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 미국보다, 로마 가톨릭보다 훨씬 큰 세계를 만나게 되었는데 덕분에 미국도, 가톨릭도 하나의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미국 화폐에 새겨진 문장인 ‘여럿에서 하나‘(e pluribus unum)는 그 속에 많은 사람들(유색인, 동성애자, 원주민, 가난한 민중 등)을 포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나는 끊임없이 로마 아니면 가톨릭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예수는 온 세상을 구원하는 분(요한복음 4:42) 이든지 아니면 아예 아무도 구원하지 않는 분이다. 미국은세계 모든 나라를 민주주의 방식으로 대하는 나라든지 아니면 아예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나라다. 이것이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그렇게 나를 찾아온 변화와 깨달음의 느린 과정은 ‘이것 또는 저것‘(either-or)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커다란 ‘이것도저것도‘(both-and)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많은 기도와 자기 회의, 공부그리고 대화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여정 자체가 나를 이끌어 교회에서 말하는 ‘성결함‘이 무엇인지, 미국이 말하는 ‘자유‘와 심리학이 말하는 ‘옹근 전체‘(wholeness)가 무엇인지를 깊이알 수 있게 해주었다.
폴 리꿰르가 말하는 ‘첫 번째 순진함‘은여정을 출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두 번째 순진함‘은 분노, 분열, 소외, 무시당하지 않으면서 같은 여정을 계속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나는 이제 ‘두 번째 순진함‘이야말로 성숙한 어른과 성숙한 종교의 목표라 믿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잘 늙은 사람 얼굴이 동안인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일까? 그곳이 우리 모두 가야 할경지 아닐까? 그래서 한 시인이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다"라고 말한것 아닐까?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고 무엇을 판단할 때 사용하던 나의 밝은관점이 살아오는 동안 차츰 흐려졌다. ‘우주‘(universe)라는 말 자체가 ‘한 물건을 돌려놓다‘(turn around one thing)라는 뜻이다. 내가 그 ‘한 물건‘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우주 안에 어떤 ‘큰 진실‘(Big Truth)이있든지 아니면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진실이 아예 없든지 둘 중 하나다. 이 모든 것 뒤에 어떤 패턴 (그게 ‘예외‘라는 패턴이라 하더라도!)이 있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부조리한 우주가 있게 되는 건데, 포스트모던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도마도, 마더 테레사도 가졌던 의심과 불안을 조금도 품지 않는 ‘참 신자‘들이 실은 좀 걱정스럽다. 모든 것이 그토록 분명한 사람들은 햄릿의 ‘너무 많이 저항하는‘ 여왕처럼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삶의 옹근 신비를 움켜잡는 것은 언제나 죽음과 의심의 동일한신비인 그 반대쪽 절반을 감내()하는 것이다. 무엇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그것의 여전히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는것이다.
T.S. 엘리엇이 그의 ‘사중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경험을 했지만 그 의미를 놓쳤다. 그리고 경험의 의미에 대한 접근은, 우리가 행복에 결부시킬 수 있는 의미를 넘어, 다른 형태로 경험을 재생시킨다. 엘리엇의 문장이 난해하긴 하지만 거듭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후반부 인생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미국 헌법을 지켜야한다거나 우리와 똑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단순한 의미가 이제 충분하고 그것 자체가 더 깊은 행복으로 바뀐다. 몸은 음식 없이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혼은의미 없이 살 수 없다. 나치의 대학살에서 사람들을 절망과 자살로부터 지켜줄 수 있었던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고 빅터 프랭클이 말한 것은 참으로 옳은 지적이었다. 인간은 의미를 창조하는존재다. 우리 경험 속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영성‘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일 뿐 아니라 인생의 행복 바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패러독스를 내포한 새로운 통일장이 차츰 후반부 인생의 특성을 만들어간다. 그것은 온갖 복잡함에서 배울 것을 모두 배운 뒤에다시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슬픔과 부조리를비롯해 온갖 ‘쓸데없는 것들‘이 모두 함께 그 속에 들어 있음이 눈에보일 만큼 충분히 오래 산 것이다.
후반부 인생에게는 우주가 추는 총체적 춤의 한 부분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다. 춤마당에서 누구보다 돋보이거나 더 잘 추는 모습을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그의 인생의 의미는 자기를 돋보이는 데 있지 않고 함께 참여하는 데 있다. 자기를 강하게 주장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잘 모든 일을 경영하고 계신다. 지금 여기 안에서 밝음이 솟아난다. 그 밝음 하나에 모든것이 충만하여 차고 넘친다. 춤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추지만 그것을밝게 빛내주는 무아(無我)의 자유가 함께 춤춘다. 1940년대의 부드러운피아노곡에 맞추어 늙은 두 연인이 상대방 팔에 몸을 맡기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조용하게 춤추는 장면을 그려보라. 말 그대로,춤이 저 혼자서 춤을 추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절망도 사물의 실체를 변경하거나 항상 거기에 있는 우주의춤에서 오는 기쁨을 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의(故意)로 자기 자신을 잊고, 체면 따윈 바람에 날려 보내고, 총체적인 우주의 춤판에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후반부 인생에서 우리는 모든 일, 모든 사건에 대하여 강하고 최종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건들이 우리를 기쁘게 하면 기뻐하고 슬프게 하면 슬퍼한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하여 다른 누구를 변화시키거나 조정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이전보다 더 많이 사람들을 변화시킬 위치에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느끼지 않고, 그것이 모든 것을 달리 만든다. 우리는 행위(doing)에서 존재(being)로, 유기적으로 조용하게 그리고 삼투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
당신이 ‘빛‘으로 가까이 갈수록 그만큼 당신의 그늘은 짙어질 것이다. 어쩔수 없다. 그래서 참으로 거룩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겸손한 사람들이다. ‘그늘‘을 ‘죄‘와 혼동하지만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훨씬 더 잘 섬길 수있을 것이다. 죄와 그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건좋은데, 그래서 자신의 그늘을 직면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 결과 자기도모르게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이다.
레이디 줄리안의 말이 참으로 명언이다. "먼저 추락이 있다. 그 다음에 추락으로부터의 회복이 있다. 둘 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이다."
당신이 당신의 후반부 인생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이 그것을 원치 않아서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원하고 바라는 그것을 정확하게 주신다. 그런즉, 당신은 분명하게갈망하라. 깊이 갈망하라. 당신 자신을 갈망하라. 하나님을 갈망하라. 모든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라. 모든 ‘비워냄‘(emptying out)은 오직 ‘큰 쏟아져 나옴‘(a Great Outpouring)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이 그렇듯이, 모든 공백들을 싫어하여급히 그것들을 채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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