머릿속에 심어진 장미에대한 상징체계를 갖고 장미를 대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받은 꽃이 장미였을 때와 민들레였을 때 우리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장미와 민들레에 대한 상징체계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윌버가 지적한 대로 언어가 만든 세상속에 살면서 ‘환상 속 경계‘를 만들었고, 그 경계가 만들어낸 대립으로 인해 전쟁터를 만들고 말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윌버의 강의는 페르소나, 에고, 심신 통합 단계에 이어 이제 ‘초월적인 나‘라는 개념으로 넘어갑니다. 초월적인 나에 대해 윌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욕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나의 욕망이 아니다. 나는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일까요? 윌버는 한마디로 정리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뒤에 남아 있는 순수한 자각의 중심이며, 모든 생각, 감정, 느낌, 욕구에 대한 부동의 주시자이다.", "내 불안은 내가아니다"라는 깨달음이 강해질수록 그 불안에 위협당하지 않게 될것이라고 윌버는 단언합니다. 불안이 현존해 있더라도 더 이상 그불안에만 묶여 있지는 않기 때문에 불안에 압도당하는 일은 없을거라는 뜻입니다. 불안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철저히 수용하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허용하면 됩니다. 불안이 사라져가는 것을 단지 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불안이 존재하든 안하든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괴로움의 한가운데서, 다만 ‘무선택적 자각‘으로 머물러있어보라.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괴로움도 ‘진정한 나‘
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이다. 그것들이 나의중심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자신의 괴로움을 비난하거나, 그것들에 분개하고, 원망하는 일도, 거부하거나 탐닉하는 일도 하지 않게 된다."

그는 켄 윌버의 모든 것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코스모스 Kosmos‘라는 아름다운 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육체적, 감정적, 지적, 영적 영역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존재의 질서 있는 전체 Whole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 불쌍한 현대인들은 이 코스모스 Kosmos를 코스모스 cosmos(물질적 우주)로 축소시켰다. 물질과몸과 마음과 혼과 영을 물질 한 가지로 축소시킨 것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인간이 영혼을 박대할 때마다 생명의 생기가 우리에게서 빠져나간다. 이로 인해 인간은 신경쇠약과 격분, 정신의 불모 등의대가를 치른다"( 칼 융)

인간이 지닌 깊은 슬픔에 관한 어떤 표현도 나에게는 낯설지않았다. 나는 두려움 없이 그들의 눈에서 그들이 지닌 고통을 바라보았다. 하루가 다 끝나는 시간에 나는 항상 이런 느낌을 가졌다. 나는 이 사람들을 사랑한다. 가혹한 짐을 어떻게 견디어야하는지 아무런 준비도 없었지만 그냥 묵묵히 참아내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가해진 박해에 대한 비통함보다는 ㅇ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을 느낀다. 삶은 아름답다. 그리고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나는 사람들이 ‘공포‘라고 부르는 상황에서도 바르게 서기를 원하고 여전히 삶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한다."

에티의 일기에서 가장 놀랍고 경이로운 구절은 "우리를 도울 수없는 신을 우리가 돕고 보살펴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 계시다면 이 비참한 일들에 침묵하실 리 없다"라고 절망하며 신의 부재를 부르짖던 때에 에티는 우리가 신을 보살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돕기 위해 당신을 도와야 한다"
라는 에티의 말에서 그 의미를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영혼을 돌봄으로써 곧 신을 도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에티의 이런 마음은 그가 재스민 꽃을 보면서 신과 나눈대화에 나와 있습니다.
"지난 며칠간 비바람이 치더니 집 뒤에 피었던 재스민 꽃이 모두 떨어져버렸습니다. (...) 하지만 내 속 어딘가에는 재스민 꽃이 지지 않고 예전처럼 우아하게 활짝 피어 있습니다."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반드시 거짓의 요소가 침투한다"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혼란스럽고 끊임없이 변하는 삶에서 확실성을 얻고자 고정관념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 결과 미묘한 차이와 놀람의 요소를 지닌 실제 삶을 경시하고 희생시킨다"라고 통찰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진실을 희생시키는 이유는 자신들이 만들어놓았던 이념이라는 건물을 부수는것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훌륭한 시민이 되기 위한 방법이 나옵니다. 그는 이 광란의 세계에서 훌륭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하루에 한 번, 집이나 사무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디지털 기기의 전원을 끄고, 일을 내려놓고,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스스로를 침묵시키고, 자기 안에서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잠시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잘 알게되고, 그럴수록 세상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하지요.

제가 소로에 대한 일화 중에서 가장 크게 웃었던 대목이 있습니다. 어느 날 소로는 병아리들이 화단을 파헤쳐서 속상하다고 말하는 에머슨 부인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자 소로는 헝겊을 잘라병아리들의 발을 감싸는 양말을 만들어 신겼다고 합니다. 병아리들을 우리에 가두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였지요. 귀여운 병아리들이 자유롭게 다니도록 하려고 양말을 만들어 신기는 소로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터졌습니다. 앞으로 소로를 생각할 때면 항상그 장면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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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으로 떨어지다 - 인생의 후반전, 어떻게 살 것인가?
리처드 로어 지음, 이현주 옮김 / 국민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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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 미국보다, 로마 가톨릭보다 훨씬 큰 세계를 만나게 되었는데 덕분에 미국도, 가톨릭도 하나의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미국 화폐에 새겨진 문장인 ‘여럿에서 하나‘(e pluribus unum)는 그 속에 많은 사람들(유색인, 동성애자, 원주민, 가난한 민중 등)을 포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나는 끊임없이 로마 아니면 가톨릭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예수는 온 세상을 구원하는 분(요한복음 4:42) 이든지 아니면 아예 아무도 구원하지 않는 분이다. 미국은세계 모든 나라를 민주주의 방식으로 대하는 나라든지 아니면 아예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나라다. 이것이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그렇게 나를 찾아온 변화와 깨달음의 느린 과정은 ‘이것 또는 저것‘(either-or)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커다란 ‘이것도저것도‘(both-and)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많은 기도와 자기 회의, 공부그리고 대화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정 자체가 나를 이끌어 교회에서 말하는 ‘성결함‘이 무엇인지, 미국이 말하는 ‘자유‘와 심리학이 말하는 ‘옹근
전체‘(wholeness)가 무엇인지를 깊이알 수 있게 해주었다.

폴 리꿰르가 말하는 ‘첫 번째 순진함‘은여정을 출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두 번째 순진함‘은 분노, 분열, 소외, 무시당하지 않으면서 같은 여정을 계속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나는 이제 ‘두 번째 순진함‘이야말로 성숙한 어른과 성숙한 종교의 목표라 믿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잘 늙은 사람 얼굴이 동안인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일까? 그곳이 우리 모두 가야 할경지 아닐까? 그래서 한 시인이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다"라고 말한것 아닐까?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고 무엇을 판단할 때 사용하던 나의 밝은관점이 살아오는 동안 차츰 흐려졌다. ‘우주‘(universe)라는 말 자체가 ‘한 물건을 돌려놓다‘(turn around one thing)라는 뜻이다. 내가 그 ‘한 물건‘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우주 안에 어떤 ‘큰 진실‘(Big Truth)이있든지 아니면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진실이 아예 없든지 둘 중 하나다. 이 모든 것 뒤에 어떤 패턴 (그게 ‘예외‘라는 패턴이라 하더라도!)이 있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부조리한 우주가 있게 되는 건데, 포스트모던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도마도, 마더 테레사도 가졌던 의심과 불안을 조금도 품지 않는 ‘참 신자‘들이 실은 좀 걱정스럽다. 모든 것이 그토록 분명한 사람들은 햄릿의 ‘너무 많이 저항하는‘ 여왕처럼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삶의 옹근 신비를 움켜잡는 것은 언제나 죽음과 의심의 동일한신비인 그 반대쪽 절반을 감내()하는 것이다. 무엇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그것의 여전히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는것이다.

T.S. 엘리엇이 그의 ‘사중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경험을 했지만 그 의미를 놓쳤다.
그리고 경험의 의미에 대한 접근은,
우리가 행복에 결부시킬 수 있는 의미를 넘어,
다른 형태로 경험을 재생시킨다.
엘리엇의 문장이 난해하긴 하지만 거듭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후반부 인생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미국 헌법을 지켜야한다거나 우리와 똑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단순한 의미가 이제 충분하고 그것 자체가 더 깊은 행복으로 바뀐다. 몸은 음식 없이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혼은의미 없이 살 수 없다. 나치의 대학살에서 사람들을 절망과 자살로부터 지켜줄 수 있었던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고 빅터 프랭클이 말한 것은 참으로 옳은 지적이었다. 인간은 의미를 창조하는존재다. 우리 경험 속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영성‘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일 뿐 아니라 인생의 행복 바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패러독스를 내포한 새로운 통일장이 차츰 후반부 인생의 특성을 만들어간다. 그것은 온갖 복잡함에서 배울 것을 모두 배운 뒤에다시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슬픔과 부조리를비롯해 온갖 ‘쓸데없는 것들‘이 모두 함께 그 속에 들어 있음이 눈에보일 만큼 충분히 오래 산 것이다.

후반부 인생에게는 우주가 추는 총체적 춤의 한 부분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다. 춤마당에서 누구보다 돋보이거나 더 잘 추는 모습을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그의 인생의 의미는 자기를 돋보이는 데 있지 않고 함께 참여하는 데 있다. 자기를 강하게 주장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잘 모든 일을 경영하고 계신다. 지금 여기 안에서 밝음이 솟아난다. 그 밝음 하나에 모든것이 충만하여 차고 넘친다. 춤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추지만 그것을밝게 빛내주는 무아(無我)의 자유가 함께 춤춘다. 1940년대의 부드러운피아노곡에 맞추어 늙은 두 연인이 상대방 팔에 몸을 맡기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조용하게 춤추는 장면을 그려보라. 말 그대로,춤이 저 혼자서 춤을 추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절망도 사물의 실체를 변경하거나 항상 거기에 있는 우주의춤에서 오는 기쁨을 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의(故意)로 자기 자신을 잊고, 체면 따윈 바람에 날려 보내고, 총체적인 우주의 춤판에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후반부 인생에서 우리는 모든 일, 모든 사건에 대하여 강하고 최종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건들이 우리를 기쁘게 하면 기뻐하고 슬프게 하면 슬퍼한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하여 다른 누구를 변화시키거나 조정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이전보다 더 많이 사람들을 변화시킬 위치에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느끼지 않고, 그것이 모든 것을 달리 만든다. 우리는 행위(doing)에서 존재(being)로, 유기적으로 조용하게 그리고 삼투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

당신이 ‘빛‘으로 가까이 갈수록 그만큼 당신의 그늘은 짙어질 것이다. 어쩔수 없다. 그래서 참으로 거룩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겸손한 사람들이다.
‘그늘‘을 ‘죄‘와 혼동하지만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훨씬 더 잘 섬길 수있을 것이다. 죄와 그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건좋은데, 그래서 자신의 그늘을 직면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 결과 자기도모르게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이다.

레이디 줄리안의 말이 참으로 명언이다. "먼저 추락이 있다. 그 다음에 추락으로부터의 회복이 있다. 둘 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이다."

당신이 당신의 후반부 인생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이 그것을 원치 않아서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원하고 바라는 그것을 정확하게 주신다. 그런즉, 당신은 분명하게갈망하라. 깊이 갈망하라. 당신 자신을 갈망하라. 하나님을 갈망하라. 모든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라.
모든 ‘비워냄‘(emptying out)은 오직 ‘큰 쏟아져 나옴‘(a Great Outpouring)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이 그렇듯이, 모든 공백들을 싫어하여급히 그것들을 채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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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혼란스럽다.
인생에 대한 신념.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신념.
내 능력에 대한 믿음과내게 허용된 일이라고 믿는 것.
우리는 스스로를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어떤것은 그냥 놓치거나 흘려보내도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재능‘은 훌륭한 체의 역할을 한다. 어떤 일을 몇 번 시도해본결과 계속 노력할지, 그만둘지를 결정하는 도구다.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어릴 때는 백신개발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라거나 "이 분야에서 어느 정도성과를 거두기까지 8~9년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라고말해도 누구도 이런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오히려 <엘리제를위하여>를 화음을 넣어 연주하거나 미국 국가를 멋지게 노래하는 2학년짜리 꼬마에게 온갖 찬사를 보내는 교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은 그런 칭찬을 받지 못했으므로 두 번 다시 음악은손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나는 ‘천부적인 기질‘이 있었을까? ‘재능‘이 있었을까? 물론이다. 모든 아이에게는 재능이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재능이 있거나 없는지 꼬집어서 아이에게 알려주는 것은 재능의 불씨를 꺼버리는 셈이다. 나는 그 단어가 싫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 중에서 기쁨과 진정한 만족감을앗아가는 것이 ‘재능‘이라는 단어다.

무언가에 능숙해지려면 꾸준히 연습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몇 년은 걸릴 것이다.
연습 과정은 답답하고, 더디고, 크고 작은 고통이 뒤따르거나,
실망감에 젖곤 한다. 무엇보다 상당히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도 연습하는 이유는 뭘까?
배움을 통해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을해내고 싶다면 길은 하나뿐이다. 바로 연습이다. 아무도 당신이배우는 일이 대단하다고 칭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노력한들 놀라운 수준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적절한 지도를 받아 꾸준히 연습하면 노력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우리 대부분은 영웅이 아니다. 우리 삶의 무대는 그보다 훨씬작으며 주로 가족, 동료, 연인,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나는 일생의 절반을 뉴욕시에서 보냈는데, 이곳에서는 성취를 향해 나아가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고 성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하지만 소통하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에게 ‘연민‘과 ‘용기‘는 삶의 큰 자산과 같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나누어야 할 전부다.

삶의 한 조각이 당신 삶의 한 조각이 될 수 있고, 당신 삶의한 조각이 내 삶의 한 조각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남들에게 내가 어리석게 보일까 봐 걱정하는 마음은 줄어든다. 실제로내가 어리석은 사람이고, 몇 번이고 그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지 않으면 내가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 더 많은 사람이 내게 와서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나는 상대의 말을 들을 때, 뭐라고 말해줄지 딴생각하지않는다. 이렇게 집중력을 발휘하여 상대의 말을 듣다 보면 내면의 자아가 들은 내용을 곰곰이 생각하며 상대방에게 공감을 표현한다.
그 맛이 어떤지 알아요.
나도 시도해봤는데 실패했죠.
나도 좀 아팠어요.
이젠 다 나았어요.
그게 얼마나 속상하고 절망스러운지 잘 알아요.
사랑했고, 이젠 극복했어요.
요즘은 이 도시가 더 좋아졌어요.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오랫동안 나는 결국에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리라고 믿었다. 인생은 신성할 정도로 단순하고, 악마처럼 복잡하다. 인생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이것이 곧 혼돈의 정의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이자 저주받은 존재다. 온 우주가 내 안에 있지만, 사람은 모두 혼자다. 어떤 이는 이 세상이 무의미하다고 말하지만, 내 심장은 여전히인생의 목적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내게 친구, 연인, 가족과 같은 사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모두내 곁을 떠나고 만다. 그래서 내 마음에는 사랑과 고통이 항상 공존하며, 사랑이 고통을 일으키거나 그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어떤 위로도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락이 오면 세상을다 얻은 듯 행복했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런 절망감과기쁨을 오가며 살아간다. 또 모든 것을 잃는다. 고통과 환희를두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이 세상이 초래한 슬픔을 그대로 되갚을 것인가? 아니면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 반영된 것을 지켜보고 이를 발판으로 연민을 더 키울 것인가?

우리는 작은 것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의미는 우리가 열심히 내용을 받아들여 소화한 후에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존재 자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절망에 사로잡히면 잘못된 기대에 빠져 의미가 존재 자체에 의해 성립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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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니시티라는 단어는 흔히 ‘민족성(民族性)‘으로 번역되기때문에 혈통과 유전에 근거한 분류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민족성‘이라는 번역어에서 방점은 ‘민족(民族)‘이 아닌 ‘성(性)‘에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영어에서 레이스는 ‘외모로 드러나는 특징과 어느 정도의 문화와 역사를 공유한집단‘을 가리키고 에스니시티는 문화, 전통, 가족의 유대 등을 공유하는 집단으로부터 습득된 특징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도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서울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이 서울 말씨를 배워 사용하는 것을 쉽게 목격한다. 서울 사람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서울 말씨를 구사하던 이들은 고향에 돌아가 친지를 만나는 순간 사투리가 살아난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로 이동하면서 말투나 행동이 바뀌는 것을 두고 ‘코드 스위치(code switch)‘라는 말이 생겨났다.

미국의 경우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미국 남부 텍사스에서태어나 살던 사람이 북동부 뉴욕으로 이사했다고 해서 뉴욕 말씨와 억양을 빠르게 습득하는 일은 없다. 뉴욕 출신이 서부 캘리포니아에 간다고 자기 억양을 쉽게 버리지도 않는다. 미국이 워낙땅이 넓은 나라인 데다 특정 지역들 사이에 문화적 우열이 없거나, 적어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라서 그렇다.
하지만 지역이 아닌 인종을 기준으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령 미국에서 아시아계로서는 사실상처음으로 메이저 방송국의 앵커로 이름을 날렸던 코니 청(ConnieChung)은 종유화(華)라는 중국식 이름을 갖고 있지만 영문이름(first name)은 콘스탄스(Constance)다. 코니 청의 중국식 이름(Yu-Hwa)은 미들네임으로 숨어 있고 방송에서는 콘스탄스의 애칭인 코니로 통했다. 이렇게 이름을 영국식으로 바꾸는 것을 앵글리시제이션(Anglicization, 영국화, 영어화)이라고 한다.

도시와 건물주변 상권의 환영을 받겠지만 그런 건물들이 세계 최고의 건축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 판단이다. 그건물들이 건물주와 도시에 돈을 벌어준다는 것과 수십,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인류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느냐는 분명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2022년 프리츠커상이 주목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수상자인 디에베도 프랑시스 케레가 만들어온 건물들은 규모, 위치, 용도에서 전통적인 프리츠커 수상자들의 작품과는 크게 다르다. 그의 건물들은 아름답지만 작은 데다 서구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의 마을에 위치해 있다. 무엇보다 케레는 학교 건물에 관심이 많다. 그는 1965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도에서 위치를 찾기도 힘들어하는 부르키나파소에서도 가난하고 교육률이 떨어지는 지역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이장(족장)이었던 케레의 아버지는 아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린 케레를 멀리 떨어진 도시로 보내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그 학교라는 곳이 환기도 안 되고 빛도 들어오지 않는 시멘트 블록 건물이었다고 한다. 케레는 그곳에서 공부하면서 ‘학교 건물을 이것보다는 낫게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때 가졌던생각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자기가 설계하는 학교 건물에 반영하고있다.

프리츠커상이 디에베도 프랑시스 케레를 선택한 것은 아프리카 건축이라는 지역적 다양성(이것만 고려했다면 다른 아프리카 출신의 건축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외에도 건축물이 가지는 가치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비행기를 타고오는 돈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건물과 제3세계에서 어렵게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좋은 수업 환경과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는 건물 중 어느 쪽이 인류의 미래를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해줄까? 다시 말하지만 이건 가치 판단의 영역이다.

내가 아프리카에서 건물을 지으면서 했던 경험은 내가 서구 국가에 건물을 설계할 때 사용된다. (서구에서 항상) 해오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각도에서 설계를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보았던 것들이 내가 서구에서 건물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훨씬 더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대륙, 서로 다른 문화를 오가는 것은 단순히 주류를 따르는 대신 변화를가져올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하는 케레의 말은 그동안 서구 모더니즘 건축만 바라보고 그 안에서 스타 건축가를 찾아온 프리츠커가 케레를 통해 새로운 문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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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슐츠 씨 -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
박상현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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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성인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면 여자,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 아니냐"고 말한다. 그런데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을 가르는 기준은 다양하다.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방법이 눈으로 생식기를 확인하는 방법과 성염색체(XX,
XY)를 통해 확인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안드로젠 무감응 증후군(AIS)을 가진 사람들은 생식기의 종류와 성염색체가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AIS 외에도 다른 여러 요인들이 간성을 만들어내지만결과적으로 이 사람들은 갖고 태어난 몸‘이 사회가 생각하는 남녀 이분법으로 편리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은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아서 전 세계 인구의 1.7퍼센트에달한다. 남한의 인구보다 많고 독일 인구보다 조금 적은 숫자다.

운동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큰돈과 명예를 얻는 엘리트스포츠는 뛰어난 신체적 조건을 타고난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다.
그리고 ‘좋은 신체조건‘에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남성 호르몬도포함된다. 단, 그 선수가 여성이라면 예외다. 여성이면서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면 출전 자격이 박탈된다. 그게 캐스터 세메냐가 마주한 현실이었다. 요약하면, 남자가 여자 종목에 몰래 들어와서 경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별을 확인하는 절차를 만들었는데, 과거에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생각했던 성이 살펴볼수록 복잡해서 칼로 자르듯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연구를 해보니 외부에 드러난 생식기도 성염색체도 여성과 남성을 구분해주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육상연맹은 세메냐가 참여할 수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호르몬제를 복용해서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경기 6개월 전부터 낮추면 된다는 것이다. 이 결정이 가진 아이러니는 다른 선수들은 호르몬제를 포함한 약물을 복용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는 반면 세메냐와 같은 간성의 선수들은 오히려 약물을 복용하지 않으면 경기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학적인 근거를 이야기할 때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그렇게 도출된 결론을 보면 결국 세메냐를 비롯한 간성인을 ‘잡아내기‘ 위한 조치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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