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산책

 

아침부터 빗줄기가 내린다. 겨울비는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오히려 더욱 촉촉하고 따뜻하여 가슴에 스미듯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무 냄새가 짙어진다. 영화 <산책>은 푸르른 나무 냄새가 시원하게 콧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면서 차츰 근심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장면 하나하나가 방금 깨끗이 세수를 하고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 같다. 전혀 꾸미지 않고 수수하니 말쑥한 얼굴로 웃고 있는 얼굴에 몸에서는 비오는 날 스미듯 배어나오는 나무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사람을 연상한다.

 



이정국은 1997년 최진실, 박신양이 나온 ‘편지’를 만든 감독이다. 2000년에 나온 ‘산책’을 처음 본 건 몇 년 전이었다. 작년에 히트한 <라디오 스타>의 분위기처럼 착한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가 생각지도 않은 감동을 몰고 오는 영화다. 지금은 티비에 나오지 않는 김상중(영훈 역)과 싱그러운 매력이 있는 박진희(연화 역)가 주연을 맡았다. 그 외에도 영훈의 오랜 친구로 세 명의 조연이 나오는데 한 명은 양진석, 두 명은 이름을 모르겠다. 티브이에서 낯은 익었지만.


산책은 영훈의 죽은 어머니가 생전에 바라던 것이다. 남편과 함께 손을 꼭 잡고 산을 오르거나 산책을 하고 싶어했다 . 영훈의 아버지(박근형 분)는 그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고 아내를 먼저 보낸 걸 자책하며 초라한 모습으로 산을 혼자 헤매고 다닌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연민으로 괴로워하는 영훈은 말도 꺼내보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아픈 기억까지 가슴에 묻고 홀로 산다. 그를 말해주는 건, 지금은 12기 후배가 배출된 대학 노래동아리 창립멤버로서 친구들과 4인조로 해마다 소박한 공연을 해 왔고 노래말과 곡을 쓰는 능력이 있다는 점, 그리고 마음이 무지 따뜻하고 느긋한 성격이라는 점이다.

 



사소해 보이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여러 인물들의 아픔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보여주면서, 작은 계기로 스스로 치유해가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감동은, 마치 숲에 들어가면 자연치유의 느낌을 받는 것처럼, 물기 머금은 초록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어오는 것처럼,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림자도 없다. 숲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가 숲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을 붙들어 미소 짓게 한다. 마지막엔 윤도현의 목소리로 노래가 나오고 선한 사람들의 평범한 얼굴이 편안하다. 역시 착한 마음은 미덕중에서도 최고의 미덕이지 뭔가. 자신의 삶의 무게가 무겁다고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몸도 마음도 편안한 자세로 이 영화를 보며 마음속의 산책을 해보면 좋겠다. "운전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달리는 게 아니라 어떻게 멈추느냐에요." 라는 연화의 말이 귀에 걸린다.

 



배우들의 연기하지 않는 것 같은 연기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주절거림처럼 보이지만 튀지 않으면서 돋보인다. 숲은 평창의 국유림이다.

 

산책 / 2000년 / 이정국

 

- 2007년 내가 본 일곱 번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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