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1 리처드 파인만 시리즈 4
리처드 파인만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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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물리학에 대해서, 그림들과 방정식들에관해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과 눈의 광채가 전달하는은 비밀스러운 농담이 아니라 물리학, 그 자체의 즐거움이었다!
이 즐거움에는 전염성이 있다. 우리는 이 전염병에 걸리는 행운을누렸다. 자, 이제 당신 차례이다. 파인만식 삶의 즐거움을 경험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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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열려있지만 곧 닫힐 참이다. 높고 육중한 한쪽 문짝이 천천히 다른 문짝 위로 떨어진다. 나는 뛰어서 틈을 통과한다.
문 너머에는 첫 번째 것과 똑같은 또 다른 문이 있다. 이 문도 닫히기 일보 직전이고, 이번에도 나는 뛰어서 통과한다. 다음 문이있고 또 다음 문이 있다. 늦지 않게 닿으려면 아주 빨리 움직여야한다. 그럼에도 나는 문이 닫히지 않은 걸 보면서 매번 내가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 그러자면 멈추지 않고 뛰어야 하고,
나는 갈수록 지쳐간다. 기운이 빠지기 시작한다. 문은 하나씩 차례로 나타나는데, 모두 똑같은 문이다. 나는 아직은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부질없다. 항상 또 다른 문이 있을 테니. (Le porte)

모든 문은 모순된 역할을 하는 이중적인 본성을 띤다. 한편으로는 장벽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출입 지점으로 기능한다. 문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나를 채근한다. 각각의문이 새로운 발견, 새로운 도전,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를 이끈다. 이탈리아어로 ‘문‘을 뜻하는 단어 ‘porta‘는 ‘가져오다‘라는 동사 ‘portare‘에서 나왔고, 다시 이 단어가 ‘sollevare‘ 즉
‘올리다‘라는 뜻을 가지기도 한다니, 그것이 "로물루스가 쟁기로 도시의 담장을 배치하며 정확히 출입문porte 이 세워질위치에 담장을 올렸기 때문이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문은비록 생명 없는 물체로 남아 있지만, 이 말의 뿌리는 강단고 역동적인 행위에 맞닿아 있다.

‘최후의 일기’(Diario ultimo- Lalla Romano)는 언어를 통한 자기표현과 자기 확인의 필연성, 경계를 넘어야 하는 필요성을 강렬하게 증언하는 내밀하고 파편적인 텍스트다. 시력이 제한된 상태에서 로마노의글쓰기는 오히려 더 정교하고 투명해진다. 절충과 짐작에 기댈지라도 그의 시각은 칼날처럼 빛을 뿜는다.
새로운 언어로 글을 쓰는 것이 일종의 실명과 비슷하다는점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글쓰기란 다름 아닌 세계를 인식하고관찰하고 시각화하는 것이니까. 이제 나도 이탈리아어로 앞을 볼 수는 있지만, 시야의 일부만 보일 뿐이다. 여전히 반쯤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고 있다. 나도 로마노처럼 불확실한손으로 글을 쓴다.
최후의 일기』는 시력의 상실이 부여하는 새로운 관점을들춰낸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내 이탈리아어의 태생적인 한계에 대해 독자들과 나 자신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런데로마노가 나를 일깨웠다.

‘잃어버린 사랑』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단어 가운데 하나는 ‘접목‘을 뜻하는 ‘innesto‘였다. 이 단편은 두 딸과 복잡한갈등 관계에 놓인 엄마가 주인공이다. 그는 한때 딸들을 버리고 떠났다 돌아온 이력이 있다. 딸에게 있는 못마땅한 기질,
딸들과 자기 사이에서 감지되는 유전적인 편차가 이 엄마의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페란테는 이렇게 적는다.

두 딸들에게서 내가 스스로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면들을확인할 때조차 나는 뭔가 틀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딸들은 그장점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나의 가장 빼어난 자질이 그 애들의 몸에서는 결국 잘못 접목된, 우스꽝스러운 흉내에 그치고 말았다는 생각에 화가 나고 창피하기도 했다.

이국에서 온 낯선 사람이 새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사회의 유익한일원으로 융화될 때, 이 인물이 체현하는 것이 곧 ‘접목‘이다.
‘접목‘은 보편적인 인간의 충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다. 우리 각자가 왜 무언가 다른 것, 조금 더 많은 것을추구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획득해나가는지 설명해준다. 우리는 사는 도시, 국적, 신체, 얼굴, 성별, 가족, 종교를바꿀 수 있다. 접목이라는 방식으로 전보다 훨씬 쉽게 우리의기원을 부인할 수 있다.
접목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억지나 가짜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접목을 겪거나 스스로에게 단행하는 사람들을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한 사회와 문명이 전진하고 발전하려면, 자양분의 원천을바꿔나가는 게 중요하다. 내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의 제언으로 쓴 너대니얼 호손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인간의 본성도 감자와 같아서 오랜 세월 한곳에 계속 심으면 땅이 메말라 번성하지 못할 터이다." 언어든 사람이든 나라든, 모든 것은 오직 타자와의 접촉, 친밀, 교류를 통해서만 새로워진다.
나는 이탈리아어가 내 언어가 아님을, 내 소유가 아니지만내가 사랑하고 사용하는 제2의 언어임을 한시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도 자문한다. 언어를 누가, 무슨 이유로소유하는가? 문제는 혈통인가? 완벽한 구사력인가? 쓸모인가? 영향인가? 애착인가? 어떤 언어에 속한다는 건 결국 무슨의미인가?

왜 이탈리아어냐고?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문을 열려고,
다르게 보려고, 나 자신을 다른 존재에 접목해보려고.

담으려는 욕구와 풀어놓으려는 욕구, 이 두 가지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소설 『끈』에서 상호작용하는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충동들이다. ‘담다‘라는 이탈리아어는 라틴어 동사
‘continere‘에서 나온 ‘contenere‘다. 이 단어에는 ‘담는다‘는 의미와 더불어 ‘억제하다, 억누르다, 제한하다, 저지하다‘ 등의의미가 있다. 영어에서도 우리의 분노, 재미, 호기심을 담거나 억누른다고 표현할 때 동사 ‘contain‘을 쓴다.
통은 그 안에 무언가가 담기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내용물이 없거나 내용물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비어있거나 차 있다는 점에서 이중의 정체성을 갖는다. 통에는 주로 소중한 것이 담긴다. 통은 우리의 비밀을 보관한다. 통은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만 가두거나 옭아맬 수도 있다. 이상적으로, 통은 혼란을 저지한다. 사물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영어의 ‘unhappiness‘와 뜻이 통하지만, 이것보다는 훨씬 강도높은 못마땅함을 나타낸다. 이 말에는 좌절, 불만족, 실망, 불쾌감이 뒤섞여 있다. 아울러 어원이 다르더라도 소리나 형태가 유사하고 주제적 연관성이 높은 특정한 이탈리아어 동사들, 가령 ‘contenere담다, 억제하다‘와 ‘contentare 만족시키다‘라든지
‘allacciare묶다’와 ‘lasciare놔두다‘ 간의 상호 근접성도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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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 서울편 1 -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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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산사 진입로와 같아서 환상적인경관을 맞으러 가기 위한 공간적·시간적 거리를 제공한다. 대문 열고 바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언덕 너머에 있다는 것은, 연극으로 치면 서막이고 음악으로 치면 잔잔하게 흐르는 전주곡 같다.
얼마 안 가 언덕마루에 오르면 길은 오른쪽으로 한 굽이 틀면서 더욱깊은 숲속으로 인도하는데 내리막길에 이르면 해묵은 느티나무 너머로홀연히 부용지와 그 너머의 장중한 규장각 2층 건물, 석축 위에 편안히올라앉은 영화당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절로 걸음을 멈추고망연히 사위를 바라보게 된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섬에는 잘생긴 소나무가 주인인 양 넓게 자리잡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영화당, 부용정, 규장각, 사정기비각 네 채의건물이 제각기 이 정원에서 자기 몫을 하면서 의젓이 자리하고 있다. 규모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고 연못에 임해 있는 방식도 다르다.
화려한 부용정은 두 다리를 물속에 담근 자세이고, 사정기비각은 멀찍이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다. 규장각 주합루 중층 누각은 언덕 위에 높이 올라앉아 이 공간의 주인이 되고, 영화당은 후원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대청마루 집으로 환하게 열려 있다. 그 절묘한 배치가 부용지의 경관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든다. 어느 것 하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공간상의 자기 지분이 있다.

즉위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 규장각)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문치(文治)를 내세운다고 장식하려는 뜻이 아니라 대체로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있게 함으로써 나를 계발하고 좋은 말을 듣게 되는 유익함이 있게끔하려는 뜻에서였을 따름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부록 정조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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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피나 바우슈는 ‘움직임의 동기‘에 주목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심이 없다. 나는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지에 관심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움직이는지보다 사람들을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 우리는 가장 눈부신 열정에 사로잡혀 움직이는 것일까. 그 해답을 우연히 강연 중에 찾은 적이 있다. 한 고등학교에서 ‘문학이 필요한 시간‘을 테마로 강연을 하면서, ‘당신을 결과와 관계없이 가장 몰입하게 하는 블리스(bliss, 내적 희열), 당신의 모든 슬픔을 잊고 몰두하게 하는 것은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글쓰기의 기쁨을이야기했고, 학생들은 만화, 농구, 노래 등의 기쁨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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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가 혁명으로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고,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이것은 정확한 사실이 반영된 서술이 아닙니다. 잃을게 쇠사슬뿐일 리가요. 잃을 것 많습니다. 온세상을 얻을수도 없어요. 하지만 이게 왜 필요한가 하면, 이 문장이 듣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그 사람을 벌떡 일어나게 만들기때문입니다. 철학이 문학화가 된 겁니다.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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