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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항 ㅣ 문학동네 시인선 20
안도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
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
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에 대하여
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어던 기억에 대하여
(중략)
당신한테서 해마다 주렁주렁 물방울 아가들이 열렸다 했네
누군가 물방울에 동그랗게 새겼을 잇자국을 떠올리며
미어지는 것을 내려놓느라 한동안 아팠네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있으므로
기차 소리처럼 밀려오는 저녁 어스름 견뎌야 하네
- p.14<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일부
제목이 아니었다면 누가 알았을까.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이라고 할 때 당신이 사과나무 인것을. 안도현 시인은 너무 유명한 분이어서 이런 여리고 아픈 감성은 그 분께 안 어울리지만. (그러나 가난한 시인만 아름다운 시를 쓴다고 누가 장담할까. 이런 시를 썼으므로 이름이 난 것이고, 또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짝이는 시적 감성이 있는 것은 참 감사할 일.)
시집 한 권을 읽으면 (나의 경우) 서너 편이 감동적인 경우가 많다. 시인이 간신히 간신히 써낸 한 권에서 겨우 몇 편이라니.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몇 편 때문에 소장가치가 있기도 하다. 안도현 시인의 감성은 여전히도 물방울같이 칼날같이 살아있어서 한 권을 다 읽고 덮으면
"아, 역시 시인은 시인"하게 되는 듯. 고민하고 고뇌한 흔적 한권을 호로록 읽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려놓기에는 시인이 보냈을 불면의 밤이 미안하다. 시인에게 시가 힘들다는 건 직장인에게 직장생활이 힘들고, 엄마에겐 엄마 노릇이 힘든 것과 똑같이 인생의 아이러니한 진실.
내 사랑은 짝새의 눈알만큼이나 반짝이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내 사랑은 또한 짝새가 날아가는 공중의 높이만큼 날개 아래 파닥거리는, 사무치게 떨리는 귀한 것이었다.
(중략)
눈썹이 하얗게 센 뒤에 펜을 잡고 한 줄을 쓰고, 열두 밤을 지나 그다음 문장으로 건너간다고 해도
-p.75,<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일부
참,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웅장한 시가 있어 마지막으로 한 편 더.
저 속수무책, 속수무책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필시 뒤에서 물줄기를 훈련시키는 누군가의 손이 있지 않고서야 벼랑을 저렇게 뛰어내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오 물방울들의 연병장이 있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없소
저 강성해진 물줄기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고 싶은 게 어찌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소 채찍을 허공으로 치켜드는 순간, 채찍 끝에 닿은 하늘이 쩍 갈라지며 적어도 구천 마리의 말이 푸른 비명을 내지르며 폭포 아래로 몰려올 것 같소
그중 제일 앞선 한 마리 말의 등에 올라타면 팔천구백구십 마리 말의 갈기가 곤두서고, 허벅지에 핏줄이 불거지고, 엉덩이 근육이 꿈틀거리고, 급기야 앞발을 쳐들고 뒷발을 박차며 말들은 상승할 것이오 나는 그들을 몰고 내변산 골짜기를 폭우처럼 자욱하게 빠져나가는 중이오
삶은 그리하여 기나긴 비명이 되는 것이오 저물 무렵 말발굽 소리가 서해에 닿을 것이니 나는 비명을 한 올 한 올 풀어 늘어뜨린 뒤에 뜨거운 노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려 주름을 지우고 수평선 위에 걸쳐놓을 것이오 그때 천지간에 북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내기를 해도 좋소 나는 기꺼이 하늘에 걸어둔 하현달을 걸겠소
-p25 <직소폭포> 전문
아, 이런 숨막히게 호령하는 남성적인 시의 화자. 눈앞에 그려지고 말 울음 소리라도 들릴 듯한 생생한 이런 묘사. 안도현 시인의 감성이 여리다고 누가 말할까. 구천마리의 말을 추상같이 호령하며 달려들 것만 같은 시. 이런 시가 교과서에 실려야지,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