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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랏빛 양산이 날아오를 때 ㅣ 창비아동문고 240
알키 지 지음, 정혜용 옮김, 정지혜 그림 / 창비 / 2008년 4월
평점 :
할머니가 된 레프티가 컴퓨터 게임만 좋아하는 외손자들에게 옛날 자신의 형제들과 보낸 여름 이야기를 들려준다. 1940년대 2차 대전 무렵 그리스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70~80년대 우리 나라 이야기와 아주 비슷했다.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의 정서가 우리와 통하는 면이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부 잘하는 레프티가 책을 볼 때마다 살림이나 배우라며 무조건 호통치는 아빠, 쌍둥이 동생들의 창의적인 놀이도 무조건 말썽으로만 생각하는 아빠, 아빠한테 밥을 차려줘야 하기 때문에 외출을 할 수 없는 엄마, 더 기가 막힌 건 엄마가 프랑스어를 배우려 할 때마다 나이를 생각하라며 면박을 주는데 엄마 나이가 고작 32살이다. 이렇게 가부장적인 아빠의 모습은 어린 시절 우리네 아빠들과 참 많이도 닮았다. 즐거운 기분을 망쳐버리기나 하는 아빠 이야기가 주내용이었다면 정말 짜증나서 책을 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레프티는 아빠의 구박과 차별에 도전하려는 마음을 키운다. 무섭게 으르렁대는 아빠 앞에서 아무 말 없이 눈을 번뜩이며 마주 서 있던 레프티가 얼마나 멋졌는지 모른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반항할 줄 아는 아이들이 나중에 성공하는 게 아닐까? 말썽쟁이 쌍둥이를 돌보며 꿈을 키워가는 열한 살 소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꼭 잔잔한 일일 연속극을 보는 것 같다.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어질 내용이 궁금해서 연속극에 빠지는 것처럼 레프티와 쌍둥이들이 벌이는 사건이 궁금해서 자꾸 책장을 넘기게 된다.
주식 투자를 했다가 전쟁이 나는 바람에 가난해졌지만 여전히 멋쟁이인 작은아버지는 레프티의 말에 늘 귀를 기울여준다. 아빠와 달리 긍정적인 사고를 하면서 근사한 꿈을 꾸는 작은아버지가 곁에 있어 레프티는 행복하다. 또 쌍둥이들이 좋아하는 옆집 아저씨 리처드는 연극 배우이면서 빅토리아의 아빠다. 아빠와 떨어져 사는 친구 빅토리아의 마음을 헤아려 끝까지 리처드 씨의 비밀을 지켜주는 레프티의 마음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2층에 사는 프랑스인 마르쎌 아저씨와 브누아는 레프티의 여름을 활기차게 만들어준다. 특히 부모님이 레지스탕스라서 삼촌에게 피신 와 있던 브누아는 아빠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레프티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똑똑한 남자애다. 브누아의 부모님은 쌍둥이가 일으키는 사건 때문에 깜빡 잊고 있던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이 2차 대전임을 상기시켜 준다. 결국 브누아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레프티네 가족이 모두 나서서 위로해주는 모습은 새삼 이웃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다. 정확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브누아가 레프티랑 결혼했을 거라는 암시가 몇 번인가 나온다. 하지만 여름 이후 브누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손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레프티 할머니가 너무 멋져서 나도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어졌다. 몰두할 수 있는 게 공부와 컴퓨터 게임 같은 것밖에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시절 추억이 참 중요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린 시절 실컷 논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아이들이 친 사고를 눈감아주어야겠다 싶다. 늘 지적하고 혼내는 아빠보다 자유로운 작은아버지랑 살고 싶어하던 레프티의 마음을 나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추억이 너무 많아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5,6학년 이상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