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고 난 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 낼 수 있는 짬이 겨우 두시간 임에도 기어이 세종문화회관으로 갔던 것은 아마 그가 “요세미티”를 찍었기 때문인 것 같다. 처음 안셀 아담스 사진전 광고를  봤을 때도 그가 요세미티를  찍은 사진가라는 데에 끌렸었다. 작품들을 보고나니 요세미티는 내 상상보다 더 울창한 삼림이었고, 육중한 나무들이었고, 고요한 호수였다. 겸손하고 웅장한 대자연으로 애들 크면 함께 캠핑 가리. 한 일주일 보내보리.


전시장 맨 앞쪽에 걸렸던 <로지폴 소나무>(1921)는 당분간 잊혀지지 않을 것같다. 아, 정말 사진이 이럴 수 있을까. 흑백인데 다채롭다니! 나무랑 호수만 있는데 로맨틱하다니! 그냥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찍은 것인데, 사진이 사람을 이렇게 꿈꾸게 할 수 있을까. 말 그대로 꿈결같은 사진. 이런 숲이라면, 최면에 취한 듯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갈밖에. 이 사진을 찍었을 때 안셀 아담스는 열아홉살이었다. 마치 사진도 열아홉인 듯, 열아홉 풋풋한 사랑을 꿈꾸는 듯, 한여름 밤 꿈같은 사진이었다. 이런 숲에서라면 첫눈에 반할 소녀라도 만나지 않을까. 분위기에 취하지 않을까, 이런 숲에서라면.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보고 있으면 온갖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하는 사진이었다.

재미있던 건, <로지폴 소나무>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안셀 아담스의 연표를 확인해보니 정말 그는 이 무렵에 요세미티에서 아내가 될 소녀를 만나게 된다는 것. 게다가 그 소녀는 요세미티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작가의 딸이었고. 우와~ 이런 게 바로 운명적인 만남. 로지폴 소나무 곁에서 처음 만나 인사했을 젊은 날의 두 사람 모습이 마음으로 그려져 흐뭇했다. (웹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과 전시장에 걸린 원본은 감동의 차원이 다르다. 돈 내고 전시장에 가는 이유를 깊이 깨달았다.)


제자인 알란 로스의 2000년 작 <계곡의 입구>를 보면서는 마치 나도 같이 걸어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진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사람들이 대체 무슨 기술을 써서 이렇게 사람을 호리나 싶었다. 작곡가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는 것처럼 사진가에게도 그런 게 있다면 안셀 아담스와 그의 제자들의 뮤즈는 아마 영원히 요세미티였던 것 같다. 함께 전시된 제자들의 작품들도 요세미티를 찍은 것이 유독 많다. 

<겨울 일출>은 심호흡 한번 하게 하는 작품이랄까. 보면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던 것 같다. 하늘을 전체의 반 이상으로, 땅은 낮게 깔리듯이 구도를 잡아 보는 이로 하여금 뭔가 세상을 찍은 것이 아니라 세상 이상의 것을 찍은 것만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보고 있으면 내가 뭔가 너무 작은 것에 아옹다옹하며 살았나보다, 하늘은 저렇게 넓은데, 하는 마음. 여유롭게 살고 싶은 소망이 무럭무럭 피어올랐었다.

1995년 작 <눈 속의 묘목>도 인상 깊었는데, 뉴멕시코의 투사스 산맥에서 이 분이 산신령 같이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이런 장면을 잡아내셨구나, 노인이 눈밭에서 삼각대 앞에 끊임없이 수백 장을 철컥철컥 찍어댔을 모습이 그려졌다. 안셀아담스는 굉장한 노력파였다던데, 온종일 암실에서 안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뭐 그러니까 이런 작품들이 나왔겠지, 싶기도 하지만, 작품들을 보면서는 이런 풍경을 담아내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그리고 암실에서 몇 번이고 다시 인화해봤을 그의 완벽주의적인 모습에 겸손한 마음이 들었다.

또다른 제자인 밥 콜브레너의 작품 중에서는 2000년작 <겨울 아침>이 좋았다. 필립 얀시가 폭설에 전기도 끊긴 이런 오두막집에서 꼼짝 않고 사나흘간 혹은 일주일간 성경통독하고 나왔을 것만 같았다. 책만 보던 지성인이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대자연 앞에 경이를 느낄만한 그런 풍광이랄까. 사람 참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겸허한 마음을 가지게 할 법한 압도적인 설경.


작품을 보면서 문득, 자연이 그 자체로 이렇게 예술이었나 아니면 찍을때만 예술이었나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대단했나, 자연이 이랬나 하는 새삼스런 생각. 늘 가보고 싶던, 요세미티를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특히나 대충 발도장 찍은 기념사진이 아니라 안셀아담스의 수준으로 찍은 사진을 감상하고 나니 오랜 갈망에 기름을 부엇다고 할까. 미국이 옆 집은 아니니 당장은 어렵겠지만, 십년 안에는 가리. 가서 한 일주일 대자연 앞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고 오리. 전시회 너무 좋았다.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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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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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가 편한 소설은 아니었다. 앨리시어라는 이국적인 이름도 그랬고, 옷차림 묘사를 보고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으나 남동생이 "형"이라고 부르는 부분에서 당황해 책 맨 앞장부터 다시 읽기도 했다. 작가 황정은씨의 또 다른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가 읽어볼만하다고들 했는데, 이렇게 깜깜한 소설이라면 그것도 별로 입에 안맞을 것 같다. 

 

앨리시어가 엄마를 "씨발년"이라고 부르면서 그 "씨발됨"의 상태를 묘사한 부분들에서는 우리말의 용언이 활용되듯 "씨발이 발아"한다거나 "씨발됨"을 묘사하는 것도 영 불편했다. 가정폭력은 언제든 편한 주제는 아니지만, 끝내 해결되지 않고, 해결의 실마리마저 안 보인채로 이야기가 끝나서 마음이 암담했다.

 

사실 결국 그런 상태의 엄마를 만든 것도 그 엄마의 부모였다. 딸을 몇 시간이고 눈밭에 옷을 벗겨 세워 벌을 준다거나 굶긴다거나 했던 유년을 겪은 엄마는 본인도 그런 부모가 되어 대를 잇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다. 현실에 당연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지만, 읽기 힘들었다. 누구에게 추천하기도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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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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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을 넘겨 시를 보고 "아아~"하고 감탄했다. 급하게 포스트 잇에 메모하고 다시 읽어보고 넘겼는데, 음. 그 시가 제일 좋았다. 끝까지 읽었지만, 제일 마음을 누르는 시였다. 시인의 또 다른 시집에 있던 시가 떠오르기도 했고. 일단 제일 좋았던 작품이므로 전문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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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의 말 

                  나희덕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관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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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꽃피우게 하지 말라는 간절한 마음이 왜 나는 반대로 들릴까. 여전히 불탈 마음의 씨앗이 남아있는 것처럼 들릴까.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까 두려워 스스로를 가두는 마음이 애처롭고 또 조심스럽다. 이미 말랐고, 가늘어질대로 가늘어진, 더 쪼개질 수 없는 시들고 지친 마음을 안아주고 보듬어줄 누군가를 만나시길. 마치 드라마 속 슬픈 여주인공 보며 마음으로 응원하듯이 바라게 되는 시. 

 

이 시를 보며 떠올렸던 시인의 다른 시가 있다. 그건 좀 밝은 시인데. 사랑 앞에 주저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비슷한 느낌이 들어 떠올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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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비 내리고 - 편지 1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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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힘드실까봐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다니. 이 무슨 어여쁜 사랑의 마음씀씀이란 말인가. 나를 너무 사랑하면 당신이 힘드실까봐 조금 덜 사랑스럽겠다는 말을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하다니. 시인의 사랑은 참, 조심하고 배려하는 사랑이란 생각.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도 좋았다. 지인의 죽음에 대해 연작시 형태로 쓴 시들도 있었는데, 찬찬히 생각해볼 여지를 주는 시들인 것 같았다. 다만 좀 1,2,3부로 나뉜 기준을 잘 모르겠고, 한 권으로 묶인 게 좀 어떤 분류인지 의아했다. 다작하는 시인이셔서 각기 다른 작품들을 다 따로 묶기에 애매했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종 독후감 대회 선정도서라서 읽었는데, 독후감 쓰기에는 어려운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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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문예중앙시선 8
안현미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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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방을 훔쳐본다는 것은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일. 안현미 시인의 초기 시집을 읽는 것은 마음 떨리게 궁금한 일이었다. 마치 최근에 발견한 한 나무가 몇 년 전에는 어땠는지, 시간이 지나 시인이 나와 함께 늙어가며 더 멋져질지 혹은 같은 진부함에 시들해질지 점쳐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지난 달에 읽은 <사랑은 어느 날 수리된다>가 참 너무 좋았는데, <곰곰>을 먼저 쓰고 그 다음이 <사랑은..>이었구나, 그렇다면 초기작보다 최근작이 더 나은, 왕성한 시인이시구나, 이 다음 시집은 더욱 좋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 한편 소개.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어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

- p.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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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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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랑 때문에 죽어버린 이 한 남자를 어쩔 것인가. 사랑이 운명이었던 것처럼 죽음도 운명이어서 그냥 맞이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까.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어떤 비평가들은 제목의 "위대한" 이란 단어가 풍자를 담았다고 한다지만, 내 보기엔 작가도 서술자 닉과 같은 시선으로 개츠비를 보고 있는 것 같다. 한 남자의 순정을, 그게 아무리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비꼬아가면서까지 우습게 만들 이유는 없을 듯. 그러므로 제목 "The Great Gatsby"의 great는 진짜 great한 걸로 두고. 

 

나로 말하면, 나는 운명같은 사랑은 믿지 않는다. 사랑의 시작은 마법같이 빠져드는 운명이었을진 몰라도 사랑의 지속은 약속과 결단과 헌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츠비가 선택한 결정들에 마음 속으로 계속 "나는 반댈쎄~아이고 이런 사랑은 정말 반댈쎄" 했다. 뭐 당연히 내 의견이야 전혀 상관없이 흘러흘러 개츠비는 "붉은 동그라미"(p.228)가 되었지만. 현실에서 이런 사랑을 보게 될까? 매우 회의적이다.

 

1920년대가 미국이 도덕적으로 가장 해이해졌을 때였다고 한다. 톰이나 데이지가 그런 부도덕한 기혼자의 전형이라면, 어쩌면 개츠비는 그와 대비되어 자신의 아내도 아니고 그냥 사랑하는 여인일 뿐인 데이지를 위해 힘겹게 삶을 가꾸고 결국은 죽음까지 불사한 캐릭터.게다가 그 여인은 딱히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진짜 이게 반전. 둘이 서로 사랑한 게 아니었어. 짝사랑의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랄까. 왠만해야 짝사랑이라고 해주지. 주는 사람은 목숨을 내던지고 줬는데 받은 사람은 귀히 여기지도 않고, 받은 사실 조차 잊은 허무하고 황당한 사랑이랄까. 데이지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야 뻔한 사실이지만, 개츠비의 사랑이 그러므로 쉽게 저평가될 수 있는 사랑일까, 하는 질문에는 망설임이 든다.

 

사랑은 돌려받아야 가치있을까. 적어도 연인 사이엔 그런 것 같다. 개츠비의 사랑에 일면 맥이 빠져버리는 이유다. 그는 상호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앞 부분을 읽으면서 좀 쉽게 안 읽힌다 싶은 마음과 줄거리가 좀 산만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인물 묘사가 좀 헛짚는 느낌, 무딘 칼로 그리는 느낌이었는데, 뒤로 갈수록 줄거리에 빠져들었다. 아마 원작의 줄거리 자체가 가진 매력 때문인 것 같다. 민음사에서 뽑아 새로 번역한 클라스의 아우라. 아무렴 그렇겠지. 옮긴 김욱동선생님은 원문에 충실하셨다고 하는데 독자로서는 다른 본을 구해 읽어보고 싶은 아쉬움이 ...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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