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엘리자베스타운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고를 때의 내 감정을 추이해보면, 편안하게 뭐 하나 볼까? 혹은 낭만적이면서도 밝게 그리는 사랑 이야기 하나 엿볼까? 아니면 이 배우,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나오나 한번 볼까? 그 정도다. 이 영화는 셋 모두의 조건에 걸려든 영화다. 올랜드 블룸의 미모?에 보고 싶은 생각이 먼저 일었고 대략의 이야기를 보니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일 거란 생각에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기도 했다. 어~ 그런데 초반부터 이 영화 나레이션이 좀 많다. 그러면서 대사에 잔뜩 집중해야했다. 제리 맥과이어를 만든 감독이라는데 눈물과 감동과 기쁨을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실패, 아니 참패에서부터 한 남자 드류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오래곤주에서 좀 잘 나가보려는 주인공은 자신이 시도한 신발디자인의 참패로 회사를 그만두고 자살을 기도한다. 사랑하던 여인과의 관계도 흐지부지해진다. 자살을 기도하는 장면이 웃긴다. 헬스기구를 이용하는데 기발하다. 그 때 마침 셀폰이 심하게 울리고 드류의 인생은 죽음의 목전에서 삶의 희망을 향해 자신도 모르는 방향으로 무작정 달려간다.

비행기에서 내려 자동차를 운전하고 켄터키주의 엘리자베스타운으로 가는 길이 정겹게 펼쳐진다. 길, 이정표, 나무들, 거리의 아이들, 이웃들, 아버지 미치 베일러의 죽음을 애도하는 문구들.. 작은 마을 전체가 아담하고 정스럽다. 여기서부터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메리칸 항공 스튜어디스(커스틴 던스트 분)다. 밝고 힘찬 기운이 자연스레 온 몸에 배여있고 늘상 경쾌한 그녀를 따라 다니며 드류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매력에 빠져든다.



흔히,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반대쪽에 있는 것을 건드리는 화법은 아주 설득력이 있다. 이 영화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과 에너지를 이야기하는데 그 도구로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을 쓰고 있다. 그 과정에서 드류는 많은 사람들의 진심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어머니(수잔 새런든 분)의 분출하는 정력에 매혹을 느낀다. 어머니에게 품는 아들로서의 고마움 정도가 아니라 한 인간이 한 인간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 같은 것이다. 그렇게 그 어머니는 사랑스러웠다.



다소 진부하게 흘러가던 영화에 잠이 확 달아날 정도로 기운을 불어넣어준 장면은 아버지의 추도식이다. 우리네 장례문화와 비교되면서 특이한 간접경험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볼룸에서 많은 지인들을 모아놓고 성대하고 밝고 화려하게 벌이는 추도식. 먼저 지인들이 한 명씩 무대로 올라와 고인에 대한 추억 한 자락씩을 풀어놓는다. 고인은, 추억하건데, 아름답고 멋진 친구이자 동료이며, 어느 여인에게는  첫사랑이었다.



마지막으로 미망인이 올라온다. 검정색 수트를 입은 수잔 새런든의 허리가 잘록하다. 큰 눈을 굴리며 다소 불안정하게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쿄의 한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멋진 장교복을 입고 있었다고. 그 때 둘은 모두 약혼을 한 상태였다고, 그 후 어느 순간 둘은 사랑하고 있었다고. 홀몸이 된 후 달라진 것은, 죽은 남편친구의 거시기도 안면을 바꾸더라고... 이 대사에서 하객들은 모두 넘어가고 자빠진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그동안 왜 이렇게 웃지 않고 살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며 그래서 좀더 많이 웃기 위해 개그학원에 등록했다. 유기농요리를 배우고 자동차수리하는 걸 배우고 탭댄스 학원에도 다니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변기도 처음으로 손수 고쳐보았다고. 아, 멋지다, 이 여인! 시종일관 무대를 누비며 털어놓는 그녀의 이야기에는 따뜻한 유머가 담겨있고 구질구질하지 않고 자신감에 찬 삶에 대한 애정이 엿보인다. 자신은 구태의연하게 살면서 남을 조롱하는 일에는 서슴치 않는 세상 사람들을 살짝 꼬집고도 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이곳 사람들의 의식에도 강타를 하는 셈이다. 연로한 몇몇 분들의 그 난감해하는 표정이란 ^^



수잔 새런든의 진짜 감동적인 연기는 지금부터다. 마지막 그녀의 말, "당신, 사랑해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어요. 달빛이 빛나던 밤이면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곤 했죠."  무대 뒤에선 Moon River가 달빛처럼 교교히 흘러나오고 그녀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율동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탭댄스를 곁들여 음악에 도취되어 움직이는 그녀의 팔다리와 허리 그리고 금발의 긴 단발머리가 달빛 같은 조명을 받아 어찌 아름다운지. 모두들 기립 박수를 보내고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들 드류와 딸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 가슴도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점점 벅차올랐다.



<아버지의 유골을 뿌리면서 여행을 하는 드류>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역시 로맨틱 코미디의 결말답게 해피앤딩이다. 조금 다르다면 드류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그 스튜어디스의 제안으로 대륙횡단 자동차 여행을 하며 바람처럼 물처럼 풍광 속에서 자신을 바로 세운다는 점이다. 참패라고 여겼던 일이 재기의 기회로 다가오고 강물을 거슬러오르는 연어떼처럼 그들의 사랑도 '목적은 생식이다. 하지만 그 열매는 생명이다'~ 호~ 마지막 나레이션까지 괜찮았다. 고향과 가족의 의미가 남녀의 사랑보다 진하다. 이야기의 방식, 그 방식의 미덕을 얻을 수 있는 영화다.



덧붙이는 말 : 이 영화, 음악을 빼놓을 수 없는데 빠뜨려서 추가해요. 컨트리풍 같기도 하고 이지 리스닝 같기도 한 음악이 내내 흘러나오는데 길위의 풍광과 어울렸어요. 귀도 즐거웠구요.. 주로 엘튼존의 노래라고 하더군요.  다 보고 나서 알았어요. 추도식에서의 노래는 Free Bird 였구요. 시끄러운 락밴드의 가락에 맞춰 특별히 만든 하얀 새의 날개에 불을 붙여 공중을 날아가게 하며 하객들의 머리 위를 스쳐가게 하는  이벤트도 참 독특했어요. ^^  여기서 실내에 불이 나는데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특별함으로 받아들이죠. 스프링쿨러에서 쏟아져내리는 물을 흠뻑 받으며 딸(드류의 여동생)은 무척이나 행복해합니다. 새사람이 되는 세례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유쾌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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