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한석규(인구 역)가 잘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매력이 풍겼다. 김지수는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장면만 빼면 연기가 좋다. . 왜 그런지 다른 영화에서도 그 부분은 어색하거나 과장되어 불편해보였다. 내가 갖고 있는, 그녀에 대한 유리알 같은 이미지에서 오는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표독스럽고 당차게 보이면서도 속으론 한없이 여린 역할이 잘 맞는 것 같다



영화는 지겹고 권태롭고 지긋지긋한 삶의 모습을 섬세한 포착으로 보여준다. 인물이 뱉는 대사 한 마디와 동작 하나가 그들의 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사랑에 실패를 하고 또 다른 사랑을 만난 남녀 앞에 사랑을 막는 것들은 참 징글징글한 현실이다.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옥죄는 그 현실은 함께 짊어지고 나가려고 할 때 견딜만한 것이 된다. 이들이 사랑을 느꼈을 때 기껏 하는 말은 '저번에 약값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와 '거스름돈 가져가셔야죠.'다. 이 말을 하는 인구의 안타까운 눈빛과 돌아서 나와선 울음을 터뜨리는 혜란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을 수 없다.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말은 정말 할 수가 없는 걸까. 살아보니 그런 것도 같다. 사랑은 일상의 빛과 그림자 속에 다 녹아들어서 조금은 다른 모양으로 굴절되어 나온다. 그 빛은 때때로 오해의 소지를 낳기도 하지만 가만히 마음의 손을 대어보면 은은히 감지되는 무엇이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장애인 형을 위해 활주로 카세트 테잎을 구해주고 얼굴에 끼는 개기름을 닦아내는 기름종이를 선물로 준다. 남자는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린 여자에게 공짜로 처방약을 지어주고 그녀의 옛 애인(유부남)을 다른 일로 시비 걸어 패준다.

두사람의 공통점은 사랑을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될 처지다. 아무도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줄 수 없는 답답한 처지이지만 이들은 근본적으로 선한 심성을 가졌다. 장애형의 어쩌지 못하는 정력을 풀어주려고 이런 저런 일들을 벌이는 인구의 모습 중 산악부원이었던 형을 위해 산 정상에 함께 올라 소리를 지르고 히말라야 등반을 기약없이 약속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인구가 유품이 된 1969년 4월에 녹음된 어머니의 테잎을 재생하며 듣는 장면이다. 월남에 가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녹음 테잎인데 형 인섭의 음성도 실려있다. 어쩜 그리 나긋나긋한 새댁의 음성인지. 곰살스러운 사랑이 철철 묻어나는 목소리가 봄날 나른한 햇살 같다. '영감, 왜 불러. 뒷뜰에 매어놓은 송아지 한 마리 보았소? 보았지.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어린 인섭과 젊은 어머니가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가 너무 은방울 같아서 슬프다.



영화는 사랑이 모든 상처와 짐을 들어줄 수 있다고 말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 사랑이란 게, 남녀만의 뜨거운 감정이 아니라 그 남자 그 여자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까지를 보듬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게 이루어진 가정이 사랑의 근원지라고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불쌍해서 어쩔 수 없어하는 감정, 뜨거움은 아주 잠깐이고 어쩌면 미지근한 채로 오래 가는 그런 감정이 사랑이라고. 끄질듯 말듯 힘겹게 목숨줄을 이어가고 있는 양초의 가느다란 심지처럼, 사랑은 쉽지 않고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감정도 아닌 것 같다. 함부로 사랑이란 말을 내뱉지 않고 서로의 안쓰러운 부분을 토닥여주는,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부드러운 손길로 토닥여주는... 가난과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했다. 사랑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활주로의 배철수 목소리로 '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가 흥겹게 흘러나오고 시원하게 웃고 있는 인구와 인섭 그리고 혜란의 표정이 밝다. 군데군데 재미있는 대사들이 영화 전체를 무겁지 않게 조절한다. 밤 낚시를 하던 어느 호수인가, 강인가, 짙은 코발트빛 풍경이 두껍게 붓칠한 유채그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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