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나는 어느 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 개는 주인의 집 근처에 접근하는 낯선 사람에게는 무조건 짖어 댔는데, 어느 날 발가벗고 침입한 도둑에게는 얌전히 굴었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입은 옷을 다 벗어던져 버려도, 각자가 상대적인 사회적 계급을 그대로 유지해 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울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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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존중할 만한가를 따지기보다는, 무엇이 세상 사람의 눈에 존중할 만한 것으로 보일까에 더 신경 쓰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보다 외투나 바지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지금 입은 옷을 벗어 허수아비에게 입혀 놓고 당신은 그 옆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라. 그러면 누구라도 허수아비를 보자마자 인사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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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돈을 내고 살 만한 값어치가 있는 바구니를 만들거나, 아니면 적어도 바구니가 가치 있는 물건이라 느끼게끔 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다른 물건을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 역시도 결이 섬세한 바구니 종류를 하나 엮어 두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이 살 만한 물건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바구니 엮는 일이 보람되다고 생각했기에, 남들이 살 가치가 있을 만한 물건으로 만드는 일을 고민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바구니 파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적이라 간주하며 칭송하는 삶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왜 우리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오직 한 종류의 삶만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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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물을 수 있다. 왜 시에 대해 굳이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냐고. 나는 지금 시를 특별대우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시가 평범해졌으면 좋겠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나 시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드물지만 그런 자리가 마련될 때가 있다. 본격적이지 않아도 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가, 당당하진 않아도 자신이 쓰고 외운 시를 사람들 앞에서 읽고 공유할 때가, 전부는 아니라도 비밀의 일부를 서로에게 드러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시가 직업이기에 앞서 하나의 독특한 언어활동, 언어적 쓸모와 경험을 확장하는 소통 양식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은 다른 모습, 조금은 경이롭고 매혹적이고 근사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시인은 없어져도 시 쓰는 사람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 안에 우리를 넘어선 존재가 숨어 있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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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요새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서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서러움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원통하고 슬프다’라는 정의가 나온다. 하지만 이 정의는 부족하다. 나는 서러움을 ‘상실감에 머물면서 그것을 만끽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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