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필리프 J. 뒤부아 외 지음, 맹슬기 옮김 / 다른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기차로 바뀌면서 도시는 한결 조용해지고 그제야 사람들은 새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새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광고는 짧은 영상으로 도시의 소음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이 되어서야 도시의, 그리고 외부의 모든 소음보다도 내 머릿속에서 쉼 없이 부대끼는 온갖 생각이 더 큰 소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거리에서 새소리를 듣지 못한 진짜 이유는, 그리고 봄날 아침마다 나를 깨우던 새끼 새들의 울음소리를 단 한 번도 기분 좋게 듣지 못한 이유는, 나를 꽉 채우고 있는 마음속 소음 때문이라는 것을.

우습게도 그동안 주변에 그렇게 많은 새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리고 어느 날은 새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새의 존재를 생생히 느낄 때마다 바깥으로만 뻗어나가던 마음과 수많은 생각이 순간 정지하더니, 초점이 내면으로 향하는 느낌이 들었다.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목적 없이 저 새를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 새도 그리고 나도 그저 이렇게 더할 나위 없이 가장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명상이 시작되었다. 이 책의 작가들이 강조한, "새는 언제나 현재를 산다"는 교훈을 경험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엔 이른 아침마다 책을 읽는다. 최선을 다해 사수하는 매일의 피크닉이다. 본격 근무가 시작되기 전에 이일과를 누려야 하루를 좋은 마음으로 보낼 수 있다. 좋은마음이란 내게 부과된 업무량에 괜히 억울함을 품지 않는상태다. 쉬지 않고 일을 하면 나는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이 된다. 그때의 내 모습은 정말 최악이다. 그러므로 눈 뜨자마자 소풍 가는 기분으로 책이랑 노트를 챙겨서 집을 나선다. 머리는 안 감는다. 동행자는 없다. 걸어서 삼십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예술의 핵심은 하나뿐인 이야기를 내어놓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러지 않으려 싸우겠다는의지를 내보이는 데 있다"고, 맥스웰은 만나보지 못한 등장인물이 되어서 그의 시선으로 본 세계를 상상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저 인물에서 이 개로, 이 개에서 저 양으로, 저 양에서 이 밭으로 시선을 옮겨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은 상실을 마주한 채로 고통받는 감정이야. 반면 애도는 슬픔을 끝내기 위한 작업이야. 언뜻 비슷한 과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애도는 슬픔의 지속이 아니라 슬픔의 종결을 위한 작업이라고 해. 상실한 사람들이 섣부른 애도를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슬픔의봉합을 거부하기 때문이야. 슬픔의 보존을 요구하기 때문이야. 이 책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에서 옮겨 적어볼게.
이제야 우리는 그들이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다. (…) 그것은 세계의 균열이었던 그 상실을 봉합할 정당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정의가 무엇인지 다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 비슷하게 끔찍한 일이 반복되지 않는 거야.
그러려면 이 사회의 무수한 재난들을 유심히 들여다봐야하잖아. 정혜윤 피디님이 들려주었던 말 기억해? 나쁜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말. 내가 겪은 이 나쁜 일을 당신은 부디 겪지 말라고 알려주는 게 바로 연대라는말. 그 말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도 말이야. 알아들을 수 있었어. 너도 마찬가지일 거야. 너는 깨진 유리조각이 담긴쓰레기봉투조차 조심해서 버리는 사람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리가 들어 있으니 조심하세요.‘
아래엔 깨진 컵의 모양이 간단히 그려져 있었지. 우리는 같이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곳에 그 봉투를 두고 왔어.
네가 붙인 경고문이 잘 보이도록 놓았어. 나도 너처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지만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었어.
너를 보며 생각했어. 윤리란 나의 다음을 상상하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버린 봉투를 야간 청소 노동자 분이 무심코 집어 들다가 조금이라도 다칠 가능성. 깨진 유리 조각이 내 손을 떠난 뒤에 벌어질 미래. 그 전까지는 제대로 상상해본 적 없어. 너는 그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비슷하게 다쳐본 적이 있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직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만 몰두할 뿐입니다. 낙심은 영적인 삶을 슬픔으로 몰아갑니다. 슬픔은 안에서부터우리를 갉아먹는 벌레입니다. 따라서 낙심은 결국 우리를궁지에 몰아넣어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비관주의에 젖은 사람은 미래를 향한 문을 닫아버립니다. 따라서 미래에 있을 새로운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비관주의에 빠지면, 문간에 바로 새로운 것이 있는 경우에도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우리 모두를 이어주는 하나의 끈,
사랑과 공통된 소속감으로 지어진방주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이 시대는 새로운 노아의 시대가될 것입니다.

... 라자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부자에게 라자로의 불행은 라자로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부자는 라자로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무관심의 심연 너머로 그를 지켜보며 "가엾어라!"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겁니다. 부자는 라자로의 상황을 알았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무관심과 우리의 생각 사이에 틈새가 생기는 궁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감정이입 없이, 즉 상대의 입장을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상황을 판단합니다.

주님이 사고하는 방법은 완전히 달라, 정반대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본질은자비입니다. 따라서 보고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은 알고 느끼면, 우리를 구하려고달려오십니다. 하느님은 기다리고만 있지 않습니다. 세계어디에서든 따뜻하고 관심 어린 즉각적인 응답을 얻으면,
그것은 곧 하느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은어디에나 계시니까요.

이렇게 선택과 모순에 직면할 때, 하느님의 뜻을 물으면 뜻밖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열립니다. 나는 이런 가능성을 ‘범람‘이라 묘사합니다. 그 새로운 가능성들이 우리 생각의 둑을 터뜨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겸손히 하느님 앞에 내려놓고 도움을 간구할 때 범람이 일어납니다. 이 단계를 영의 식별discernment of spirits‘ 이라 부릅니다. 이때 하느님에게 속한 것과 하느님의 뜻을 방해하려는 것에 대해 알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