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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ㅣ 문예중앙시선 8
안현미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시인의 방을 훔쳐본다는 것은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일. 안현미 시인의 초기 시집을 읽는 것은 마음 떨리게 궁금한 일이었다. 마치 최근에 발견한 한 나무가 몇 년 전에는 어땠는지, 시간이 지나 시인이 나와 함께 늙어가며 더 멋져질지 혹은 같은 진부함에 시들해질지 점쳐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지난 달에 읽은 <사랑은 어느 날 수리된다>가 참 너무 좋았는데, <곰곰>을 먼저 쓰고 그 다음이 <사랑은..>이었구나, 그렇다면 초기작보다 최근작이 더 나은, 왕성한 시인이시구나, 이 다음 시집은 더욱 좋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 한편 소개.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어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
- p.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