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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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책들의 2014년버전을 구해 읽은 것은 내게 정말 행운이었다. 스페인어를 알았다면 원전으로 읽고 싶었지만, 모르므로 --;; 한 차례만 번역된 걸로, 되도록이면 원본에 가장 가까운 본으로 읽고 싶었는데, 바라던 대로 되었다. 책을 처음 받으면서는 <롤리타>의 험버트도 미쳤고, 돈키호테도 미쳤는데, 둘째 광인에게 있는 - 있다고들 하는 - 특이함은 무엇인지 심히 궁금했다. 그리고 책을 받은 후에는 이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그냥, 처음부터 미친 분이었다는 것이 왠지 짠했다.

 

목차부터 특이하고 재미있는데, 몇가지 소개하면 이렇다.

제 1부

1. 유명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인물됨과 일상에 대하여

2. 기발한 돈키호테가 처음 고향을 떠날 때에 대하여

3. 돈키호테가 기사 서품식을 치르는 우스꽝스러운 방법에 대하여

4. 객줏집에서 나온 뒤 우리의 기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5. 우리 기사의 불행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다

6. 우리의 기발한 이달고의 서재에서 신부와 이발사가 행한 멋지고도 엄숙한 검열에 대하여

7. 우리의 착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두 번째로 집을 나서는 이야기

 

작가가 참 교활하다는 생각이 든 게 자꾸만 "우리의" 기사 운운하며 독자마저 점점 돈키호테에게 동정심을 갖게 한단 느낌이 들었다. 작가 본인이야 무어인인 척 했다가 기독교인 번역가인 척 했다가,동정했다가 풍자했다가 뭐 그럴 수 있지만 읽는 나까지 "우리" 돈키호테 어쩌나, 싶게끔 자꾸 사람을 끌어들인다. 게다가 산초. 한 백여쪽 읽다보니 산초도 제정신이 아니야,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쌍으로 미칠 수가 있는가, 어쩌면 좋아, 하고 혀를 끌끌 차며 읽었다.

 

그러나 또 읽다보면, 이 광인을 어쩌면 좋을까, 미쳤는데 자비로워, 제정신이 아닌데 정의로워. 본인이 제일 딱한데, 주제도 모르고 남들에게 한량없이 자비해. 사랑과 정의에 목마른 돈키호테 기사님.아이고 어쩌면 좋아.

 

세르반테스의 블랙유머는 어느 순간에 너무 정곡을 찌르기도 한다. 돈키호테가 스스로 미친 짓을 잠시 하겠다고 하며 - 그는 이미 미쳤는데, - 미친 짓을 말리는 산초에게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산초가 말했다. "그런 짓을 한 기사들은요, 그런 바보짓이나 고행을 할 이유가 있었거나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나리께서는 일부러 그렇게 미쳐야 할 이유가 있나요? " (중략)

"바로 그거야." 돈키호테는 대답했다. "그게 내 일의 절묘한 점이네. 편력기사가 이유가 있어서 미친다면 감사할 일이 뭐가 있겠나. 핵심은 아무런 이유도 없는 데 미치는 데 있는 거야.   - pp. 355,356 <돈키호테 1>, 열린책들   

 

제정신과 제정신 아닌 상태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과 대화는 세르반테스가 정말 천재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사실 1605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는데 우리나라와 직접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아무튼 우리 소설가라면 김만중이나 박지원도 모두 1700년대 이후의 분들이고. 찾아보니 같은 시대에 영국에 또다른 천재 세익스피어가 살고 있긴 했네.

 

아무튼 이 희대의 이야기꾼, 의뭉스런 천재, 풍자와 해학이 줄줄 넘쳐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1>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다. 내가 요즘 읽는 책들마다 너무 소장가치가 있는 책들이라 집이 안정되면 사서 가지고 있고 싶다고 푸념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만약에 <부활>과 <돈키호테> 중에서 고르라면 난 당연히 돈키호테!

 

사실 중간에 돈키호테의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이야기들이 단편처럼 끼어들기도 한다. 어느 가방에 한 이야기 책이 있어서 돈키호테 일행이 발견하고는 이 소리내 읽는다든지 하는 형식인데, 이 끼어든 이야기들이 또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다. 카르데니오나 도로테아의 이야기, 당치도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의 이야기 같은 것은 거의 단편으로 읽어도 정말 손색이 없었고, 꼭 세익스피어의 소설들을 읽는 것만 같은 매력이 있었다.

 

 

 

 

사족

1.나는 고양시 삼송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책값이 궁금해서 알라딘에서 이 책을 검색해보았다. 781쪽까지 있는 양장본이기에 사오만원하겠구나 했는데 웬걸 ! 만오천팔백원이라니! 단돈 만오천팔백원이라니! 이런 책을 어떻게 그런 헐값에 판매한단말인지.

2. 도서관에서 통합 검색하면 돈키호테가 엄청 많이 나오는데, 쪽수가 이십몇쪽, 어떤 건 칠십 몇쪽, 어떤 건 백여쪽 이렇다. 어떻게 줄였길래 칠백팔십쪽 짜리를 그렇게 줄이지? 매우 궁금.

3. 안영옥 교수님. 이 책의 번역자이시다. 정말 번역이 이렇게 찰진 책은 드물 것 같다. 만연체를 어쩌면 이렇게 맛깔나게 옮겨놓으셨을까? 정말 최고의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계속 이런 멋진 책들이 나오면, 나는 정말, 열심히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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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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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가 독서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은 책. 주로 1910~30년대 사이에 쓴 단편들이 많다. 거의 백년쯤 전의 글인데 그렇게 옛날 책인지 정말 모르겠다. 나는 독일 문학에 대해 잘 모르지만 - 모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당대 문학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거나 혹은 비평가들을 작가 입장에서 또한번 비평하는 근거, 예시들이 너무 세련되어서 이게 대체 어떻게 백년 전의 글이지, 하고 아리송. 현대의 신랄한 작가가 쓴 글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내용이다. (아, 번역이 뛰어난건가.--;;)

 

표지에 세로로 쓰인 글이 예사롭지 않아 우선 일부를 인용한다. 

p.10-12, <독서의 기술, 독서에 대하여1>

잘못된 독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부당하다. 무가치한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에게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그러니 금방 잊어버릴 게 뻔한 일에 시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며, 일절 도움도 안되고 소화해내지도 못할 온갖 글들로 뇌를 혹사하는 짓 아닌가? ...(중략) 인생은 짧고, 저 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의 수준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다. 삶의 한 걸음 한 호흡마다 그러하듯, 우리는 독서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더 풍성한 힘을 얻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 ...(중략)... 우리가 책으로 향할 때는, 겁에 질린 학생이 호랑이 선생님께 불려가듯 백수건달이 술병을 잡듯 해서는 안될 것이며, 마치 알프스를 오르는 산악인의 또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병기고 안으로 들어설 때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리라. 살 의지를 상실한 도망자로서가 아니라, 굳은 의지를 품고 친구와 조력자들에게 나아가듯이 말이다

 

오호.. 정말 맞는 말씀. 잘못된 독서가 자신에게 부당하다는 말은 정말 공감한다. 얼마전 이 책을 권한 친구가 읽을 책 고를 때 쓰레기같은 책 고르지 말고 정말 좋은 책 골라 읽으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 좋은 음식을 먹음으로 영혼을 건강하게 살찌우려는 마음이랄까.

 

그렇지만 "우리가 책으로 향할 때는" 부터는 종종 "백수건달이 술병을 잡듯"이 시집을 집어들었던 내 모습이 생각나 민망. 고등학생 시절 공부하기 싫어서 집어들었던 온갖 시집들. 뭐 아무튼 시가 피난처였던 시절이 있기에. 또 지금도 마음이 메마를 때 여전히 시나 소설로 도망가는 버릇이 남아 있기에 왠지 민망하다. 책 열심히 읽고 공부하라고 선생님이 당부하셨는데 몰래 엉뚱한 책 읽다가 들킨 느낌이랄까. 고등학생 때 윤리 시간에 윤리 책에 <토지> 끼워 읽다가 딱 걸렸을 때 기분. (나도 나름 착한 학생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딴 짓하다가 그렇게 걸렸던 게 처음이어서 아직도 그 때 놀란 기분이 생각남--;;)

 

알프스에 오르는 산악인처럼, 무기를 잡는 군인처럼 책을 읽으라니. 이쯤되면 헤르만헤세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정약용의 독일버전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너무 맞는 말씀만 하셔서 네네 그렇죠, 제가 좋은 책을 읽어야죠, 하다가도 그래도 불량식품도 한번씩 먹고 싶은데요, 하고 오히려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든달까. 

 

헤르만헤세가 항상 좋은 책만 읽었을지는 알수 없으나 그가 딱딱한 인문서적만을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도 문학에 빠졌던 사람, 그도 시를 사랑한 사람. 당연하지! 시인인데!

p.23,<독서의 기술, 책의 마력> 

왜냐하면 나 자신이 '책 읽는 이'로서, 어린 시절부터 책에 홀린 사람 중 하나로서, 작은 새 소리에 홀려 온 세상을 돌아다닌 하이스터바흐의 수도승처럼 넓은 책 세상의 온갖 신전과 미로, 동굴과 바다를 헤매면서도 이 세상이 좁아짐을 느끼지 못한 채 수백년 세월을 마냥 떠돌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독서가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분명 있었음을 발견하고 속으로 기뻐했다. 그렇죠, 선생님? 지식을 가르치는 책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시도, 소설도 정말 황홀하게 아름답곤 하다는 것에 정말 동의하시는 거죠?  

p. 45,<독서의 기술, 애독서>

그러나 중국에 너무나 멋진 문학이 존재하고 중국 특유의 인간관과 정신세계가 있어서, 그것이 내게 정말 귀하고 소중하다 못해 정신적인 피난처요 제 2의 고향이 될 줄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짐작도 못했던 바다. 

 

백년전 독일 책벌레 헤르만 헤세와 조선후기의 책벌레인 정약용, 현대를 사는 중국 책벌레 장 샤오위안까지 겹쳐지면서 왠지 마음이 흐뭇해진다.  책벌레들의 롤모델을 보는 느낌이랄까. 읽고 쓰는 삶. 내가 꿈꾸는 한가로우면서 치열한 삶. 읽으면서 중간에 제일 의미심장하게 읽었던 부분은 "젊은 작가들에게 띄우는 편지"였다. 잊지 않고 싶어서 어제는 다이어리에도 옮겨적어 놨다.

p.57, <독서의 기술, 젊은 작가들에게 띄우는 편지>

젊은 사람의 재능을 판단한다는 게 생각처럼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당신을 제대로 모르는 만큼, 당신이 발전과정상 어느 단계에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지금 당신의 시에 보이는 미숙함이 몇 달 안에 자취를 감출 수도 있고 아니면 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십대 때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시를 쓰다가도, 나이 서른이 되어서 그런 작품을 전혀 못 내거나 똑같은 타령만 되풀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서른, 마흔 살이 되어서야 비로서 재능이 꽃피는 경우도 있지요.

 

나는, 책을 다양하게 읽고 싶고, 깊이 있게 읽고 싶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게 잘 쓰고 싶다. 내게 주는 백년 전 위대한 지성의 잔잔한 조언,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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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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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연암. 동시대의 위대한 두 사람을 라이벌처럼 비교하며 쓴 평전. 한동안 다산에 빠져 관련된 책들을 읽어오던 터라 이 책도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다산과 형제들, 연암과 친구들은 읽으면 읽을 수록 더 읽을만한 것들이 샘솟아 읽다가 여러번 무릎을 쳤다.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등 두 사람의 친구들이 겹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다산과 연암은 서로 별 인연이 없었다니.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뒷쪽으로 가면 갈수록 연암에게 매력을 느꼈다면 그건 고미숙선생님의 시각에 영향을 받은 걸까.(모든 텍스트는 굴절된다고 본인이 스스로 책의 앞부분에서 인정하심) 오래 전 열하일기도 읽었었고, 고미숙선생님의 전작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도 읽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연암의 이런 호방하고 멋진 남자 같은 매력을 전에는 몰랐을까.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 이후로 나는 계속 다산만 우러러본 듯. 완전 멋져, 정말 멋져! 이러다가 문득 다산의 다른 모습들 - 세심하다 못해 지나치게 꼼꼼해서 고선생님의 표현대로 쪼잔하기까지 한- 을 보니 아 내 눈에 콩깍지가 덮였었나 싶기까지 하다. 다산같은 분이 아버지이거나 선생님이라면 숨막혔을듯.

 

반면에 그냥 호쾌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연암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했다. 이런 모습에 난 정말 혹하고 만다. 맏누님의 묘비명인데, 정말 아름답고 슬프다. 이런 글을 쓰는 남자라니. 아.. 멋져.

 

P. 365,<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쪽 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묘지명 331)

 

산과 강물, 새벽달이 온통 누나로 보인다. 누님에 대한 그리움이 천지를 뒤덮은 것이다. 이 남동생의 눈엔 눈물이 그렁거렸으리라.

 

우리말이 아닌 한문으로 쓴 글이 어쩌면 이럴까. 이런 정서가 대체 중년 남성의 글에서 나올수 있는 건가.

 

아무튼 책이 전체적으로 한자가 난무하고 빨리 읽을 수 없으며 이게 무슨 말인가 다시 생각해봐야 하긴 한데, 그래도 관심있는 분께는 추천할만한 책이다. 두 별을 비교하다니 일단 발상이 특이하고, 모은 자료가 너무 구체적이고 좋다. 둘의 글쓰기를 비교한 부분이 책 내용의 전반적인 요약이 될수 있을 것같아 옮겨 본다.

 

P. 408,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다산)그의 박람강기는 중앙집중적이고, 일방향적이다. 서간집에서 잘 보여 주듯이, 타자의 목소리들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지식과 삶, 주체와 객체, 안과 바깥의 경계 또한 선명하다. 따라서 그의 저술에선 박학에의 열정과 이상을 향한 파토스만이 메아리친다. 다산선생이 지닌 '고독한 거인'이라는 이미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에 비하면  연암의 글쓰기는 쌍방향적이고 다중네트워크다. 연암은 늘 누군가와 함께였다. 그의 소품류 에세이들은 대부분 누구의 서문이거나 누구에게 주는 편지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문장이 만남과 대화, 사건과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실 연암의 글쓰기 수준이나 다산의 학문적 경지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따라갈 수가 없다. 차원이 다른 요즘 말 그대로 '넘사벽'이랄까. 그럼에도 끌리고 닮고 싶고, 읽고 싶은 마음은 숨기기 어렵다. 연암도 42세 때 연암협으로 가서 살면서 동네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는데. 고미숙선생님은 이걸 보고 "지성은 그 자체로 움직이는 학교"라고 했다. (p.57) 지성은 그 자체로 움직이는 학교! 아. 바라기는 내 인생도 그러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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