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 반성하며 물었다. 내 안의 가장 좋은 에너지는무엇인지, 내가 용기를 내어 지켜내야 할 최고의 내적 자산은무엇인지. 그것은 바로 한없는 다정다감함이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금방 깨닫고 사과할 수 있는 용기,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드는 밤이 아무리 많아도 끝내 타인에게 다정해지는 내 안의 따스함이었다. 만일 내가 분노에 사로잡혀 그 다정다감함을 잃는다면, 아무리 현란한 심리학적 지식들로 중무장해도, 나는 진정한 치유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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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장애 인권 동아리 턴투에이블은 『내 장애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의 서문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허울만 좋고 실속은 없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휠체어를 타고 수화를 사용하고 외출할 땐 흰 지팡이를 챙겨야 하지만 우리 모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한 번도 장애를 극복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극복할 생각이 없는, 허술하고 게으르고 이기적인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장애에 노련하지 않습니다. (중략) 『내 장애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는 한 번도 스스로의 장애에 노련해본 적 없는, 앞으로도 영영 스스로의 장애에 노련해질 일 없는, 평범하다 못해 허접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인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내 장애에 노련하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는 나름의 당찬 각오입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뻔뻔하고 대찬 ‘내장노사’ 정신에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련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련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이야말로 적극적 부정의 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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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대 후반의 나이가 되도록 난 한 번도 내 구체적 ‘사용가치’로 결정한 공간을 갖지 못했다. 이 나이에도 내 ‘사용가치’가 판단 기준이 되지 못하고, 추상적 ‘교환가치’에 여전히 마음이 흔들린다면 인생을 아주 잘못 산 거다. 추구하는 삶의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섬 작업실 공사의 경제학적 근거는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으로 더욱 간단히 정리했다. 후회는 ‘한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action’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inaction’로 구분해야 한다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심리학과의 닐 로스Neal J. Roese 교수는 주장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내가 한 행동, 그 단 한 가지 변인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리적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는 이야기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이 그토록 오래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이 섬의 미역창고에 작업실을 짓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할 것임이 분명하다. 반대로 섬에 작업실이 완공되어 습기와 파도, 바람 때문에 아무리 괴롭고 문제가 많이 생겨도 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합당한 이유를 얼마든지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섬에서 왜 행복한가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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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눈의 흰자위가 그토록 큰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흰자위와 대비되어 시선의 방향이 명확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통해 인간은 타인과 대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함께 보기joint-attention’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 ‘함께 보기’에 기초한다. 다른 동물들은 시선의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눈 전체가 거의 같은 색이거나 흰자위가 아주 작다. 소통이 아니라 사냥하기 위해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시선의 방향이 드러나지 않아야 사냥에 더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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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하임은 이 같은 퇴행적 행동이 일어난 이유를 ‘슈필라움’의 부재로 설명한다. 베텔하임의 용어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정을 위한 슈필라움Entscheidungsspielraum’의 부재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수용소의 삶이 수감자들을 어린아이와 같은 퇴행적 상태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때 ‘슈필라움’은 ‘심리적 여유 공간’을 뜻하지 않는다. ‘여유 공간’은 오히려 사치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격을 지킬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뜻한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수용소 생활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모든 물리적 공간이 박탈된 유대인들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할 수밖에 없는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되거나, 아니면 죽거나’ 이 두 가지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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