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학창 시절 수학을 아주 못한 것도 아닌데 수학을 떠올리면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다. 골치 아프고 복잡하다는 생각부터 떠오르니 딸아이가 수학 문제를 물어 올 때가 제일 겁이 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학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죽어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 한 사람이 나의 생각을 바꿔놓는 일이 생겼다.

비 오는 일요일 아이들과 함께 볼 영화를 고르던 중 눈에 띄어서 보게 된 <박사를 사랑한 수식>. 영화를 보는 내내 밖에서 내리던 봄비만큼이나 촉촉하고 참으로 행복했다. 영화를 보자마자 언젠가 사놓은 원작 소설을 꺼내 읽으면서 그동안 수학에 대해 품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하나하나 깨져갔다. 내게도 수학의 세계가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영화 속 영상이 따라다녔다. 책을 먼저 읽었어야 했는데...  이 책은 제목에 '수식'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지만 절대 수학에 관한 소설이 아니다. 수학을 소재로 한 인간과 사랑에 관한 아주 끈적끈적한 소설이다. 지금 우리는 순수한 사랑을 찾기가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솔직히 나부터도... 하지만 교통 사고로 기억 장애를 가진 예순네 살의 수학 박사를 통해 순수한 사랑을 확인하면서 내 가슴속에서 사랑이 솟구쳐오르는 걸 느꼈다.  

이 책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나온다. 시동생을 사랑하는 형수의 사랑. 그리고 가정부 모자와 박사의 사랑. 유일하게 박사의 기억 속에 사랑하는 여인으로 남은 형수는 주변에서 맴돌기만 한다. 옛날에는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모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라고나 할까? 하지만 가정부와 루트는 박사와 매일 새로운 만남을 하면서 우정을 쌓아간다. 엄마와 아들이 80분짜리 기억력을 가진 박사의 현재를 인정하고 상처를 안 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스럽다. 

박사는 사람을 만날 때나 사물을 인식하는 것도 모두 숫자를 통한다. 매일 가정부와의 만남이 첫 만남인 박사는 아침마다 똑같은 질문을 한다. "자네, 신발 사이즈가 몇이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미혼모가 된 가정부에겐 박사와의 만남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너무나 평범한 신발 사이즈 24가 깨끗한 수가 되고, 전화번호가 소수의 갯수가 되고, 가정부의 생일(2월 20일)과 박사의 시계에 쓰인 숫자(284)가 신이 운명적으로 묶어놓았다는 우애수가 된다.  

그 때문일까? 박사는 죽을 때까지 가정부 모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결국 가정부의 아들 루트는 수학 선생님이 된다. 형수와 박사의 사랑이 불완전하고 모호했다면 가정부 모자와 박사의 사랑은 소수처럼 깨끗하고 완전해서 모든 걸 0으로 만들었다. 소설 속에서는 이것을 오일러의 공식으로 설명한다. 무작정 외우기만 한 수학 공식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풀어 설명할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열 살짜리 루트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박사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수학 문제 읽는 소리를 시처럼 듣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박사의 모습을 보며 '수학은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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