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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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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글쓰기.

 

 

 

  웹툰으로 최근 연재되는 만화 중에, N포탈의 돌아온 럭키짱, 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럭키짱이 어떤 만화라고 묻는다면, 쉽게 말하면 학원물이지요. 극화체로 학원의 폭력을 다룬 그런 만화였습니다. 작가 김성모는 이 럭키짱 이후에 여러 작품들을 내놓았고, 수많은 패러디들을 양산했으며, 인터넷을 하던 폐인들은 그에게 경외심을 담아 김화백이라는 칭호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최근에 스포츠신문에서 4인조라는 만화를 끝내고 다시 시작하게 된 작품이 돌아온 럭키짱입니다. 여기까지는 김화백의 팬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조금 객관적으로 만화를 살펴보면, 머리를 비우고 보기에는 괜찮은 만화입니다. 보면서 실소와 폭소를 자주 머금게 되지만 딱히 무슨 심오한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닙니다. 학교 폭력물이라서 학생들에게 유해하지 않겠느냐, 라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최근 인터넷을 조금만 뒤지면 그보다 훨씬 유해한 매체를 많이 찾을 수 있으며 하다못해 영화나 드라마의 폭력장면이 김화백의 만화보다 더 유해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김화백의 작품은 현실과 제법 많이 동떨어진, 그러니깐 70, 80년대의 공고나 상고에서나 일어날 법한 내용을 만화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들도 김화백의 작품을 보면서 현실에서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라며 잠긴 교실문을 열지는 않을 것이고, 중학생들도 ‘아, 만연한 인터넷 냄새’ 라고 말하면서 학교의 싸움 잘하는 아이들, 소위 말하는 학교짱을 탐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령 초등학생들도 ‘슈슈슉’ 하면서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고 말이겠지요. 이미 우리들은 인터넷의 생활화로 인하여 초등학생조차도 현실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지 않은 이상 우리는 그저 웃을 뿐 따라하려고 마음먹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을 아끼자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돌아온 럭키짱, 그리고 이외에 다른 웹툰들 모두 좀 유해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웹툰이라는 단어부터 고쳐야 할까요, 웹툰뿐만이 아니라 만화책들도, 소설책들도 모두 우리나라 말을 아끼지 않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영어를 섞어쓰고 우리나라 말을 우그러뜨리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다 못해 쓴 책이 바로 이 ‘뿌리 깊은 글쓰기’ 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아마 저자가 읽었을 책들에서 108가지의 잘못된 우리나라 말 사용례를 뽑아서 손수 다듬고 있습니다. 저자의 우리나라 말에 대한 애정은 저자의 글쓰기에서부터 깊이 배어있습니다. 저자의 문체는 꼭 시를 읽는 것 같으며, 매 꼭지는 우리나라 말을 아끼자는 주장으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의 전체적인, 큰 의도는 한 문장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책 앞의 일러두기에서 쓰인 것과 책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우리 말을 쓸 수 있을 때는 우리 말을 쓰자’ 가 바로 의도겠지요. 더 나아간다면 우리 말을 아끼고 사랑하자,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면 힘들여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플래카드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 공익사업을 벌이는 것이 훨씬 좋겠지요.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책을 통하여 그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당위성, 그러니깐 근거가 되겠지요. 이 근거라는 말이 매우 딱딱합니다만 간단한 예를 들면 일전의 ‘따뜻한 경쟁’ 의 경우 그 주제는 ‘따뜻한 경쟁을 하자’ 가 될 것이고, 책 내용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따뜻한 경쟁은 어떤 것이며 그 경쟁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 따뜻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따뜻한 경쟁이 이루어진 나라는 있는가, 따뜻한 경쟁을 하면 정말 현실의 문제가 사라질까, 정도가 되겠습니다. 물론 소설의 경우는 좀 다르겠지요. 소설의 묘미는 끝까지 읽지 않는 한 예측불능에 있다고 반론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며, 한 번도 읽지 않은, 그래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책은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반론을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 ‘뿌리 깊은 글쓰기’는 소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책의 부제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를 보면서 저자의 주장이 책 내부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어떻게 그 근거를 획득하는가를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저자의 주장이 옳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우리 말을 쓸 수 있을 때 우리 말로 순화해서 쓰도록 노력을 기울이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 책은 감성에 기댈 뿐,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사실 ‘우리 말로 순화해서 쓰자’ 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저도 ‘우리 말을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책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할 것이라면 적절한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고쳐야 할 예시로 든 책들을 보면서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떤 책은 시집이었고 어떤 책은 소설책이었으며, 1/3 정도는 외국 책을 번역한 책이었고, 일부는 엮은 책이었으며, 일부는 수필이었습니다. 몇 몇은 만화책(요츠바랑! 이 두 번 정도 나왔더군요) 이었지요. 차근히 이야기를 시작하면, 먼저 시집에 수록된 시의 경우에는 과연 책에서 말하듯 ‘그린 농법’을 ‘푸른 농법’, ‘풀빛 농법’ 으로 고쳐야 할까요? 시에서 의도적으로 문법을 파괴하는 시적 허용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시에다가 당장 (내린 처방은 푸른 농법), 이라고 적어두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바뀝니다. 풀빛 농법이라고 바꾸어도 마찬가지이지요. 시를 여기다가 옮기지는 않겠습니다만, 발췌된 시는 류기봉씨의 포도 눈물, 에 실린 시입니다. 잔잔한 시의 분위기를 ‘그린’ 이라는 외래어가 현대적인 분위기 쪽으로 붙잡고 있었는데 (국어교과서 참고서에 나올만한 이야기로 하자면 목가적인 분위기를 포스트모더니즘하게 바꾸고 있다고 말하면 될려나요) 푸른 또는 풀빛은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그저 평화롭게, 잔잔하게만 흘러가게 만듭니다. 과연 시인이 푸른 혹은 풀빛과 같은 단어를 생각을 못해서 그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저는 그 점에 대해서 좀 회의적입니다. 물론 시의 해석은 누구나 다를 수 있습니다. 푸른 농법이 훨씬 좋은 시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있는 그대로 돌아보고 느끼는 그대로 글로 옮’기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시인이 농사를 하면서(류기봉 시인은 농사를 짓는다지요) 느낀 시어가 ‘그린 농법’ 이라면 그것을 존중하는게 옳다고 여겨집니다.

다음으로 이야기할 부분은 만화책을 발췌한 부분입니다.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넘어가려다가 제목이 눈에 밟혀서 다시 보니 ‘요츠바랑!’ 이었습니다. 뭐, 개인적으로 만화를 자주 보는 편이라 요츠바랑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요. 저처럼 나이먹고서도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보통 이런 요츠바랑과 같은 만화는 학생들이 자주 보는 만화로 여겨집니다. 앞서 돌아온 럭키짱, 이야기로 이 글의 서두를 시작했지요. 만화에 우리말로 고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사실 끝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웹툰이나 만화에서는 우리말이 그리 존중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말 무분별하게 쓰는 웹툰들도 있습니다만, 어떤 경우에는 그리 존중받지 못하는 단어가 그 만화나 웹툰이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요츠바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만화책을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순 우리말로만 이루어져있다고 상상해봅시다. 과연 만화책을 읽는 재미가 얼마나 있을까요? 이국적인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만화책이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 만화책을 읽는 독자층이 거의 학생층이라고 본다면 재미가 없는 만화책을 누가 과연 사서 볼지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영어를 이국적이라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만 영어를 쓰며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도 티셔츠에 ‘한글’ 이라고 써진 글자를 입는 사람들이 있고, 인도에도 가슴에 ‘愛’ 라고 쓰고 춤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사례들이 있겠지만 이쯤 줄이고, 이런 사례들을 보면 이국적인 것에 대한 동경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고, 그것이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자는 일러두기에서 이야기합니다. 영어를 받아들일 까닭이 없는 자리라면 우리나라말을 쓰라고. 확실히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굳이 ‘주전부리’라고 써야 할 자리에 ‘디저트’를 쓸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디저트’를 ‘주전부리’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나 이런 만화책에서 ‘디저트’를 ‘주전부리’로 바꾸어야 할 필요는 더욱 더 없다고 여겨집니다. 자연스레 읽는 재미를 위해서는 디저트로 놓아두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이 말은 이국적이라고 느낀다고 해서,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영어를 써서 멋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사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말로 된 만화책이 나오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만화책같이 학생들에게 파급력이 큰 매체에서부터 이렇게 외국어를 쓰니 큰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서 저자는 일부러 만화책에서 발췌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린 만화책이라면 모를까 외국에서 들여온 만화책을 번역한 것이라면 점차 원본과 멀어지는 상황은 피할 수 없겠지요.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외국의 만화책을 읽을 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번역된 책은 이상하게 심심하네, 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도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지 않는 책이라서 그렇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들여오지를 말아야 하는 게 옳은 일이겠네요.

위의 만화책들을 발췌한 것에 대하여 설명한 부분은 번역한 책을 발췌하였다는 것에 그대로 쓰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번역가들이 작업물에 대해서 좀 더 신경을 써서 우리말로 순화시켜서 번역하는 경우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도리어 순화시킨 경우가 점차 원래 의미하는 바와 멀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레스토랑을 모두 밥집으로 바꿀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일일이 각 문맥에 맞는 단어를 찾는 것이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 부분에는 영어를 그대로 쓰면 된다고 저자는 일러두기에서 이야기하지만, 그 경계는 어떻게 보면 매우 애매모호합니다. 시처럼 쓰인 문장도 좋지만, 저자는 그런 기준에 대해서 좀 더 책에서 밝히는 것이 좋았으리라 여겨집니다.  발췌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번에는 책의 문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책에서는 이런 문장을 구사합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물정”이란 ~ 겹말인 셈입니다. 세상을 모르는, 이나 물정을 모르는, 이라고만 적어야 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가만히 읽다보면 무언가 어색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어를 다 빼고 구조만 보면 ‘그대로 두어도 되나, ~라고만 적어야 한다’ 니. 무슨 말인지 사실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제가 문장의 비문을 가릴 만큼 국어 연구를 깊이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듯 합니다. 저 문장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은 물정이 겹말이기 때문에 세상을 모르는 이나, 물정을 모르는 이라고 고쳐야 한다 고 적는다면 낫겠지요.

사실 이렇게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댄다면 다른 책들도 이런 문장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당장 지금 이 글만 하더라도 꼼꼼히 살펴보면 문법에 어긋나거나 이상한 문장을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탈자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책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는 이유는, 앞서도 말했듯이 그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 책들의 주제에 관한 것이 핵심이지, 문법이나 오탈자는 그런 책들에게서는 어쩌면 조금은 지엽적일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말을 쓰는 것이 그런 류의 책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플라톤의 철학을 다룬 책에서 이데아에 대한 글을 쓰지 않고 오탈자를 찾아서 글을 쓴다면 그야말로 보석을 동물한테 주는 격이지요. 하지만 이 책의 주된 핵심은 ‘우리나라의 말’ 입니다. 우리나라의 말에 대한 주장을 하는데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이 영어를 순화시킬 수 있는 단어이지 문장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자신에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이렇게 지적할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작품이든 지적하거나 비평하기는 쉽지만, 직접 쓸때는 그만큼의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저 또한 막연히 우리말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을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쓰게 될 것인가, 등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영어를, 비단 영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외래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 대화에서 사용하는지 이 책은 자신의 언어 생활 습관을 돌이켜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새로운 단어를 배우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발췌한 책 중에서 저자가 제안한 단어를 쓰면 훨씬 더 바람직하게 문장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에세이를 삶글로 바꾸는 것이라던가, 스크랩을 갈무리로 바꾸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의 예가 되겠네요. 마찬가지로 밤은 날밤으로 두는 게 좋지, 생률과 같은 정체불명의 어려운 말로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자가 제시한 108가지 이야기에 모두 동의는 못하지만, 저자의 말이 옳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우리나라사람이 우리나라말을 아끼며 즐겨 쓰는 것은 옳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야 할 길이 매우 멉니다. 그렇기에 이 책이 그 대장정의 첫 발자국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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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3-25 06:43   좋아요 0 | URL
국어사전에서 '톺아보다'라는 낱말을 찾아보셔요.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고 '오자'라고 말한다면, 어쩐지 너무 싱겁네요.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거나 살피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일은 어려울는지 모르지만, 마음을 기울여 생각한다면, 말에 담을 넋을 살필 수 있어요. 님이 쓰신 글에서 한 가지만 짚어 본다면, '마찬가지'라는 낱말은 외따로 쓸 수 없어요. '이와 마찬가지'처럼 쓰든지 '그와 마찬가지'처럼 쓰거나 해야 올발라요. 그런데, 이런 말씀씀이를 둘레에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둘레 사람들도 제대로 모르니까, 모두들 잘못 말하거나 글쓰는 줄 모르면서 얄궂거나 뒤죽박죽이 되고 만 말로 넋을 담아내요.

말과 글로 사랑을 빚지 못하기 때문에, 말과 글로 사랑을 빚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제 생각으로는, 에세이를 굳이 삶글로 바꾸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그냥 수필이라 하면 돼요. 삶글로 쓰고 싶으면 삶글이라 하면 되지요. 시를 포엠이라 할 까닭이나 소설을 노블이라 할 까닭이 없다고 여기면, 수필은 그냥 수필이라 하고, 때로는 산문이라 하면 넉넉하니까, 에세이를 이야기할 까닭이 없을 뿐입니다.)

가연 2012-03-25 09:53   좋아요 1 | URL
아, 죄송합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한번만 찾아보았으면..ㅠ 너무 생소한 단어라 오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자 부분은 지우도록 할께요. 그 부분에 대해서 사과드릴께요. 오자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웠습니다.

(톺아보다를 오자로 착각했습니다. 본문에는 톺아보다를 돌아보다로 고치는게 맞지 않을까 라고 적었는데 제가 잘못 알았었기에 지금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된장님이 이 책을 쓰셨죠? 책 앞부분을 읽다가 알라딘 서재에서 머물고 계신 것을 봤지요. 사실 그래서 리뷰를 쓸까 말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는데... 보통은 이렇게 글을 쓰느니 안쓰는 것을 택하지만 평가단이라서 일단 이렇게 쓰기는 했네요. 다른 책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책을 쓰신 분이 글을 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니깐 부담이 많이 되네요. 하지만 이왕 썼으니 조금 말씀드리면, 된장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만, 글 자체에서 좀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이야기드리면, 에세이편에서 보시면 ('수필'이라는 말마디에 당신들 글을 꿰어맞추었습니다, 조그맣든 크든 내 깜냥껏 우리 말과 글로 새로운 낱말을 빚어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적혀있지요. 저는 이 문장을 수필이라는 말 자체에도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으신 거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삶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문단 뒤에는 더이상 '수필' 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구요. 뒤에는 '문자 한 마디 자랑질' 이라는 말이 '해몽'을 언급하면서 나옵니다. 이는 '에세이'나 '수필'(같은 한자어니깐 이 단어를 빗댄 것이 더 가능성 높다고 판단했지요)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문자 자랑질이다, 라고 해석이 되었구요. 이 흐름은 마치 삶글이 대안이다, 라는 판단을 내리셨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지요. 물론 책에서는 삶글로 쓰자, 라고 적혀있지는 않지만 흐름을 보건데 가장 적합한 것은 삶글이나 마음글이겠구나, 라는 판단을 내리는데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수필'에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은 듯한 문장, 삶글에 할애된 꼭지 등..) 다시 덧글을 보니.. 이번에는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셔서.. 댓글에서는 수필, 때로는 산문으로도 넉넉하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네요. 그렇다면 수필이라는 말은 꿰어맞추기는 했지만 '문자자랑질'이 아니라는 것인지, 혹은 문자자랑질이지만 그냥 써도 괜찮다, 라는 말씀이신건지.. 사실 책 전체 주제에서 보자면 문자자랑질에 해당하든 안하든 영어 대신에 쓰이는 말로는 적합하겠지만, 그렇다면 굳이 책에 문자자랑질, 이라는 말씀을 쓰실 필요가 있었는지.. 이런 부분이 조금 어색하였습니다. 차라리 삶글로 쓰자! 라고 주장하신다면 훨씬 글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삶글을 언급한 이유는, 저 개인적으로는 삶글이라는 단어가 참 좋다고 여겨서 저렇게 써두었습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확인하지 못했을 단어겠지요. 사실 제 글이 많이 부족하고.. 하시는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해석할 여지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글의 흐름은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그 후에 '꼭 할 필요는 없지만', 라고 적혀있으면 이렇게 해야 되는지, 아니면 그냥 하던대로 써도 되는 것인지.. 분간이 힘들지요. 사실은 이런 글을 잘 안쓰는데.. 평가단이라서 이렇게 적어두기는 했네요ㅠ 본문에서도 밝혔다시피 제가 이런 책을 쓰기는 정말 어렵겠지요. 지적하는 것은 그에 비해서 훨씬 쉬울테니 말입니다.

파란놀 2012-03-25 12:54   좋아요 0 | URL
어느 쪽으로 적든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는 '글쓴이'와 '말하는이' 마음에 따라 달라요. 어느 마음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느냐에 따라, 아주 쉬운 말글을 쓰더라도 '문자자랑질'이 돼요. 이를테면 '톺아보다'라는 낱말도 문자자랑질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낱말을 처음 듣던 예전에는 문자자랑질이라고 느껴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낱말을 지식인 아닌 여느 흙일꾼 할아버지가 입으로 읊는 말을 한 번 들은 다음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꼭 흙일꾼 할아버지가 이 낱말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자리 어느 흐름에 맞추어 글을 쓰느냐에 따라 느낌과 결은 사뭇 달라져요.

문학을 이야기하는 글을 쓸 때에는 '삶글'이라는 낱말을 아직 사람들 앞에서 쓰기 힘들어요. 이때에는 그냥 수필과 산문이라고 처음 이야기하면서, 나중에 사이사이 '삶글'이라는 낱말을 곁들일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시나브로 '수필 = 산문 = 삶글'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요사이에는 '에세이'를 넘어 '르포'라는 말까지 들어와요. 수필이든 산문이든 자유롭게 쓰는 글이지만, 자꾸 영어를 끼워맞추면서 글 테두리를 넓힌다고 해요. 이런 흐름에서는 한국말로 또 새로운 말을 빚을 수 있어야겠지요.

제가 이 책에서 '글쓴이가 밝힌 풀이글이나 이야기'가 '대안'이나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되풀이해서 말하는 까닭은, 이 책을 교과서로 삼지 말고, 스스로 말밭을 일구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좋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삶이 달라, 스스로 좋아하며 받아들이는 말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다 다른 결을 스스로 살피면서 날마다 내 넋을 북돋우면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떤 말을 넣을 때에 서로 즐거운가를 깨달을 수 있어요.

이 낱말은 써야 하고 저 낱말은 안 써야 한다는 틀이란 없습니다. 이런 틀이 있다면 굴레가 될 뿐이에요.

님이 쓰신 이 글에서 한 가지를 짚어 보면, "-하고 계시다"라고 적은 대목이 있는데, "-하고 있다" 아닌 '계시다'를 넣는다고 높임말이 되지 않아요. 틀린 말법이랍니다. 더구나, "-하고 있다" 또한 영어 '-ing', 이른바 현재진행형을 일본사람이 '-중(中)'으로 번역하면서, 이 말투가 한국말에 "-하고 있다"로 탈바꿈했어요. 그러니까, '계시다'를 '있다'로 고쳐야 알맞지만, 더 밑을 살피면 '있다'를 넣은 "-하고 있다"부터 잘못 쓴 말이에요. "적혀 있지요"부터 틀리게 쓴 글입니다. "적혔지요"라고만 적어야 올발라요.

그러나, 올바르게 쓰든 잘못 쓰든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어떻게 쓰든 '내 마음을 얼마나 잘 드러내거나 나누려 하느냐'가 대수롭습니다.

대수로운 대목을 살펴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비로소 말을 새로 익히며 글로 사랑꽃을 피우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쓴 책에 실린 이야기를 '동의하든 동의 안 하든' 아무것도 대단하지 않아요. 옳은 대목이 없고 그른 대목이 없어요. 동의하느냐 동의 안 하느냐로, 책을 따져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스스로 아름답게 돌볼 내 말삶을 깨달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도록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으니, 이 대목을 짚지 못하면, 이 책을 읽었어도 안 읽은 셈이라고 할밖에 없습니다.

가연 2012-03-25 14:12   좋아요 1 | URL
음.. 사실 동의한다, 혹은 옳다... 라고 쓴 것은 그냥 답글만 달려고 하니깐 너무 딱딱해보여서 끼워넣은 말인데, 졸지에 책을 안 읽은 사람이 되었군요;ㅎ

더 이야기를 진행시켜도..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듯 하니 무익할 것 같네요. 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저자이시고 하니 제가 책을 곡해한 것 같다고 여기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앞서 답글에서도 달았듯 이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좀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이 책이 밑거름이 되어야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밑거름이라면 바탕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요? 바탕이 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수는 없지요. 그래서 얼마나 적절한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데 그걸 밑거름으로 삼는게 좋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라면 당황스럽지요. 수학의 공리도 아니구.. 랄까, 이렇게 쓰면 너무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보이려나요ㅠ 사실 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아(고 있다고 저는 스스로 생각을 하지만 님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겠지요.)는데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런 부분들이 저같은 사람들에게는 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락방 2012-03-25 21:38   좋아요 0 | URL
가연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가연님의 글솜씨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리뷰를 읽으니 새삼 감탄스러워요. 저는 이 책을 읽는다면 가연님과 비슷한 감상이 나왔을 것 같은데, 가연님처럼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리뷰를 써내지는 못할것 같거든요. 소설가 이승우는 자신의 책,[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에서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읽어야 한다, 라고 했는데 가연님이 이렇듯 무슨 말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게 글을 '잘 쓰신'건 '잘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맛폰으로 가연님의 서재를 둘러보다가 댓글을 달고([초속 5센티미터]에 말이죠.-안 달 수가 없었어요!), 안되겠다 스맛폰으로 댓글 남기는 건 너무 답답해, 라고 생각해서 이리 들어왔어요.

:)

가연 2012-03-26 12:21   좋아요 0 | URL
아하하.. 그저 부끄럽네요ㅠ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비판(?)하는 글은 성향상ㅠㅠㅠ 별로 적고 싶지가 않은데, 이미 써놓고 변명같지만ㅠ 제가 아직 모르는게 많고 부족한 것도 많으니.. 그래서 적고 싶지 않았는데 신간을 두 권씩 받는게 기쁘니ㅠㅠㅠ 별 수 없이 평가단으로 이렇게 써버렸네요. 아직 부족한게 많은 글입니다. 담에는 더 좋은 글을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ㅎ

그리고 초속 5센티미터..ㅎㅎ 이글에 댓글을 이렇게 남겨주신것도 감사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초속 5센티미터에 댓글달아주신것도 매우 기쁘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ㅎㅎㅎ 그 글은 상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글이라...

희선 2013-08-21 00:42   좋아요 0 | URL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시가 생각났습니다 재미있는 시예요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하게 하는...


우리말 사랑 1



자고 일어나
달리기를 하면 발목 삘까봐
조깅을 한다.
땀이 나
찬물로 씻으면 피부병 걸릴까봐
냉수로 샤워만 한다.
아침밥은 먹지 못하고
식사만 하고
달걀은 부쳐 먹지 않고
계란 후라이만 해 먹는다.

일옷은 입지 않고
작업복만 골라 입고
일터로 가지 않고
직장으로 가서
일거리가 쌓여 밤샘 일은 하지 않고
작업량이 산적해 철야작업을 하고
핏발선 눈은
충혈된 눈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는 반찬을 사러
가게로 가지 않고
슈퍼에 간다.

실컷 먹고 뒤가 마려우면
뒷간으로 가지 않고
화장실로 가서
똥오줌은 누지 않고
대소변만 보고 돌아와
오랜만에 아내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다 잠이 들면 될 텐데
와이프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다 잠이 든다.



서정홍



자기 전에 읽어서 그랬는지 꿈속에서 또 읽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를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말을 잘 쓰기는 해야죠 저는 어려운 말보다는 쉬운 말로 쓰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이오덕 님이 쓴 글(우리글 바로쓰기 1~5)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책을 읽었더니 다른 책 읽는 게 쉽지 않더군요 지금은 시간이 좀 지나서 나아졌지만...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고쳐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정말 그래요(초등학교 교과서 지금은 어떨지) 많이 배우지 않고 책을 거의 읽지 않은 분이 우리 말을 더 잘 쓴다고도 하셨는데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지 않고 책을 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누구나 알기 쉽게 말하고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더 많죠 어떤 책에서 책을 볼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보라고 했는데, 얼마 전에는 글을 쓸 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을 봤습니다(거기에 쓰여 있었던 것은 자신이 글을 쓰는 게 아니고 소설신이 말해주는 것이어서, 하는 게 있었지만...^^)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늘 잊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 말을 잘 쓰는 것은 좋지만, 말의 느낌이라는 것이 있으니 거기에 맞는 말을 쓰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도 없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책 읽으면서 왜 이런 말(영어, 한자말)로 쓴 거야 할지도...^^ 사실 이것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희선

가연 2013-08-28 00:22   좋아요 0 | URL
이오덕 님의 글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러나 쉬운 말로 풀어야 한다는 말씀엔 동감합니다. 그리고 우리 말이 사실 좀 많이 외국어들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뭐랄까, 한편으로는 외국어를 쉽게 표기할 수 있어서 이렇게 나타나는것이 아닌가 싶네요.
 

 

 

 

너무 옛날에 읽었나.. 아는 책들 몇 권은 책들이 절판이네요.

 

 

 

변신이야기.

변신이야기는 원제 메타몰포시스를 번역한 제목입니다. 변신이야기라고만 적혀있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표지의 그림과는 별로 어울리지가 않지요. 물론 메타몰포시스라고 원제 그대로 적어두는 것도 좀 이상하게 보일 듯 싶습니다만. 이 책은 변신이야기라는 이름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 처럼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 어떻게 보면 변신이야기, 라는 말이 어울릴 수도 있겠네요.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말 그대로 '변신'에 관련된 내용들이니 말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신이 인간에게 힘을 작용하여 다른 사물로 변화시키는 장면이 유난히 많이 나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칼리스토가 곰이 되었다던가, 케이론이 별자리가 되었다던가 등등 말이지요. 눈물을 흘리다가 그대로 석상으로 '변신' 한 니오베의 일화도 유명할 것입니다. 말장난같지만 원제 메타몰포시스 그대로, 메타포적인 의미의 변신까지 포함한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전체적으로 신과 인간의 변신, 변형에 관련된 신화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어쨌든, 그 방대한 신화를 오비디우스가 정리한 것이 바로 이 변신이야기입니다. 제가 읽어본 것은 1권입니다만, 2권 말미에는 카이사르가 어떻게 신이 되는가, 에 대한 시도 적혀있다고 하니 한 번쯤 정독해볼만한 내용이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모든 내용이 그리스 로마 원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오비디우스 본인이 약간의 각색을 거친 부분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셔야 합니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미솔로지.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토마스 불핀치의 이름을 뺀다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겠지요. 물론 옆의 책은 품절이고,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책으로 (출판사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서..) 토마스 불핀치가 지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습니다만, 어느 책이든 '꼭' 축약본이 아니라 완역이 된 책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올림푸스 가디언, 이라는 만화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정말 인기던데, 사실 그 만화를 가끔씩 보다보면 빙긋이 웃음지을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자르고 다듬어야겠지만.. 실제로는 정말로 야하고, 정말로 비교훈적인 부분도 많기에 말이지요. 그러고보면 대부분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라고 되어있는 작품들은 실제로 그 원제는 토마스 불핀치, '신화의 시대' 로 알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미솔로지, 라는 책이 그 신화의 시대를 번역한 책인데, 보통은 그 중 적당히 추려내서 그리스 로마 신화, 라는 이름으로 출판하는 것이지요. 약간 늦은 편이지만,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신화의 시대가 제대로 번역된 것은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토마스 불핀치의 신화의 시대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도 눈여겨볼만한데, 책에서 언급되는 트로이의 마지막 영웅, 아이아네스의 '황금가지'는 이후 프레이저의 기념비적인 저서 '황금가지'에서 재변용됩니다.

 

 

 

북유럽 신화여행.

맨옆의 책은 아마도 절판이리라 짐작되고, 요즘은 오른쪽의 좀 더 내용적으로 충실한 북유럽 신화기가 출판된 터라, 굳이 권하자면 오른쪽의 안인회의 북유럽 신화, 를 권해야겠지만, 아직 오른쪽의 책은 읽어보지를 못했네요. 최근에 50퍼센트 할인행사로 정말 비싼 책을 싼 값에 살 수 있게 되기는 했는데, 돈 없는 저로서는, 하하, 계속 우선 순위가 밀리게 되는 책이기도 합니다. 맨 옆의 바이킹 전사들의 북유럽 신화여행, 이라는 책은 창조신화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한 권으로 다룰 수 있는 범위 내에 충실히 내용을 담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일화를 흥미 위주로 읽어나가고자 하는 분들께는 괜찮겠지만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지적 욕구를 채우고 싶다면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오른쪽의 책은 북유럽 신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웅' 들의 이야기도 충실히 넣은 듯 합니다. 니벨룽겐의 반지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같은 희곡을 볼 때,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을 알고 있으면 문화 생활이 좀 더 즐겁겠지요.

 

 

 

페르시아 신화.

페르시아나 이란 관련 신화에 관련된 서적은 주로 이렇게 출판사들이 묶어낸 책에 의존하게 됩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겠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책을 읽어야 알 수 있었던 일종의 고급정보였지요, 하하. 왼쪽의 책은 세계의 탄생에서부터 영웅들의 이야기까지 제법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 창조 신화는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에 좀 빚지고 있습니다만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이 살아가며 창조해내는 이야기들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색깔이 많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스 로마신화나 위의 북유럽 신화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창조신화에서만 신들의 힘이 작용하고 그 이후부터는 인간들이 선과 악의 이야기들을 엮어나간다는 점이겠지요. 물론 근원적인 힘으로서의 선신과 악신의 대립은 늘 내재되어있으며, 그 때문에 인간들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느끼며 신에게 귀의하게 됩니다만, 그 운명안에서 몸부림치는 서사시의 비장함은 어느 신화도 따라오지 못하리라 짐작됩니다. 끝이 빤히 보이는데도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그 운명이라는 놈은.. 물론 이런 운명론적 사고관은 요즘이라면 배격되겠지만 그때는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생각들이겠지요.

 

 

 

칼레발라.

솔직히 말씀드리면 왼쪽의 책은 정말 가치가 높은 책이긴 하지만 동시에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책입니다. 물론 저만 지루하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너무 파괴적이고 강렬한 사건들에 익숙해진걸까요, 하하. 핀란드 신화를 다룬 칼레발라는 다른 신화들처럼 창조신화에서부터 시작합니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다른 신화들이 그 내부에 일종의 열풍과 같은 순수하고도 파괴적인 어떤 힘이 느껴진다면, (특히나 근처의 북유럽 신화를 보면 훨씬 차이점이 두드러지겠지요) 이 칼레발라의 주인공들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음유시인의 이미지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는 것이겠지요. 왜 이것이 특이한가, 라고 물으실 수 있겠지만, 파괴 후에 창조는 거의 모든 신화에서 두드러지게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핀란드의 서사시 칼레발라는 그런 전체적인 사건들보다도 조그만 사건들의 반복을 더 많이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신화들에 비하여 생활상을 더 잘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을 수 있겠네요. 음, 몇 년 전의 연구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신화들이 좀 더 체계화되어 북유럽 신화나 이런 칼레발라로 변형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 이후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인도신화.

 사실 제일 왼쪽의 책은 제가 읽었던 책도 아니고(읽었던 책은 출판사에서 정리한 표지 정보조차도 안뜨는 매우 옛날의 책..) 대부분의 오래된 책이 그렇듯 절판이지만, 생각해보면 인도의 신화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지만 인도신화만 다룬 책들을 읽어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누구나 베다교의 세 주신, 시바, 브라흐마, 비슈누를 알지만 이 신들과 리시들간의 알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며, 비슈누가 아바타로 현신하는 것은 잘 알지만 아바타가 각각 무엇을 했는지는 또 알쏭달쏭하리라 여겨집니다. 불교의 붓다가 비슈누의 아바타였다는 사실은 알지만 왜 붓다가 비슈누의 아바타였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는 대부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왼쪽의 책과 같은 부류는 그런 체계를 잡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오른쪽의 마하바라타는 인도 신화를 이야기할때 정말 수없이 언급되는 책인데, 이왕 체계를 잡으려고 할때, 함께 읽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중국신화전설.

누군가 중국 신화에 대한 책을 물어온다면, 단연코 이 책을 추천할 것입니다. 1권은 신화를 다루고, 2권은 전설을 다루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1권만 읽어도 충분하리라 여겨집니다. 이 책을 읽다보시면 좀 딱딱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반고가 천지를 가르고, 복희와 여와가 인간을 창조하고, 축융과 공공이 싸우는 내용들이 책 전반적으로 펼쳐져있습니다. 뭐, 사실 요즘 중국은 요순시대마저도 정식 역사로 넣으려는 주장을 펼치고 있긴 합니다만, (은나라까지는 갑골문이 출토되었기에 일단 정식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정식 역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신화로서 중국인들의 의식 상태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은 매우 큰 의의를 가지리라고 봅니다.

 

 

 

 

 

 

세계 신화 사전.

보통 이런류의 책들은 창조신화를 서술하고, 그 후에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언급하고, 북유럽 신화를 언급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를 언급하고, 이집트 신화를 언급하고, 인도의 신화를 언급한 후에 중국을 언급하는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 중국의 신화를 언급하고 난 뒤에는 보통은 인디언 신화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요즘은 종종 동아시아 신화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왼쪽의 책은 지금은 절판이고 다루고 있는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북유럽 신화에 관한 이야기만을 거의 다루고 있어서 사실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채우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갓 신화이야기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독려하는 수준에서는 괜찮으리라 봅니다. 이 책 말고도 다른 책들이 몇 권 있고 대부분 비슷비슷하다고 여겨지기에 무엇을 딱히 추천드리기는 어렵겠네요. 이런 책들은 위의 어마어마한 리스트들을 다 읽기 버거울 때 읽는 책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읽어왔던 것들을 마치 서랍 정리하듯이 묶어나갈때 읽는 책이라고 보아도 무방할테고 말입니다. 사실 시간이 많다면 위의 책들을 하나씩 다 읽어가면 좋겠지만.. 다 읽을 수 없는 경우에는 이런 책들로 채워나가는 것도 좋지요. 지적 호기심이 더 깊은 내용을 읽도록 이끈다면 훨씬 쉽게 신화들을 접할 수 있을테고 말입니다.


 

 

세계의 유사신화.

개인적으로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여기지만 품절된 듯 하네요. 여러 문화권의 신화들을 창조, 홍수, 타락 등과 같은 범주로 묶어서 각 신화에서 공통된 원형을 뽑아냅니다. 이 책의 강점은 단순히 범주로 묶었다는 점에만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여러 학자들, 그러니깐 조지프 캠벨이나 로버트 그레이브스와 같은 학자들의 주장을 가져옵니다. 융의 이론이나 프로이트의 이론을 쓰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이 조금 과한 부분이 있으니, 과학 부분에까지 확장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인디언의 신화 중 남조류가 태초에 물을 뒤덮었다는 부분을 가리켜 현대 과학의 진화론을 떠올려보라, 라고 제안하는 부분은 조금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조금' 정도로 그칠 수 있는 것은 '제안' 정도에 논의를 그치기때문이지요. 또한 자신의 의견에 아집을 가지지 않는 저자의 서술 태도도 한 몫하고 말입니다.

 

 

 

상징의 비밀.

당신이 만약에 상징에 관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라서, 상징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싶다면, 그 첫걸음은 이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으리라 여깁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아넘기는 수많은 객체들에게서 그 의미를 뽑아내는 이 책은 사뭇 경건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책 내용에서는 사실 저자의 숨결을 거의 느낄 수 없고, 딱딱하게 사전 형식으로 쓰여져있지만, 도리어 그것이 객관성을 보태주는 느낌을 줍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타로카드의 상징도 싣고 있지요. 또한 상징에 관한 책들이 가장 가져야 할 덕목이 있다면, 도판을 많이 추가하여, 최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보는데, 이 책은 그 덕목에 매우 부합하는 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징의 모든 것.

위 책을 조금 더 발전시킨게 동일한 저자가 지은 바로 이 책, 상징의 모든 것, 입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위의 상징의 비밀, 정도만 읽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하고, 겹치는 상징의 의미가 제법 있기에 굳이 이 책을 별도로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만, 이 책은 그 범위가 좀 더 넓은 범위에 걸쳐져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도판들이 책을 수놓고 있어서 상징에 대한 이해를 넓혀줍니다.

 

 

 

 

 

 

세계 문화 상징 사전.

개인적으로 매우 추천하는 책입니다. 이번에 배송받은 책이기도 하구요. 물론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도판들이 모조리 흑백이라는 점이겠지만.. 뭐, 94년도에 출간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도판이 달려있다는 점에서 도리어 대단하다고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사전이고, 표제어는 영어 알파벳으로 달려있기에, 정말 사전처럼 활용해도 좋을 것이나, 꼭 그렇게 쓰지 않고 그저 앞에서부터 읽어나가도 괜찮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읽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책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물론 내용이 위의 상징의 비밀, 등과 같은 책들에 비해서 좀 사무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참아야겠지요.   이런 상징에 관련된 책을 조금씩 들여다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지요. 예를 들어서 성당에 세워진 성모마리아상이 왜 아몬드 모양의 광원에 둘러싸여서 있는지, 왜 제단은 4개의 발을 가지는지, 7개의 단을 가지는지 등과 같은 의문에 답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리스 로마 신화 등과 같은 서구의 상징에만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상징의 의미가 기록될 수 있도록 저자가 힘쓴 모습이 책에서 잘 드러나지요. 그러나 이것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하듯이 완전한 상징 사전은 존재하지 못한다고. 우리들의 의식이 발전해나가면 해나갈수록 다양한 의미와 상징이 추가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p. s. 몇 가지 다루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조지프 캠벨의 저서들이겠지만..

아직 제가 접해보지 못했네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대해서는 번역된 길가메시 서사시를 보는 것도 좋을 듯 하고, 캠벨의 저서는.. 다양하게 나와있으니 찾아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황금가지, 도 추천할만한 책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인류학책에 더 가까운 책이기도 하고, 솔직히 약간, 아니 상당히 지루할 수도 있으니 (저만 그럴지도요) 여기서는 제외하겠습니다.

또한 쓰면서 저를 위로해준 크리솃 미셸의 What you do에 심심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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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3-19 12:10   좋아요 0 | URL
저는 캠벨보다 엘리아데 책이 더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책 잘 구경했어요. 잠깐 들렀다가 인사남기고 갑니다.^^

가연 2012-03-21 18:54   좋아요 0 | URL
엘리아데의 저서도 빠뜨렸고.. 카시러의 책들도 빠뜨렸으니 부족한게 많은 리스트이지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빵가게재습격 2012-03-22 22:06   좋아요 0 | URL
카시러의 <국가의 신화>가 절판된 건 좀 아쉬워요. 다만 카시러의 독자들이라면 주저가 번역되는 걸로 위안을 삼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가연 2012-03-24 11:59   좋아요 0 | URL
옳은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카시러를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이 리스트를 쓸 때 떠올리지를 못했네요.

버벌 2012-04-01 11:39   좋아요 0 | URL
우와.... 제가 타로카드를 했었어요. 공부를 하면서 위의 책들을 꽤나 찾아서 읽었는데. 조지프캠벨의 책 신화시리즈는 소장중이지만. 읽기는 힘들어요. 절대 재미있지는 않거든요.

가연 2012-04-03 10:01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습니다ㅠ 아하하.. 저도 타로에 관심이 있어서 상당히 어릴때 좀 해보긴 해봤는데..ㅋㅋ 저의 경우에는 저 상징의 비밀, 이라는 책을 읽으니 괜스레 타로가 하고 싶어지더라구요. 또 어렸을때 읽었던 게 그리스신화랑 타로를 연결시켜서 해석하던 책이 있었는데 제목이 잘 기억이 안나서 안적어놓았습니다. 음.. 캠벨의 책은 저의 경우에는 그럭저럭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사람들마다 아무래도 다 느낌이 다르니깐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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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경쟁 -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
맹찬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따뜻한 경쟁.

 

 

 

 

 

1.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저는 탐탁지 않은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보통 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 전에, 잘 아는 책이 아니면 인터넷으로 검색하거나 다른 책들을 찾아보면서 책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모아보려고 노력하는데, 이 책의 제목으로 검색을 하자 이 책의 저자의 아내 되시는 분이 본인이 활동하는 카페에 올린 잡담 겸 알림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글의 덧글들에는 한 번 주문해서 읽어볼께요, 하는 댓글이 몇 개가 달려있었고 말이지요. 그 후 다시 검색을 하자, 이번에는 저자의 블로그에 서평이 올라온 인터넷 주소가 모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실 책을 쓴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책이 잘 알려지기를 바라고, 책이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며, 동시에 많이 팔렸으면, 하는 생각을 감출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사실 인터넷에서 저렇게 글을 올리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본인의 책을 본인이 홍보하겠다는데 이상할 것도 없고, 적어도 돈 주고 알바를 시켜서 본인이 아닌 척 홍보하는 것 보다는 훨씬 당당하고 좋지요. 그러나 저는 적어도 책에 있어서는, 책 자체로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책을 알리는데 있어서는 단순한 광고문구가 아닌, 적어도 독자의 주체적인 생각이 함께 하여야만 한다고 여기고 있기에, 저런 모습이 솔직히 좋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요즘 세상은 정보 과잉의 세상이기에, 훌륭한 책도 많은 정보들에 밀려서 묻혀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막연히 훌륭한 책이라고 해서 잘 알려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훌륭한 책이 훌륭하다고 알려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을 거라면 굳이 출판할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일방적으로 정보를 알리기 위한 것이라면 냉전시대의 국가에서 뿌리는 선전 용지와 다를 바 없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일종의 편견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네, 사실 저는 이런 편견을 조금 가진 채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2.

 

 

  지금껏 인문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면, 점차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이었지요. 인문관련 서적을 읽고 있을 때는 잘 못 느끼지만, 소설이라던가 그 외에 에세이를 읽고 있을 때는 정말 스스로가 빨리 읽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별로 비슷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야기하자면 마치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달고 뛰다가, 잠시 벗어두며 뛰면 스스로가 빨라지고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지요. 물론 다른 장르가 생각할 부분이 적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인문계통의 책들이 생각을 훈련시킨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시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종의 정신적 운동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는 생각보다 매우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이 책은 딱딱한 이론을 정립하거나 빈틈없는 논리 전개로 차갑게까지 여겨지는 그런 인문 서적은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에세이에다가 사회현실을 섞은 그런 책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읽어나가면서 점차 저는 제가 품고 있던 편견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책은 읽을 만한 책이다, 라고 말이지요. ‘따뜻한 경쟁’ 이라는 책은 이미 제목에서 모든 것을 다 함축하고 있습니다. 경쟁을 하되 따뜻하게 하자. 그렇다면 어떤 게 따뜻한 경쟁인가? 이 책에서는 따뜻한 경쟁을 스위스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실패를 용납할 수 있는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며, 다양한 경쟁이 이루어질 때를 말하고, 공교육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상태에서 여러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경쟁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이지요. 우리 속담에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라는 말이 있던가요, 궁지에 사람을 몰아넣지 않는 것, 이 경쟁이 끝나도 아직 살아갈 길이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따뜻한 경쟁의 요체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따뜻한 경쟁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낄 수 밖에 없지요. 고3수험생들은 수시로 대학에 이미 합격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수능을 마치고 자신의 인생이 끝난 듯한 느낌을 받으며, 회사에 입사할때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서 스펙을 쌓지 않을 수 없으며, 입사하는 것에 계속 미끄러지면 이윽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도 있고 말이지요. 하지만 공무원 시험은 수능보다 더 어렵습니다. 수능이야 치고 난 뒤에는 세상이 끝난 것 같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러 길을 택할 수 있게 되지만, 공무원 시험은 정말로 자신의 평생직장을 구하는 것이라 더 신경 쓸 수 밖에 없고, 더 목숨을 걸며 준비할 수 밖에 없지요. 전국을 둘러보면 수많은 경쟁자들이 있습니다. 예전에야 네 꿈이 뭐니? 라고 물었을때 9급 공무원이라고 말하면 꿈이 낮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9급 공무원이라도 감지덕지라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이들 중 저학력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부분 대학을 나왔고 고등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이지요. 비싼 돈 들여서 대학의 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대학에서 받은 교육을 써먹지 못하고 대부분 전혀 다른 곳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대학이라고 딱히 무슨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졸업생들이 다시 대학에서 조교나 강사로 일하지 않는 한, 그러니깐 직접적으로 대학에 관여된 일자리를 구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 몰라라, 식으로 내버려두게 됩니다. 이런 사회적 문제의 근원은 무엇에 기인할까요?

 

 

3.

 

 

  이 책의 저자는 코리안 패러독스와 스위스 패러독스라는 용어를 정의하며 저 현상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먼저 코리안 패러독스란 대학 진학률이 80퍼센트가 넘는데도 젊은이가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현상을 뜻하며, 스위스 패러독스란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은 스위스가 매우 높은 국가 경쟁력을 유지하는 현상입니다.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젊은이가 대학을 진학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젊은이의 집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대학은 나와야 먹고 살 수 있다, 라는 말에서부터 주변에 모두가 대학을 나왔다, 요즘 세상에 고졸을 봤느냐, 나와서 뭘 하며 살 건데, 라는 말들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 젊은이는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모의 말에 따르게 되며, 그 중 정말 한 둘은 나와서 살겠다고 부모와 인연을 끊다시피 하면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모색하려고 하지만 세상의 험악함에 질려서 결국 좌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언론에서는 이야기합니다. 개천에서 용났다, 고학생에서 대기업 회장이 되었다, 등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힘든 생활을 거쳐서 결국 잘살게 되었다는 사례가 언론에 날 정도라면, 얼마나 드물면 그렇게 언론에 기사화되겠냐고 말입니다. 물론 저 의지를 본받으며 잘 해나가면 여러분들도 할 수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기사화된 것이리라고 짐작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기사화가 된다는 것 자체가 그런 현상, 개천에서 용난다거나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우뚝 선다거나 하는 현상이 드물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대학에 진학했다고 해서 딱히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겨우 겨우 기업에 취직하는데 급급할 뿐이고, 대부분 그렇게 취직도 하기가 쉽지 않아서 학교 졸업을 차일피일 미루고 말지요. 게다가 대기업들은 쉬쉬하면서도 아무래도 수능 성적에서 상위권에 위치하는 대학들, 소위 말하는 명문대생들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명문대가 아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이중, 삼중으로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전공한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을 인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지요. 일부는 대학교 간판을 바꾸기 위해서 편입을 하거나, 대학원을 명문대로 간다거나 하기도 하지만 거기에서도 차별은 끊이지 않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든지 진학하지 않든지 문제점이 끊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에 무조건 진학시키려합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저런 문제점조차도 겪지 못하게 되고, 좀 더 넓게 말하자면 최소한의 기회조차도 박탈된다는 이야기이며,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개천에서 용나는 그런 사회는 이미 예전에 끝났으니깐 그렇겠지요. 그 바탕에는 기술직에 대한 천시가 어느 정도 깔려있다고 봅니다. 대학에 가서 고등교육을 받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기술직은 힘들기만 하고 돈을 별로 못 벌고,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대접을 많이 해주지 않습니다. 어느 직업이든 톱니바퀴처럼 꼭 사회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직업들인데 신분이 마치 조선시대처럼 나뉘어져있으니, 불만이 쌓이고 자신의 자녀만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요. 교육만이 유일한 신분상승의 길이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는 길이, 경쟁의 방법이 단 하나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스위스의 입장은 다릅니다. 스위스에서는 직업교육을 받는 것을 장려하며, 대학 졸업장에 대한 집착이나 콤플렉스가 없다고 합니다. 공교육에서는 선생님은 학생에게 ‘꼭 네가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며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꼭 전합니다. 우리는 스위스의 롤렉스 시계를 시계 중에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시계내부의 부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모두 대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학위를 가지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마이스터’라는 이름으로 대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충분히 존중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직업이 시계수리공이라고 한다면 뒤돌아서서 수군거리지만, 스위스에서 직업이 시계수리공이라고 한다면, 게다가 롤렉스 시계를 만든다고 한다면 대단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이들은 많은 보수를 받고 개인의 상황판단만으로도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술직에 비하면 전혀 딴판이지요. 직업을 고를 때 중요한 것은 본인의 적성과 흥미, 재능도 맞아야겠지만, 보수와 사회적 인정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스위스는 우리나라에 비하여 다양한 길을 열어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

 

 

  하지만 따뜻한 경쟁, 이라는 이 책의 모든 내용에 수긍이 가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스위스와 우리나라의 비교가 정말 가능한가, 라는 것이지요. 몇 가지 수치를 따져보겠습니다. 스위스의 인구는 2008년기준으로 758만명이고 크기는 4만1290제곱킬로미터입니다. 우리나라는 2010년기준으로 4875만명입니다. 나라의 크기는 10만 210제곱킬로미터이고 말이지요. 스위스의 인구가 2년 사이에 급증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최소 서너배는 인구차이가 나며, 나라의 면적도 두배 이상 납니다. 그리고 스위스는 내륙국이고 우리나라는 반도국가라는 점도 생각해볼만한 점입니다. 저자는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스위스의 시민들이 깨어있는 시민들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스위스가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된 배경은 저렇게 인구수가 적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하리라 여겨집니다. 저 정도 인구수라면 깨어있는 시민들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이 있고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 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 단체는 각자의 목소리에 뒤덮여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대표할 사람들을 뽑아서 정치를 시킵니다. 그러나 스위스는 어쩌면 그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국가가 아닌가, 굳이 대표자의 귄위를 강화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혼란에 빠지지 않는 그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렇다면 스위스의 정치 체제나 교육 체계를 단순히 우리나라에 끌어들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가 되겠지요. 책에서는 직접민주주의의 한계점을 이야기하면서 구색을 맞추려 하고 있습니다만 곧이어 시민들이 스스로 자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용을 넘겨버립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스위스의 예를 들다가 갑자기 브라질의 시민참여의 사례로 건너뛰는 부분은 그저 자신이 경험한 부분을 최대한 많이 넣으려는 욕심이 아닌가, 정도로까지 보입니다. 이왕 다른 국가를 더 넣을 생각이었다면 시민참여부분뿐만 아니라 책의 주제에 맞게 경쟁부분에서도 다른 나라들을 충분히 조사하는 것이 옳겠지요. 책의 말미에는 뜬금없이 한반도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름의 의도가 있었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전체적인 주제와 겉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남북한이 따뜻한 경쟁을 한다는 말이나 남북한이 공존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닌 이상은 말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의도로 적어둔 것이라고 할지라도 사실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청년들의 경쟁 문제는 따뜻한 경쟁과 서로의 공존이 해답이 될 수 있지만, 남북한 관계는 (물론 중간 중간에 공존도 하고 경쟁하는 시기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며 근본적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고 할지라도 해답자체가 다른 이야기들을 억지로 넣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긍정적입니다. 단순히 따뜻한 경쟁을 하자, 라고 원론적으로 외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어떤 방식을 택하면 좋을까, 모색해본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경쟁 이외에 다른 길을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스위스처럼 학교에서 교사들이 아이들을 붙잡고 대학을 안가도 이쪽으로 가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어, 라고 이야기하는 모습들, 기술직에 있는 사람이 잘릴 위험이 없이 관리직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모습들 등을 말이지요.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스위스는 스위스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에다가 서로의 인구나 상황도 다르니 영영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 저렇게 교사들이 학업 지도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하다고 할 것이며,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봉급 문제로 넘어가게 되고, 블루칼라들의 지위가 높아지더라도 화이트칼라들은 여전히 블루칼라들에 대해서 배타적일 것이고 그러다보면 블루칼라들은 배타적인 태도를 이기지 못해 그들끼리 조직을 만들고 맞서 싸울 것이며 그러다보면 혼란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재해있다고 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잠시나마 머릿속에서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정답조차 알지 못하고 헤매는 것 보다 최소한 정답이라도 안다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스위스의 체제가 정답일지는 좀 더 세월이 흘러봐야 알겠습니다만, 적어도 교육만이 거의 유일한 상위 계급으로의 통로가 되어버린 우리나라보다는 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남들에게 따르게 하려 할 때에 날카로운 논리를 내세우며 서로를 논박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논리와 논리가 있으면 설령 상대방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합리적인 이상 이해하고는 따를 수 있으나, 감정과 논리가 맞서게 되면 서로를 항상 엇나가게 되고, 감정과 감정이 맞서는 경우에는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는 한 상대방의 감정에 거의 대부분 평행선을 달리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논리가 아니더라도, 차가운 논박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같은 꿈을 꾸게 만들면 됩니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요. 이 책이 우리사회에 만연한 차가운 경쟁을 이기고 서로가 존중받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꿈’의 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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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3-12 14:36   좋아요 0 | URL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가연 2012-03-13 12:30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빵가게재습격 2012-03-13 13:21   좋아요 0 | URL
가연님 여쭤보고 싶은게 한가지 있는데, 혹시 과학사 책으로 많이 읽는 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과학의 탄생>을 제외하고 표준적(?)으로 많이 읽는 과학사 책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데, 염치불구 부탁드릴께요.^^;

가연 2012-03-13 16:54   좋아요 0 | URL
아.. 부탁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만, 죄송하게도 제가 과학사에 관련된 책을 그리 많이 접하지 못해서 추천드릴만한 책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안 읽은 책을 읽은 것처럼 말씀드릴수는 없으니..ㅠㅠ 지금 예로 들어주신 과학의 탄생, 이라는 책도 방금 빵가게재습격님이 언급해주셔서 찾아보았습니다. 지금껏 제가 몇몇 과학사, 라고 이름이 붙은 관련 책들을 접해보긴 했으나, 대부분 고대(과학과 철학의 구분이 없던 시대)로부터 거슬러올라가서 아래로 내려오는 구성을 큰 틀로 가졌었는데, 고대의 과학을 다루는 부분은 철학의 역사를 다룬 책들만 못하고, 진정한 의미의 과학이 시작된다고 개인적으로 여기고 있는, 과학적 방법론이 대두되는 시기에 있어서는 과학철학관련 서적을 보는게 나은 것 처럼 보여서 전반적인 과학사를 다루는 책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고 여겨지지 않아서 ㅠㅠㅠ 별로 흥미를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게다가 물리나 화학을 기준으로 보는가, 생명과학을 기준으로 보는가(저는 사실 물리를 좋아하지만 배운 것은 생명과학분야를 배웠기에...)에 따라서 책의 선택도 매우 달라질 수 있을테고 말이지요. 괜히 죄송스러워서 이렇게 길게 주절거려놓았습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해서 저보다 과학 관련 책을 훨씬 많이 읽은 분께 부탁드리는게 옳을 듯 합니다.

빵가게재습격 2012-03-13 22:30   좋아요 0 | URL
어이쿠, 댓글을 보니 제가 죄송하네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연님.^^
 
<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날이 추워졌다가 다시 따뜻해졌다가, 어제는 비가 내렸네요.

 

그리고 지금도.

 

어쨌든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마지막까지 꿋꿋하게 과학부분을 추천해봅니다, 풋. 과학자가 지은 에세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책은 하이젠베르크가 지은 '부분과 전체'겠지요. 물론 전반적인 교양과학부분에서라면, 리처드 도킨스 등이 펴낸 '이기적 유전자' 등등과 같은 진화론이 득세를 하고 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진화론 관련 서적이 널리 알려지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사회진화론때문에, 그러니깐 진화론과 사회과학의 연계가 다른 분야에 비하여 수월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진화론과는 동떨어진, 물리학자의 에세이인 '부분과 전체'가 그나마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은 정말 기적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 '부분과 전체'에 맞먹을 만한 에세이가 여기 출간되었으니, 유카와 히데키가 지은 바로 이 책입니다. 유카와 히데키는 중간자의 존재를 예견하고, QCD(강력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일본의 물리학자이지요. 일본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탔다는 점이 많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는지, 아직도 일본에서는 필명을 '유카와'로 쓰는 과학저술가도 많으며, 여러 매체에서 이름을 빌려 쓰고 있는데, 그 중 친숙한 예를 하나 들자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 중 '갈릴레오' 시리즈의 유명한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는 이 유카와 히데키의 오마주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점에 대한 해명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것 처럼, 유카와 히데키의 저서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읽어야 할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을 통하여, 부분과 전체처럼 진리에 대한 탐구와 겸손함을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여덟마리 새끼 돼지.

사실 얼굴이야 라이벌인 절대 동안 리처드 도킨스에게 좀 뒤쳐지지만, 그 외에 다른 면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가 리처드 도킨스에게 뒤쳐지는 부분은 없지요. 도리어 더 뛰어난 부분도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특히 제 개인적으로 여기는 바로는 글을 풀어나가는 부분에 있어서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들은 읽다가 중간에 멈추어 쉰 적이 많지만,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은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놓을 수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스티븐 제이 굴들의 사후 10주년을 맞아, 그가 연재한 글들 중 엄선해서 에세이를 묶은 책인데, 사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또다른 책인 '판다의 엄지'와 같은 책들과 내용이 약간은 겹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판다의 엄지도 잡지에 연재한 글들을 묶어서 낸 책이라서) 하지만 설령 조금 겹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동일한 말을 반복하더라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능력을 이 책의 저자는 가졌기에, 여기에 주저없이 추천합니다.

 

 

 

멀티 유니버스.

 벌써 폭풍이 몰아치듯 한 번 알라딘 서재를 휩쓸고 간 책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시 추천하는 이유는 그만큼 기대되기때문이겠지요. 브라이언 그린은 그의 저서 '앨러건트 유니버스' 로 이름을 알린 초끈이론 학자이며, 이 책도 분명 끈 이론에 바탕을 두고 다중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가리라고 여겨집니다. 사실 초끈 이론은 불완전합니다. 아직 실험적 증거는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았고, 초끈 이론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들 중에는 정말 터무니없다고만 여겨질 정도의 현상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끈 이론의 지지자들은 말합니다. 중력자(중력을 매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가상의 입자)를 스스로 예측해낼수 있는 이론이 어디있겠느냐, 무엇보다도 이보다 더 간결하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과학 이론이 어디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사람은 대칭되고 조화로운 모습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끼고,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만족감을 느낍니다. 아름다움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현재 존재하는 궁극의 이론들 중에서 가장 앞서 있는 것은 바로 초끈 이론이며, 그 아름다움에 끌려서 많은 물리학자들이 그들의 인생을 바치며 연구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아름다움의 전도사 브라이언 그린이 이 책에서는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할 지 기대가 안될 수 없네요.

 

 

 

미셸 푸코.

언제나 다른 사람의 평전을 읽는 것은 저를 들뜨게 만듭니다. 평전은 역사책과 인문책의 그 중간에 위치하여, 그 평전의 대상이 된 인물의 인문학적인 업적에 대한 이해가 쉽도록 만들며 동시에 역사책처럼 딱딱하지 않게 옛날 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물론 일전에 읽었던, '데리다 평전'과 같은 예외도 있긴 합니다만, 대부분의 경우에 평전은 저처럼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좋은 약이 되지요. 이 책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보자면, 미셸 푸코의 개별 인문학적 성과를 흡수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나, 그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의 성과가 이런 때 나왔구나, 그의 심리가 이랬었구나, 라는 것을 생각하며 발자취를 쫓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입니다. 물론 다른 평전들과 마찬가지로 '객관성의 문제' 와 '신뢰의 문제' 가 여전히 남아있겠습니다만, 그런 어려움을 뒤로 하더라도 푸코의 생애와 생각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는 싫네요.

 

 

고백록.

개인적으로 매우 추천하고 싶은 책이 바로 이 '고백록' 입니다. 생각같아서는 1, 2를 모조리 추천하고 싶었지만, 둘 중 한 권만 추천하게 된다면 그의 유년기가 담겨있는 1권을 추천하고 싶군요. 사실 이 1권을 추천한 것에는 제 스스로 생각할때에 나름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루소는 이 유년기에 대한 고백을 통하여, 대부분의 성격 형성과 자아의 발달은 어린 시절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사람입니다. 이후 이 책은 프로이트에게까지도 영향을 주어, 자아의 형성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또한 고백록은 적어도 제가 생각할때에는 흔히 루소하면 떠오르게 되는 '사회계약론' 보다 훨씬 더 가치가 높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얼마만큼이나 진솔할 수 있을까요? 루소는 고백록의 서두에서 이야기합니다. '다른 어느 누구라도, 나 자신만큼 '장 자크 루소' 라는 인물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라고 말이지요. 물론 실제로 자기고백을 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고백을 하다보면 저절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으로 내용이 각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루소도 그 영향에서 아주 벗어낫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루소와 같은 흥미로운 인물이 과연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리라 여겨집니다.

 

 

 

10기 마지막 신간 추천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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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전부터 써보고 싶었던 글을 끄적거리려합니다.

사실 판타지 나부랭이, 라고 비난을 들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정말 멋진 작품들도 많으니깐...

어렸을때부터 읽어왔었던 판타지 소설들에 대해서 끄적거려보려고 해요.

물론 특히 기억에 남는 소설들...

대부분 개정판이 나왔지만 일부러 옛날 표지를 골랐답니다.

 


 

가즈 나이트.

아.. 정말 표지만 봐도 아련한 기분이 드는 작품이네요. 저는 이 책을 처음으로 판타지의 길에 빠져들었습니다. 가즈 나이트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나중에 영어를 좀 배우고 나니깐. God's Knight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제목 그대로, 세계의 주신 밑에 7명의 기사들이 있는데, 그 기사들이 소위 말하는 판타지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며 모험을 겪는 내용이랍니다. 특히 이 판타지가 저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 듯한 시점이었습니다. 이 가즈나이트의 저자의 지금 필력과 비교하자면, 그 당시 저자의 필력이 썩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하는 듯한 기분으로 감정이입하면서, 주인공이 악의 무리와 맞서 싸울때는 저도 손을 꾹 쥐었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지금 다시 읽어보라면 수많은 문제점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왜 주인공은 무슨 일만 터지면 수도로 가는가,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러니깐, 중학생때 읽으면 딱 좋은 책.

 

 

 

드래곤 라자.

 앞의 가즈나이트를 중학생때 읽었다면, 고등학교때는 이 책을 읽어봄직합니다. 지금은 판타지 소설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버린, 네크로맨서 이영도의 작품인데요, 왜 네크로맨서라는 이름이 붙었는가 하면 이영도씨가 인터넷 연재를 할 때 밤늦게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연재란에 깨어있도록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지요. 이 책의 주인공은 세상물정 알거 다아는 후치, 라는 소년입니다. 그를 중심으로 그 주위의 중늙은이이자 현자이며 궁수 칼, 뛰어난 전사인 샌슨, 마법사 아프나이델, 프리스트 제레인트와 엘프 이루릴, 나이트호크 네리아 등이 파티Party를 이루어 드래곤에게 사로잡힌 그들의 마을 사람들을 위한 몸값 마련에 나서지요. 정말 이상적인 파티입니다. 밤도둑, 엘프, 마법사.. 판타지 세계를 모험하려면 저 정도 파티는 되어야겠지요. 그리고 각 인물들은 독특한 개성을 품고 있습니다. 독설가인 칼과 그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수시로 멋진 말을 내뱉는 후치, 생각없지만 무술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샌슨 등.. 그런데 사실 이 책은 위태위태한 책입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후치가 하는 수많은 치기어린 말들은 어느새 현학적인 말이 되어 소위 '잘난체' 하는 문학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고, 정말 조금만 덜 나아갔다면 주인공의 개성이 확 죽어버렸을 수도 있었지요. 그 미묘한 틈을 잘 포착한 소설이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주인공 보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책의 말미에 다른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은 소년에 불과한 후치입니다. 수백년을 살아온 대마법사도,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갈 드래곤도 결국 그 소년의 지혜를 빌렸지요. 현실이라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겠지만, 뭐 어때요, 재미있으니깐 용서해줍시다.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이영도씨의 작품은 사실 어디 하나 버릴 작품이 없다는 게 중론이지요.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폴라리스 랩소디, 라는 작품은 버려도 좋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폴라리스 랩소디에서는 이영도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인, 관념의 물화가 너무나 두드러지기에 읽기에 정말 어려운 소설이지요. 재미있으려고 읽는 판타지를 굳이 머리싸매며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머리싸맬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머리를 쓰게 만드는 책은 적절한 재미를 유발시키는데 충분한 도움이 됩니다. 이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연작은 그런 의미에서 재미와 주제 모두를 잘 잡은 작품이라고 여겨집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내용은 네 종족인 나가, 레콘, 도깨비, 인간이 그들의 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는데, 나가 종족의 정복 활동에 남은 세 종족이 연합해서 맞서 싸우는 이야기이지요.

 나가는 그들의 태생적인 한계(나가는 일반적으로 뱀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하지요, 이 책에서는 그 내용을 거의 비슷하게 차용합니다.)로 인하여 너무 추운 북방에서는 살지 못하지만, 그들의 신을 어느 나가 여성에 유폐시킨 이후에는 북방한계선을 넘어서 계속 진격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레콘(닭의 머리를 가진 물리적 힘이 매우 강한 종족)들은 애초에 국가를 잘 이루지 않지만 북방에 살고 있던 인간들로서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지요. 도깨비들은 그들의 성인 실재하는지조차도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는 '즈믄누리'에서 살고 있었고 말이지요. 하지만 신을 유폐시키고 균형을 깨고 정복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경구대로 그들은 연합을 해서 나가를 상대합니다. 동시에 나가에 대한 극한의 증오심을 품고 있는 나가살육자, 케이건과 그의 동료들 레콘 티나한, 도깨비 비형은 유폐된 신을 구하기 위하여 다른 신들의 화신을 찾아나서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얽혀서 나가 일족에서 일종의 배신자가 된 륜 페이를 살해하기, 혹은 구하기 위해서 그의 누나인 사모 페이가 북방 한계선을 넘어서 들어오는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무슨 서스펜스 추리영화를 광고하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최종장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피를 마시는 새가 시작합니다. 피를 마시는 새의 내용은 눈물을 마시는 새의 결말부분의 내용을 이미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책 전반에 걸쳐 흐르는 농담에 대해서는 조금 끄적거려야겠네요. 책에서는 고대로부터 이런 농담이 전해져내려온다고 하지요. 피, 눈물, 독, 물을 각각 마시는 형제 새들이 있는데, 그 중 가장오래 살아가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이며, 가장 일찍 죽는 새는 눈물을 마시는 새라고 말이지요. 그 이유는 누구도 몸밖으로 흘리기 싫어하는 소중한 것인 피를 마시기 때문에 피를 마시는 새는 오래 살아가며, 누구나 몸밖으로 흘려 내보내는 나쁜 것인 눈물을 마시기에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일찍 죽는다고 말이지요. 각각의 이야기가 제목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아보면서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룬의 아이들.

한때 전민희 작가를 매우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이도 있고.. 판타지에 예전만큼 깊게 빠져들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렸을때는 나름 순수했었기에 (엣헴) 전민희 작가의 책들을 읽으면서 이 뒤가 어떻게 될까 심각한 고민을 했었던 적이 많았지요. 사실 그녀의 초기작이자, 사람들에게 본인의 이름을 각인 시킨 작품은 '세월의 돌' 인데, 아무래도 저에게 더 깊게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옆의 '룬의 아이들'이라서 룬의 아이들부터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룬의 아이들은 현재 '윈터러' 편과 '데모닉' 편으로 이루어져 발간되어있는 중입니다. 룬의 아이들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주인공은 '아이' 이고, 각각의 편에서 그 주인공인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룬의 아이들 기획은 그 예전 소프트맥스(창세기전으로 유명한 그 소프트맥스)가 한참 포리프(브라우저 기반으로 게임이나 채팅을 즐길 수 있었던)를 서비스 중일때 설정이 공개된 적이 있는데요,

 그때 상황이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소프트맥스와 연합해서 게임과 책으로 동시에 나올 예정의 기획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게임은 기본 기획과는 좀 많이 지연도 되고.. 좀 다르게 '테일즈 위버' 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되고 있는 중이지만(저도 한때 이 테일즈 위버를 열심히 한 적이 있었지요) 소설은 세월의 돌 이후, 태양의 탑이라는 작품이 불의의 사건으로 출판이 중지된 후 오래 지나지 않아서 발간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발간된 것은 룬의 아이들 윈터러로, 윈터러, 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 겨울을 닮은 아이 '보리스'의 이야기였습니다. 가문이 그의 삼촌의 손에 의해 멸문당하고,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그리고 함께 삼촌의 손에서 살아남았던 형도 떠나버리게 되며, 그나마 만났던 조력자처럼 보였던 백작도 그에게 도리어 조력이 아닌 세상의 엄혹함만을 가르쳐주며 이용하려듭니다. 세상 밑까지 떨어져버린 보리스는 구사일생으로 진정한 조력자를 만나게 되지만, 언제나 그의 삶은 보리스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좋았던 것에서부터 시작한 적이 없었'던 일들로만 가득차게 됩니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난 뒤에도 보리스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비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고작 15살에 불과한 주인공이 너무 어른스럽게 말을 하는 것 같다, 라고 말이지요. 사실 보리스의 대사들, 예를 들자면 '날 죽이고 그 시체를 가져'와 같은 말을 지금 15살인 중2학생이 말한다면 그야말로 손발이 오그라들겠지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성장기로만 판단하자면 읽다 보시면 마음 한 구석이 찡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하네요.

윈터러가 어두침침한 이야기라면 데모닉은 표지에서부터 의미하듯 상대적으로 밝은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태생부터가 고귀한 공작가의 아들인 '조슈아' 가 주인공인데, 다른 룬의 아이들이 그렇듯 조슈아도 어딘가 결함 혹은 축복을 안고 있지요. 2부의 부제 데모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슈아는 악마적인Demonic 천재입니다. 완전기억능력을 가지고, 어떤 것이든 다 이해하고, 모든 면에서 재능을 가진, 그리고 강령술을 할 수 있는 그런 천재말이지요. 그러나 천재는 항상 광기에 맞닿아있듯, 조슈아도 광기와 천재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지금껏 그의 가문의 다른 데모닉들은 대부분 그 광기때문에 제대로 살아남지를 못했었는데, 과연 그는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태양의 탑.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작품입니다. 결국 표지와 출판사를 바꾸어 이렇게 출간 중에 있는 작품인데, 예전 내용까지에도 아직 이르지 못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은 따라잡았는지 모르겠네요. 많은 전민희 작가의 팬들이 어서 출간되기를 기대하는 작품입니다. 전민희 작가의 이름을 알리게 된 '세월의 돌'의 이전 이야기입니다. 사실 전민희 작가는 세월의 돌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연작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 책은 그 연작의 일부분인데, 지금은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네요. 지금 와서 이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을 제법 발견할 수 있습니다. 뒤에 '룬의 아이들'의 배경이 되는 '학원' 생활이라던가, 룬의 아이들의 이름이나 캐릭터성이 (물론 동명이인이지만) 살짝 보여지는 부분도 있으며, 전작 세월의 돌이 밝고 경쾌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면 점차 음침한 내용이 주가 되는 그런 경계점에 있는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네요.

 

 

 

퇴마록.

어렸을 때 정말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했었던 작품이 바로 이 '퇴마록' 입니다. 단순한 공포이야기는 제가 어렸을때도 정말 많이 나왔었지요. 지금도 기억나는 책이 '쉿'인데, (아마 셀로판지로 그림을 보면 귀신이 보이고 하는 류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걸 가지고 있는 여자애한테서 빌려가면서 읽다가 다보면 재빨리 돌려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차마 살 수는 없었던 것이, 너무 무서워서 였지요. 그런데 그런 류의 책을 넘어서, 이제 귀신을 퇴치하는 작품이 나왔을때, 저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도 느꼈습니다. 맨날 도망가고 저주받아 죽는 사람들이 이제 반격을 시도하다니, 정도의 느낌이었달까요. 하지만 이 책의 국내편이나 세계편 정도까지는 귀신에 대해 맞서 싸우는 퇴마사들의 노력이 주가 되었다면, 혼세편 이후에는 이제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라는 것이 중심 주제가 되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아, 이건 여담인데 퇴마사라는 직업도 실제로 있기는 있다죠. 그리고 소설의 중심되는 인물인 박신부의 엑소시즘의례도 실제로 카톨릭에서 장엄구마식이라는 이름으로 있는 의례이기도 합니다. 다만 소설과는 좀 많이 동떨어져있다는게 흠아닌 흠이 되겠지요. 지금은 개정판이 나오고 있는 중인데, 원작의 팬들을 고려하여 거의 그대로 내용을 진행하기로 작가가 마음을 먹었나봅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왔으면, 하는 생각에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이 깨끗한 표지로 다시 출간되는 것이 기분 좋네요.

 

 

 

 

 

 

 

p. s.  헉헉.. 여기까지... 

         저는 시간이 좀 생겨서.. 끄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네요. 

         아직 소개 못한 다른 판타지들은 다음 이 시간에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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