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친정에 가려던 계획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좀 심통이 나 있는데 남편이 나가자고 했다. 마침 오전 내내 세차게 내리던 비도 잠깐 멈춘 상태라서 얼른 따라나섰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이다. 녹우당은 원래 윤씨 종가의 사랑채 이름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지금은 윤씨 종가 전체를 부르는 명칭이 되어버렸다. 

해남 윤씨가 500년 이상 부를 유지하고 명문가가 될 수 있었던 시초는 윤선도의 고조할아버지 어초은 윤효정이 갑부집 딸을 아내로 만난 덕이었다. 원래 삼산면은 해남 정씨 소유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재산을 큰아들에게 상속하는 집안도 있고 아들딸 구분 없이 나누어주는 집안도 있었는데 해남 정씨 집안은 시집간 딸에게 삼산면의 땅을 아낌없이 상속해준 것이다.  

하지만 해남 윤씨는 대대로 장자 상속을 해서 재산을 늘렸고, 부가 해남 정씨에서 해남 윤씨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하니 해남 정씨의 후손들은 좀 억울할 것 같다. 보잘것없던 해남 윤씨 집안은 이 재력을 바탕으로 대단한 인물들을 배출하기 시작했으니 우리가 잘 아는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가 바로 그들이다. 윤선도는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대를 잇기 위해 여덟 살 때 큰집으로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


주차장에 내리니 아이들이 뒤쪽에 있는 연못으로 달려갔다. 늘씬한 소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연못 안에는 연꽃이 소담스러운 흰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이곳은 집터를 잡은 윤씨 집안이 화기를 누르기 위해 일부러 조성한 연못이라고 한다. 연꽃 덕분에 동네 이름도 연동이 되었다.

멀리 덕음산 아래 녹우당이 보인다. 풍수지리는 잘 모르나 뒤에 산이 있고 앞에 물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보인다. 슬슬 올라가는데 멈추었던 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바람에 오른쪽에 보이는 유물전시관으로 달려갔다.


전시관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풍경이다. 층층이 쌓여 있는 책들이 해남 윤씨를 명문가로 이끈 비결이 아닌가 싶다.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가 바로 공재 윤두서다. 옆 동네 강진 다산초당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용이 학문을 일구는 데도 이 외가의 장서들이 밑바탕을 이루었다고 한다.  


전시관에는 윤선도와 윤두서를 비롯 윤씨 집안의 진품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국보로 지정된 윤두서의 자화상을 비롯한 그림들은 모두 복제품이었다. 현재 주자창 바로 위에 제법 큰 규모의 새로운 유물 전시관을 짓고 있었는데 거기서는 진품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녹우당 앞에 서 있는 500년 된 은행나무.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간 일을 기념해서 어초은이 심은 나무라고 한다. 녹우당 뒤편에 붙어 있는 안채는 사생활을 위해 공개하지 않는 듯했다. 

녹우당은 효종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이다. 당시 수원에 있던 집을 윤선도가 82세 되던 해에 해체해서 배로 실어온 후 원래 사랑채를 없애고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녹우당은 집이 앞으로 기우는 바람에 5년 전에 완전히 해체해서 지반을 튼튼히 한 후 새로 지었다는데 해체해서 그대로 복원할 수 있는 한옥 기술이 대단하다 싶다.  


녹우당 현판이다. 집 뒤의 대나무숲에 바람이 스치면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려서 녹우(綠雨)라는 이름을 지었다 하니 윤선도의 문학성이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현판 글씨는 공재 윤두서의 친구이자 성호 이익의 이복 형이었던 이서가 썼다고 한다. 옥동 이서는 원교 이광사가 완성한 동국진체의 원조로 불리는 사람이다.


녹우당으로 들어서서 기웃대는데 방안에서 어르신 한 분이 나오셨다. 30대 초반부터 종가를 지키는 윤선도의 14대 종손 윤형식 할아버지다. 마루에 걸터앉아 녹우당에 얽힌 이야기, 윤씨 종가를 지키며 살아온 이야기, 후손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행운을 누렸다.   

윤선도의 후손들은 벼슬에 연연하지 말라는 고산의 유언에 따라 정치보다는 문학과 예술에 두각을 내타낸 분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도 대법원장을 지낸 윤관을 비롯해 정계보다는 법조계에 인물이 많은데 조상의 말을 듣지 않은 그의 부친은 자유당 시절 정치를 하느라 재산을 많이 축냈다고.   


며느리가 마흔이 되어 얻은 손자가 이제 다섯살이어서 절손의 위기를 면했다는 이야기까지 자랑이 끝없이 이어지는 걸 보니 영락없는 보통 할아버지였다. 현재 중학교 2학년인 손녀딸이 그린 할아버지의 초상화와 초등학교 2학년 때 낸 시집을 보여주며 자랑하셨다.


이중으로 된 지붕 구조가 특이해서 할아버지께 여쭤보았더니 차양 역할을 하기 위한 구조라고 한다. 차양 지붕을 세우기 위한 기둥 때문에 정원 감상을 하는 데도 방해가 되고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후손들이 20대에 걸쳐 살면서 내내 중건하고 보수한 때문인지 500년 된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덧대어진 양철 차양이나 한옥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가로등 같은 것도 자꾸만 눈에 거슬렸고...

고산 사당. 대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개망초를 비롯한 풀이 우거져 있었다. 수백 명의 하인과 소작인을 거느리고 살던 500년의 영화가 모두 덧없어 보인다.

사당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어초은의 묘소가 나온다. 주변이 온통 적송으로 둘러싸여 있어 기품은 있어 보였지만 갑부 집안의 묘소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숲 올라가는 길. 이 비자나무숲은 윤씨 집안의 부를 일군 윤효정이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말을 남기자 후손들이 열심히 나무를 심어 보호한 덕에 이렇게 무성한 숲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비자나무숲에 들어서면서 다시 비가 조금씩 내렸는데 이곳에도 초록색 비(綠雨)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비자나무숲에서 내려와 추원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채 담 안에 윤선도가 <오우가>에서 칭송한 다섯의 벗 중 대나무숲이 보인다.


추원당은 1935년에 지은 건물로 후손들이 문중 회의를 하면서 숙식을 하던 곳이란다. 꽉 닫혀 있는 방문이 일 년에 몇 번이나 열릴까 궁금해진다. 삐져서 누워 있는 딸내미. 비자나무숲에 올라가기 싫다고 하는 걸 억지로 데려간 결과다.


다시 녹우당으로 내려가는 길. 카메라를 남편이 들고 다닌 덕분에 내가 계속 사진에 찍혔다. 우리 모자가 등지고 있는 쪽에는 현재 살고 계신 할아버지가 만들어놓은 녹차밭이 있었는데 정원도 숲도 너무 우거져 있어서 좀 답답해 보였다. 가을에 다시 찾아가 반쯤 비워놓은 여백의 녹우당을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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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9-07-1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의 할머니가 해남 윤씨로 20세기초에 신교육도 받은 여성이었다는데, 바람기많은 한량 부자인 할아버지가 '해남 윤씨'라는 타이틀을 원해서 시집왔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첩을 여럿 둔데다가, 본인 소생의 아들은 하나만 남기고 다 일찍 죽어서 맘고생하셨을텐데도 꼿꼿한 여장부였다고 들었는데, 해남 윤씨의 자부심이란 대단했던 거 같습니다.

소나무집 2009-08-27 11:37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이젠 유학까지 다녀온 장손을 해남으로 내려오게 해서 종손집을 지키게 할 예정이라고 하셨어요.

나그네 2012-12-3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녹우당은 해남윤씨종가가 아니라 해남윤씨어초은파 종가입니다.
해남윤씨 8계파중 막내계파 종손이 사는 집을 해남윤씨종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위글을 수정해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