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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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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만약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으로 쳐서 우리의 두뇌를 일개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자네가 쓴 대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 전혀 없다고 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책은, 필요하다면 우리 스스로 쓸 수 있을 거야.

 

  지금은 고인이 된 오규원 시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그 분 생전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저 혼자만의 일방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지만, 우연히 고인의 무덤가에 찾아가본 적이 있습니다. 꼭 들러야겠다, 라고 찾아가본 것은 아니고, 사진을 찍으러 강화도 전등사에 들렀다가 고인의 장례식이 수목장으로 치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잠깐 들렀었지요. 시인의 마지막 시는 제자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꼼꼼하게 적었던 4행시였고, 그 4행시의 마지막 행인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대로 시인은 전등사 어귀의 나무와 더불어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들렀던 때는 장례가 치러진 후 그리 오랜 시일이 지나지 않았던 때였기에 더욱더 저는 숙연한 기분에 휩싸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터벅터벅 전등사로 걸어온 저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인생무상’ 과 같은 생각이 아니라 고인이 된 시인의 시 ‘프란츠 카프카’ 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오규원 시인의 시는 정말 특이합니다. 여러 학자들과 문학가들의 이름을 나열해두고 그들에게 가격을 매깁니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 와 함께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라는 이름이 붙은 커피를 마시지요. 사상가들은 비싼 가격(이라고 해도 1200원)이 붙어있었지만 여러 문학가들, 소설이나 시를 쓴 사람들은 싼 가격(800원)이 붙어있습니다. 아니, 카프카가 800원이라구? 전등사로 내려오면서 든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도대체 왜 카프카를 800원으로 설정했는가, 였습니다. 사실 지금 와서는 별로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해야 할 주제는 아닌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그 생각에 집착했었습니다. 문학가들이 폄하 받는 현실을 그린 것이다, 라는 해석에서부터 시인이 그냥 카프카가 마음에 들었다는 건가, 혹은 카프카와 같은 길을 걷겠다는 의지인건가, 등과 같은 해석에까지 말이지요.

 

  카프카라는 이름은 워낙 특이하기에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와 같은 작품을 보면서 저는,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이 카프카의 영향을 받았다고 자인을 하더라도, 자신의 작품이 독자들의 뇌리에 바로 남도록 하기 위해서 저런 이름을 붙인 것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였지요. 이 카프카라는 이름은 ‘까마귀’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가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카프카의 이미지와 정말 잘 들어맞는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왠지 혼자서 노는 것 같고, 왠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런 이미지 말입니다. 제가 읽은 그의 작품인 ‘변신’, ‘성’ 을 보면 정말 알 수 없는 불안과 뿌리 깊은 근원적인 고독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품들이 거의 다 미완이라는 점도 거들었지요. 그래서 제 속의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는 항상 어딘가 도망치고, 불안해하는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이 책 ‘카프카 평전’ 은 이런 카프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서입니다. 다른 평전들과 마찬가지로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쳐서 말년에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하고 있지만, 저자가 카프카를 서술하는 태도는 다른 평전들에 비하면 상당히 열정적입니다. 데리다 평전, 에서처럼 건조하지도 않고, 다윈 평전, 에서처럼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평전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이 책에 있어서는 저자의 카프카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가 매우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열정적이고 카프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습니다만 그의 애정은 모두 이유가 있으며, 책 내에서 자신이 카프카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하나하나씩 논리를 펼쳐나가듯이 들고 있습니다. 근거가 있는 애정은 그 애정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저자가 그리는 책 속에서의 카프카는 어린 시절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그 마음의 상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도록 놓아두지는 않았던 사람입니다. 늘 자신보다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베풀고 친근하게 대했던 사람으로 그려지지요. 주변의 다른 작가들이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있을 때 혼자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던 관찰자였으며 글 쓰는 것만이 그 자신의 구원이었던 세속의 수도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카프카에 대해서 균형적인 시각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 카프카는 스스로의 연애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고, 그로 인하여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 모습을 편지와 서술을 통해서 가감 없이 밝히고 있지요. 그리고 카프카의 대표작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을 배려하여 그 내부에 주요 작품들의 서술배경과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많은 장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저런 장점들의 역할은 카프카의 모습을 좀 더 밝게 그려내어 독자들이 다가가기 쉽게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쁜 연예인들이 드라마를 촬영할 때 그 연예인들의 얼굴 아래에 반사판을 대어서 더 화사하게 나오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예인들이 실물이 못생겨서 그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연예인들이 다리가 짧아서 포토샵으로 후보정을 할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물론 예외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보통은 연예인들을 실제로 보면 정말 예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라서, 저런 책의 서술상의 장점들은 반사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프카 본인의 이야기는 저런 장점들과는 별개로 마치 무한한 심연을 쳐다보고 있듯이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아마 그 이유는 카프카의 생 자체가 우리 인간들이 번민하고 방황하는 그런 ‘실존’ 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인 헤르만은 매우 권위주의적이었고, 아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서 행동하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헤르만도 자신이 권위주의적이었다는 비판에 쉽게 변명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중산층으로나마 살아가려면, 독일과 체코 사이에 끼인 유대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얕보여서는 안 되었다는 점 등을 내세울 수 있겠지요. 그런 헤르만의 눈에는 아들의 유약함이 유난히 돋보였을 거라는 것을 추측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들 카프카에게는 그런 권위주의는 일종의 독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서서히 입기 시작한 상처는 김나지움을 거친 후, 이윽고 대학의 전공을 선택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권위주의의 그림자만이 카프카를 괴롭힌 것은 아닙니다. 카프카의 생을 괴롭혔던 것은 어찌 보면 사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펠리스 바우어와는 2번이나 약혼하고 또 파혼하는 과정을 거쳐서 이윽고 완전히 헤어져버렸고, 그 후에도 그의 사랑은 여정을 계속하여 율리 보리체크, 밀레나 폴락을 거쳐서 도라 디아만트를 마지막 종착역으로 삼습니다. 또한 건강문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를 죽음에까지 몰아넣은 것은 결핵이었지요.

하지만 저 모든 어려움을 뒤로 하고, 카프카는 글을 써내려갑니다. 아버지의 권위주의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라는 원고를 쓰는가 한편, 펠리스 바우어와의 사랑에 빠져있을때는 ‘실종자’ 나 ‘변신’ 과 같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깁니다. 그녀와 파혼했을때는 그 아픔을 극복하고 ‘소송’ 과 같은 작품을 남기지요. 그를 괴롭히던 모든 외재적인 상황들, 현실의 비통함은 그에게 투영되어지고, 그 투영된 상은 잘 갈무리되어 이윽고 글쓰기를 통하여 내부에 빛으로 집약됩니다. 실존을 인간 존재 개개인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으로 정의한다면,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야말로 그 자신의 실존을 유지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외부에서부터 던져진 수많은 위기들을 극복해내고, 거기에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생생한 경험은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오직 글쓰기뿐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생각했을 때는 앞서 조금 언급했었던 카프카의 연애에 있어서 우유부단한 면모와 같은 단점들에 대해서 면죄부를 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 으로 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결혼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었고 오직 글쓰기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이러한 시각을 통하여 면죄부뿐만 아니라 카프카가 그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있어주기에 행복하지만, 그 상대로서는 도저히 ‘글’로서의 카프카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그 상대에게 ‘글’로서의 자신을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 그 딜레마를 카프카 본인에 내재된 따뜻한 심성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윈 평전, 과 함께 이 카프카 평전, 을 함께 읽다보면 묘한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결혼 부분이 대비가 되는데, 둘 다 결혼에 대해서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했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카프카는 자신이 과연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했고 다윈은 과연 결혼 후에도 이렇게 연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지요. 그런데 이후의 대처는 완전히 다릅니다. 찰스는 정말 그답게도 결혼의 장점과 단점을 열거해서는 끝내 결혼을 하자고 결론을 내리고는 그 후에는 그대로 그 결정을 밀고 나갑니다. 그런데 카프카는 다가설 듯 하다가도 다시금 뒤로 물러서고, 그랬다가도 다시금 상대방에게 한 발 내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말이지요. 아마 카프카의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사랑과 안정성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실존과 관련된 글쓰기의 문제가 대립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카프카는 다윈처럼 저렇게 단칼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까요? 장단점을 따져서 뭐가 더 중요한지를 깨달았으면 쉽게 내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해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카프카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글쓰기였지만, 그렇다고 사랑과 결혼에서 부여되는 안정감 등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누구나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카프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 자신’ 이기에 행복으로 이끄는 수단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 자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면 남자가 왜 필요하고 여자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야말로 독생자라거나 제 1원인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카프카는 우리와 같은 실존적 불안을 떠안은 인간이었기에,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어린 시절에 받았던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이끌어줄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의 전생애를 걸쳐서 어떻게든지 ‘그 자신’ 으로서의 글쓰기와 결혼을 조화시키려 했었고, 그렇기에 저렇게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지요. 앞서도 말했다시피 ‘글’ 로서의 자신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카프카가 상대방들과 편지 교환을 열정적으로 했지만 막상 만나면 수줍어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수줍음을 상대방들이 어색해 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따뜻한 육체를 가진 존재를 앞에 두고는, 그 존재보다도 그 존재의 ‘글쓰기’ 를 바라보아달라니, 상대방도 피와 살을 가진 존재인데 말이지요. 그러면 똑같이 ‘글쓰기’ 가 존재 자체인 상대를 만나면 되지 않겠는가, 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카프카는 자신과 똑같은 상대를 결국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으며, 어쩌면 설령 그런 상대를 만나면 고독함이 두 배로 늘어날 뿐 전혀 행복하지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카프카는 다윈과 달리 실존적인 고통을 안고 평생을 살아갈 운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정신분석을 한 번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분석가의 남는 시간에 잠깐 받은 것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첫 면담(이자 마지막 면담이었기에)이라서 저 또한 방어기제 때문에 제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거의 털어놓지 않아서 그다지 신뢰도가 높은 편은 아닐 것 같지만, 분석가가 이야기한 것 중에 하나가 제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일도 마치 제 3자의 일처럼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고 말이지요. 최대한 객관적으로 감정이 개입되지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 말에 동의를 했었습니다. 감정이 개입되면 상대방을 바르게 보기가 힘들고 설령 상대가 올바른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러자 분석가는 제가 ‘두려움’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저 감정들이 두렵기 때문에 감정에 휩쓸릴까봐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는 거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덧붙이기를,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감정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지요. 우습게도 그때 떠오른 생각도 바로 카프카의 생각이었습니다. 카프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라고. 내가 지금 안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계층적 불안들을 그저 두려움, 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거냐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 카프카의 ‘성’ 을 읽었습니다. 마치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내 마음을 오직 카프카만이 이해해줄 수 있다고 여긴 것 처럼 말이지요.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저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될지, 와 같은 문제에서부터 권위주의에 대한 문제, 그리고 사회에 대한 불안 들은 더 커졌으면 더 커졌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지요. 그리고 여전히 카프카를 꺼내 읽고 있습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 갔기에 생존 당시에는 그리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든 실존적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그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누군가 나의 불안을 함께 하고 있구나, 내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어딘가 잘못된 것이 아니며,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일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커졌던 불안을 들어서 잠깐 옆에다가 놓아둡니다. 이 때 카프카의 글은 불안을 가지고 있던 ‘나’ 의 의식과 융합되어 이윽고 내가 카프카가 되기도 하고, 카프카가 나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나'도,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행복해지기를 원하겠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을 한아름씩 안고 살아갑니다. 등 뒤에 매달린 문제들은 사소한 것에서 부터 이번 선거 결과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런 고통들이 과연 모두 해결될 수 있을까요? 이 불안이 과연 모두 해소될 수 있을까요? 아마 힘들겠지요. 하지만 비록 이런 불안들은 카프카가 그의 소설들을 대부분 미완성으로 남긴 것처럼 끝내 해소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결국 제자리에 돌아오겠지만, 사랑에 빠진 순간에는 이런 불안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지요. 그러니깐 적어도 그를 읽는 순간은, 그의 글들과 사랑에 빠진 순간에는 그런 것은 어찌 되었든 좋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책, 카프카 평전, 은 그런 카프카에 대한 사랑고백이며, 이 글은 그런 카프카를 좋아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글은 여러분에게 공개적으로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카프카를 좋아하세요? 혹은 나를, 좋아하세요?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지. 책이란 우리 마음속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p. s. 회색 부분은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에서 인용.

        (불안과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카프카같은) 나를, (혹은 여러분을)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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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8-17 01:07   좋아요 0 | URL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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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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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이 시가 있는 시집이 《한 잎의 여자》라고 하더군요 저한테 오규원 시인 시집이 한권 정도는 있겠지 했는데 없었습니다 시집을 한번 읽어본 것 같기도 한데... 도서관에서 빌려다 봤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시집 조금 빌려다 본 적 있거든요


카프카 평전 옆에 쓰여 있는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라는 말 좋네요
읽어보고 싶어지는 마음... 도서관에 있나 찾아보니 있더군요
어떤 것은 없기도 했는데, 다 없는 것은 아니군요

편지쓰기에 대한 부분, 저와 비슷해요 저도 그렇거든요
중학교 때 처음으로 편지를 나눈 친구가 있는데, 편지로는 말을 잘해도
가까이 있으면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 친구는 그런 저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만나지 말고 편지를 쓰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지금은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군요)
예전에는 친구가 한번 보자고 했는데 바로 말 안 했더니 뭐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그 친구는 꽤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그랬습니다
어렸을 때는 덜했던 것 같은데 갈수록 사람을 피하는군요

이런 말 조금 우습기는 하지만 카프카는 카프카를 좋아해준 사람이 있었네요
부럽군요 저는...
아직 카프카 소설 한권도 안 읽어봤는데, 관심이 가는군요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가장 처음 보면 좋을까요


희선

가연 2013-08-28 00:15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안그래도 댓글로 달아둔다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만 했는데. 그리고 시집도 한 잎의 여자, 맞아요. 잊을 수 없는 시집..이지요, 쿡.

글이 더 편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겁니다. 카프카 소설은.. 저도 잘 몰라서...ㅎㅎㅎ 아마 변신, 과 같은 분량의 글부터 먼저 보시는게 좋을 듯 하네요. 그러다 이제 조금씩 본격적 소설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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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글을 쓸까, 하다가 결국 이 책을 골라서 끄적거리게 된다.

그러니깐 리뷰의 형식을 빌린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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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본 애니메이션은 우주인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인데, 이 내용이 아주 기가 막힌다. 일단 여자주인공은 우주인이다. 이 여자주인공을 좋아하는 남자주인공이 있고, 남자주인공을 좋아하는 여자사람친구 1이 있다. 이번에는 이 여자사람친구의 소꿉친구인 남자사람친구가 있는데, 골때리는게 이 남자사람친구는 저 여자사람친구를 좋아하는거야. 소꿉친구였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버린거지.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저 남자사람친구를 좋아하는 여자사람친구 2가 있다. 이 다섯 명에 부수적으로 여자주인공의 친구가 주인공 커플의 일종의 사랑에 메신저 역할을 한다. 뭐, 이를테면 오각관계라는 거다. 삼각관계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오각관계라니. 뭐, 사실 지금 나의 심정으로는 저런 오각관계에 한 번 빠져봤으면,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현실에는 저런 일 없지 않을까?

 

그런데 얼핏 보면 우리나라의 막장드라마의 뺨을 때릴만한 내용이지만, 그 중에도 정말 감명을 받게 만드는 장면이 있었다. 막장드라마는 계속 보면 정든다고 하던가, 하지만 그런 정드는 게 아니라 정말 가슴을 꽝 치는 것 처럼, 마음이 넘쳐흐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을 설명하기 전에 잠깐 배경설명을 하자면, 여자주인공은 우주인이니깐 결국에는 다시 우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주인공의 사랑을 거의 마지막까지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거지. 같이 우주로 가면 안되냐, 싶겠지만 애니메이션 설정 상으로 지구는 아직 개발 레벨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해서 원래 접촉하면 안되는 곳이라던가, 어쨌든 그런 복잡한 사정으로 우주로도 못나가고 말이지. 어쨌든 그래서 계속 모른 척 하고 있던 여자주인공에게 여자사람친구 1이 도저히 못참고 결국 말해버린거야. 도대체 왜 자꾸 남자주인공의 마음을 모른 척 하냐구. 당신도 그를 사랑하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만큼 멋진 일이 어디있겠냐면서. 그렇게 한참을 화를 내는 여자사람친구 1에게 여자주인공은 머뭇거리며 언젠가 자신은 떠나야 할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에.

 

"어쩔 수 있어"

 

"좋아한다고 말하면 돼."

 

"내가 아무리 원해도 손에 닿지 않는 일이 바로 앞에 있는데."

 

이렇게 여자사람친구1이 삼연타를 날린다. 그때서야 마음을 다잡은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을 찾아가서는 마주선 채로 쳐다보다가 남자주인공의 어깨에 허물어지듯 조용히 머리를 기대며 이렇게 말하는 거야.

 

"우주인이라도 괜찮나요?"

 

"나 같은 것이라도 괜찮나요?"

 

"고백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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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전반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나 같은 것이라도 괜찮나요' 다. 간단히 말하면 사랑이야기일 이 책은,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으로 그 독특성을 드러낸다. 한창 젊을 때,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라고 여겨질 때에는 못생긴 여자와, 혹은 못생긴 남자와 사귄다는 것은 정말 힘든일이겠지만, 이런 책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못생김'이 책으로만 읽으면 잘 안와닿기 때문이겠지. 물론 그 '못생김'은 책 표지의 시녀의 그림으로 형상화된다. 책을 읽는 내내 저 못생긴 시녀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면 흥미로운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나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한 번 읽으려다가 도저히 못하겠더라구. 적어도 상상만이라도 좀 예쁘고 김태희같은.. 그런 이미지를 그리게 되더라니깐. 뭐, 아무리 문맥에서 못생겼다고 하더라도 그냥 내 상상속에서는 괜스레 주인공들을 예쁘게 그려내게 되더라고 말이지. 나도 외모지상주의의 가해자인가, 라고 자문해보면 그건 또 아닌거 같다. 난 현실에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착한 마음씨가 가장 좋으리라는 것도 안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애인은 안생겨요. 착한 아가씨들은 '남자'같은 사람을 또 찾더라고, 풋. 헉, 이야기가 다른데로 새어버렸지만, 어쨌든 나 자신도 한번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휘어잡을만큼 그리 외모가 뛰어난 편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그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말야, 적어도 요런 책들에서만은 이상을 꿈꾸게 되는게 이상한 걸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그렇게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으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나 같은 것이라도 괜찮나요' 를 전혀 이해를 할 수 없게 된다. 아니, 그 정도 예쁘고 (내 상상속의 이미지를 덧씌운다면) 착하면 나로선 땡큐지!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책은 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만나고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별하는 것. 그런 건 외모가 어떻든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일테니까. 그런데 굳이 이 파반느 위를 흐르는 사랑이야기가 특별할 수 있다면 끝끝내 말해지지 못한 자격지심, 그것때문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격지심을 느끼고 스스로가 조그만하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느껴보았을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은 이상하게 왜소하게 느껴지고, 그 왜소함을 감추기 위해서 위악을 부리기도 하고 과정과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자신의 허세가 낱낱이 보일 것 같아서, 혹시나 그 사람이 눈치 챌까, 싶으면 짜증과 화로 덮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스스로가 외모에 자신감이 없을때는 더 그런 일을 겪게 된다. 상대방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왜 나를 택했지? 그러다보면 합리화할만한 이유를 찾게 되고, 그 이유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이윽고 불안에 빠지게 된다. 정말로, 정말로 나같은 사람이라도 괜찮나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의 마지막은 사실 정말 당황스럽게 끝난다. 작가의 장치겠지만, 마지막의 디렉터스 컷, 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에 따라 엔딩이 분기가 되는 거야. 읽은 사람들 중에는 작가를 칭찬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텐데, 그 이유는 마지막 디렉터스 컷에서는 본편의 결말을 바로 부정해버리거든. 나는 비난하는 사람 쪽이다. 본편에서 그 많은 고생을 거쳐서 이제서야 '나라도 괜찮냐' 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려고 하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다니. 물론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결말을 여기다가 끄적거리는 일은 삼가겠지만, 나로서는 비난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것을 겨우 꾹 눌러참았다. 하지만 한결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면 왜 그렇게 마무리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사실 그게 삶이다, 그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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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애니의 여주인공은 사실 예쁘고 스타일도 좋다. 남주인공은 그에 비하면 우엉에 비실비실거리는 녀석이다. 위급할때 정말로 도움이 되는 사람은 여주인공이다. 이런 관계는 마치 은하철도 999의 메텔과 철이와 살짝 비슷하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나같은 사람이라도 괜찮나요' 라는 질문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남주인공이 말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데 사실은 외모만 연인들에게 서로 자격지심을 부여하는 조건은 아니다. 외모에 자신감이 없다면 그렇게 느낄 가능성은 더 커지겠지만, 설령 아무리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녀라도 서로에 대해서 부족함을 아예 안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남들이 볼때는 정말 괜찮아보이는데 서로는 서로에 대해서 항상 모자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 물론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서로가 서로의 장식품이 되는 그런 관계라면 또 모르겠지만 정말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결국에는 부족함을 깨닫고 더 나은 관계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하면 저 애니의 여주인공이 저렇게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고, 박민규의 소설에서의 여주인공의 외모를 외모로만 해석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부족함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금술에서는 남녀추니를 완전성의 상징으로 보던가? 남자와 여자는 원래 한몸이었다고 플라톤이 밝혔던가? 아무리 다가가도 우리는 한 몸이 될 수 없다. 아무리 포옹을 하더라도 너와 나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에게 내가 부족함을 느낀다. 내가 너라면 부족함도 넘침도 느낄 일이 없을텐데.

 

그런데 그런 나라도 괜찮나요?

 

대답은 예, 다. 애니든 소설이든..... 그리고 현실이든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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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4-04 11:37   좋아요 0 | URL
저는 말이죠, 가연님. 철저한 외모지상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나의 사랑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외모가 받쳐줘야지, 라고 생각을 했던거에요. 그런데 제가 사랑했던 남자들 중에는 딱히 잘 생긴 남자들이 없었어요...는 아니고 있기는 했구나. 그렇지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죠..........라는 얘기는 하지 말걸 그랬나. 어쨌든,

처음 만났을 때는 우앗, 이렇게 못생겼다니, 라고 생각하고 남자로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어느틈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더란 말이죠. 만남이 반복되면서 그의 못생긴 외모따위는 사실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못생겨도 괜찮아, 가 아니라 못생겼다는 인식 자체를 못하게 되는거에요. 내 눈에 익어서 그런건가,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러니까 적어도 제가 한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의 외모는 방해요소가 되지는 않더란 말이죠. 실제로 그들 중 한 명은 볼 때마다 '우앗 지난번보다 더 못생겨졌네' 라는 생각이 들던 남자도 있었어요. 그것도 처음 몇 번만 그렇지, 나중엔 그 얼굴이 가장 보고싶은 얼굴이 되더라구요.


아우..근데...오늘은 이상하게 자꾸만 자꾸만 남자 생각해요. 내가 떠난 남자 나를 떠난 남자 미처 맺어지지 못한 남자 기타 등등........봄이...올라고 해서 그런가봐요. 하아-

가연 2012-04-05 01:27   좋아요 0 | URL
ㅋㅋ 누구나 사실 외모를 보기는 보죠, 첫 대면에 외모를 안 볼 수는 없으니.. 그런데 어느 웹툰에서 봤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모두 자신의 여자친구라던가 남자친구가 이왕이면 잘생기거나 이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구, 이왕이면 성격도 착하고, 돈도 많은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사랑에 한 번 빠지게 되면 그런 모든 조건들이 다 상관없다, 고 여겨지게 된대요. 그러다보면 저번 보다 더 못생겨졌네! 라고 생각이 들던 남자도 어느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이 되어버리구.. 그런 거 아닐까요?? ㅎㅎ 웹툰이 출처라서 좀 신빙성이 안간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나저나 '우앗 지난번보다 더 못생겨졌네' 라는 문장을 보고 풉, 하고 웃음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아, 정말 리얼한 심정 표현이신데요, 하하. 솔직히는 저 문장을 보고 괜스레 마음 한 편이 좀 찔려오는 것 같지만 무시하렵니다, 풋

희선 2013-08-03 00:10   좋아요 0 | URL
읽은 지 오래돼서 마지막이 어땠더라 했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봤을 때는 조금이라도 써두어서 그것을 찾아서 봤습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써두지 않았더군요 잘됐다는 말은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그것도 있었고... 저도 못생긴 사람을 상상할 수 없다고 써두었더군요 책으로 읽으면 그냥 사랑이야기네가 되는 거죠 못생겼다는 기준은 뭔데, 하는 말도 있고...

처음에 봤을 때 얼굴이 별로여도 자주 보다 보면 그게 그렇게 안 보이게 되겠죠 이것은 당연한 말이군요 좋아하게 되면 그것보다는 다른 것을 볼 테니까

사람은 얼굴이 아니더라도 자신한테 모자란 점이 있으면 '이런 나라도 괜찮나요' 하겠군요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에서는 '네' 라 해도 현실에서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귀기는 해도 그다음은 알 수 없다는 거죠 그리고 사귈 때는 저런 말도 필요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그 뒤는 상관없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군요


희선

가연 2013-08-05 13: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현실에서는 정말정말정말 어려울겁니다. 소설에서는 아무리 봐도 못생긴 사람을 상상할수가 없었습니다. 못생겼다는 기준은 뭔데...... 옳은 말이십니다. 기준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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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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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글쓰기.

 

 

 

  웹툰으로 최근 연재되는 만화 중에, N포탈의 돌아온 럭키짱, 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럭키짱이 어떤 만화라고 묻는다면, 쉽게 말하면 학원물이지요. 극화체로 학원의 폭력을 다룬 그런 만화였습니다. 작가 김성모는 이 럭키짱 이후에 여러 작품들을 내놓았고, 수많은 패러디들을 양산했으며, 인터넷을 하던 폐인들은 그에게 경외심을 담아 김화백이라는 칭호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최근에 스포츠신문에서 4인조라는 만화를 끝내고 다시 시작하게 된 작품이 돌아온 럭키짱입니다. 여기까지는 김화백의 팬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조금 객관적으로 만화를 살펴보면, 머리를 비우고 보기에는 괜찮은 만화입니다. 보면서 실소와 폭소를 자주 머금게 되지만 딱히 무슨 심오한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닙니다. 학교 폭력물이라서 학생들에게 유해하지 않겠느냐, 라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최근 인터넷을 조금만 뒤지면 그보다 훨씬 유해한 매체를 많이 찾을 수 있으며 하다못해 영화나 드라마의 폭력장면이 김화백의 만화보다 더 유해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김화백의 작품은 현실과 제법 많이 동떨어진, 그러니깐 70, 80년대의 공고나 상고에서나 일어날 법한 내용을 만화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들도 김화백의 작품을 보면서 현실에서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라며 잠긴 교실문을 열지는 않을 것이고, 중학생들도 ‘아, 만연한 인터넷 냄새’ 라고 말하면서 학교의 싸움 잘하는 아이들, 소위 말하는 학교짱을 탐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령 초등학생들도 ‘슈슈슉’ 하면서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고 말이겠지요. 이미 우리들은 인터넷의 생활화로 인하여 초등학생조차도 현실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지 않은 이상 우리는 그저 웃을 뿐 따라하려고 마음먹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을 아끼자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돌아온 럭키짱, 그리고 이외에 다른 웹툰들 모두 좀 유해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웹툰이라는 단어부터 고쳐야 할까요, 웹툰뿐만이 아니라 만화책들도, 소설책들도 모두 우리나라 말을 아끼지 않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영어를 섞어쓰고 우리나라 말을 우그러뜨리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다 못해 쓴 책이 바로 이 ‘뿌리 깊은 글쓰기’ 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아마 저자가 읽었을 책들에서 108가지의 잘못된 우리나라 말 사용례를 뽑아서 손수 다듬고 있습니다. 저자의 우리나라 말에 대한 애정은 저자의 글쓰기에서부터 깊이 배어있습니다. 저자의 문체는 꼭 시를 읽는 것 같으며, 매 꼭지는 우리나라 말을 아끼자는 주장으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의 전체적인, 큰 의도는 한 문장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책 앞의 일러두기에서 쓰인 것과 책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우리 말을 쓸 수 있을 때는 우리 말을 쓰자’ 가 바로 의도겠지요. 더 나아간다면 우리 말을 아끼고 사랑하자,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면 힘들여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플래카드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 공익사업을 벌이는 것이 훨씬 좋겠지요.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책을 통하여 그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당위성, 그러니깐 근거가 되겠지요. 이 근거라는 말이 매우 딱딱합니다만 간단한 예를 들면 일전의 ‘따뜻한 경쟁’ 의 경우 그 주제는 ‘따뜻한 경쟁을 하자’ 가 될 것이고, 책 내용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따뜻한 경쟁은 어떤 것이며 그 경쟁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 따뜻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따뜻한 경쟁이 이루어진 나라는 있는가, 따뜻한 경쟁을 하면 정말 현실의 문제가 사라질까, 정도가 되겠습니다. 물론 소설의 경우는 좀 다르겠지요. 소설의 묘미는 끝까지 읽지 않는 한 예측불능에 있다고 반론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며, 한 번도 읽지 않은, 그래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책은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반론을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 ‘뿌리 깊은 글쓰기’는 소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책의 부제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를 보면서 저자의 주장이 책 내부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어떻게 그 근거를 획득하는가를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저자의 주장이 옳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우리 말을 쓸 수 있을 때 우리 말로 순화해서 쓰도록 노력을 기울이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 책은 감성에 기댈 뿐,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사실 ‘우리 말로 순화해서 쓰자’ 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저도 ‘우리 말을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책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할 것이라면 적절한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고쳐야 할 예시로 든 책들을 보면서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떤 책은 시집이었고 어떤 책은 소설책이었으며, 1/3 정도는 외국 책을 번역한 책이었고, 일부는 엮은 책이었으며, 일부는 수필이었습니다. 몇 몇은 만화책(요츠바랑! 이 두 번 정도 나왔더군요) 이었지요. 차근히 이야기를 시작하면, 먼저 시집에 수록된 시의 경우에는 과연 책에서 말하듯 ‘그린 농법’을 ‘푸른 농법’, ‘풀빛 농법’ 으로 고쳐야 할까요? 시에서 의도적으로 문법을 파괴하는 시적 허용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시에다가 당장 (내린 처방은 푸른 농법), 이라고 적어두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바뀝니다. 풀빛 농법이라고 바꾸어도 마찬가지이지요. 시를 여기다가 옮기지는 않겠습니다만, 발췌된 시는 류기봉씨의 포도 눈물, 에 실린 시입니다. 잔잔한 시의 분위기를 ‘그린’ 이라는 외래어가 현대적인 분위기 쪽으로 붙잡고 있었는데 (국어교과서 참고서에 나올만한 이야기로 하자면 목가적인 분위기를 포스트모더니즘하게 바꾸고 있다고 말하면 될려나요) 푸른 또는 풀빛은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그저 평화롭게, 잔잔하게만 흘러가게 만듭니다. 과연 시인이 푸른 혹은 풀빛과 같은 단어를 생각을 못해서 그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저는 그 점에 대해서 좀 회의적입니다. 물론 시의 해석은 누구나 다를 수 있습니다. 푸른 농법이 훨씬 좋은 시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있는 그대로 돌아보고 느끼는 그대로 글로 옮’기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시인이 농사를 하면서(류기봉 시인은 농사를 짓는다지요) 느낀 시어가 ‘그린 농법’ 이라면 그것을 존중하는게 옳다고 여겨집니다.

다음으로 이야기할 부분은 만화책을 발췌한 부분입니다.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넘어가려다가 제목이 눈에 밟혀서 다시 보니 ‘요츠바랑!’ 이었습니다. 뭐, 개인적으로 만화를 자주 보는 편이라 요츠바랑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요. 저처럼 나이먹고서도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보통 이런 요츠바랑과 같은 만화는 학생들이 자주 보는 만화로 여겨집니다. 앞서 돌아온 럭키짱, 이야기로 이 글의 서두를 시작했지요. 만화에 우리말로 고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사실 끝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웹툰이나 만화에서는 우리말이 그리 존중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말 무분별하게 쓰는 웹툰들도 있습니다만, 어떤 경우에는 그리 존중받지 못하는 단어가 그 만화나 웹툰이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요츠바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만화책을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순 우리말로만 이루어져있다고 상상해봅시다. 과연 만화책을 읽는 재미가 얼마나 있을까요? 이국적인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만화책이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 만화책을 읽는 독자층이 거의 학생층이라고 본다면 재미가 없는 만화책을 누가 과연 사서 볼지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영어를 이국적이라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만 영어를 쓰며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도 티셔츠에 ‘한글’ 이라고 써진 글자를 입는 사람들이 있고, 인도에도 가슴에 ‘愛’ 라고 쓰고 춤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사례들이 있겠지만 이쯤 줄이고, 이런 사례들을 보면 이국적인 것에 대한 동경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고, 그것이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자는 일러두기에서 이야기합니다. 영어를 받아들일 까닭이 없는 자리라면 우리나라말을 쓰라고. 확실히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굳이 ‘주전부리’라고 써야 할 자리에 ‘디저트’를 쓸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디저트’를 ‘주전부리’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나 이런 만화책에서 ‘디저트’를 ‘주전부리’로 바꾸어야 할 필요는 더욱 더 없다고 여겨집니다. 자연스레 읽는 재미를 위해서는 디저트로 놓아두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이 말은 이국적이라고 느낀다고 해서,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영어를 써서 멋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사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말로 된 만화책이 나오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만화책같이 학생들에게 파급력이 큰 매체에서부터 이렇게 외국어를 쓰니 큰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서 저자는 일부러 만화책에서 발췌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린 만화책이라면 모를까 외국에서 들여온 만화책을 번역한 것이라면 점차 원본과 멀어지는 상황은 피할 수 없겠지요.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외국의 만화책을 읽을 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번역된 책은 이상하게 심심하네, 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도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지 않는 책이라서 그렇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들여오지를 말아야 하는 게 옳은 일이겠네요.

위의 만화책들을 발췌한 것에 대하여 설명한 부분은 번역한 책을 발췌하였다는 것에 그대로 쓰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번역가들이 작업물에 대해서 좀 더 신경을 써서 우리말로 순화시켜서 번역하는 경우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도리어 순화시킨 경우가 점차 원래 의미하는 바와 멀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레스토랑을 모두 밥집으로 바꿀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일일이 각 문맥에 맞는 단어를 찾는 것이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 부분에는 영어를 그대로 쓰면 된다고 저자는 일러두기에서 이야기하지만, 그 경계는 어떻게 보면 매우 애매모호합니다. 시처럼 쓰인 문장도 좋지만, 저자는 그런 기준에 대해서 좀 더 책에서 밝히는 것이 좋았으리라 여겨집니다.  발췌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번에는 책의 문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책에서는 이런 문장을 구사합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물정”이란 ~ 겹말인 셈입니다. 세상을 모르는, 이나 물정을 모르는, 이라고만 적어야 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가만히 읽다보면 무언가 어색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어를 다 빼고 구조만 보면 ‘그대로 두어도 되나, ~라고만 적어야 한다’ 니. 무슨 말인지 사실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제가 문장의 비문을 가릴 만큼 국어 연구를 깊이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듯 합니다. 저 문장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은 물정이 겹말이기 때문에 세상을 모르는 이나, 물정을 모르는 이라고 고쳐야 한다 고 적는다면 낫겠지요.

사실 이렇게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댄다면 다른 책들도 이런 문장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당장 지금 이 글만 하더라도 꼼꼼히 살펴보면 문법에 어긋나거나 이상한 문장을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탈자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책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는 이유는, 앞서도 말했듯이 그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 책들의 주제에 관한 것이 핵심이지, 문법이나 오탈자는 그런 책들에게서는 어쩌면 조금은 지엽적일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말을 쓰는 것이 그런 류의 책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플라톤의 철학을 다룬 책에서 이데아에 대한 글을 쓰지 않고 오탈자를 찾아서 글을 쓴다면 그야말로 보석을 동물한테 주는 격이지요. 하지만 이 책의 주된 핵심은 ‘우리나라의 말’ 입니다. 우리나라의 말에 대한 주장을 하는데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이 영어를 순화시킬 수 있는 단어이지 문장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자신에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이렇게 지적할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작품이든 지적하거나 비평하기는 쉽지만, 직접 쓸때는 그만큼의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저 또한 막연히 우리말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을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쓰게 될 것인가, 등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영어를, 비단 영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외래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 대화에서 사용하는지 이 책은 자신의 언어 생활 습관을 돌이켜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새로운 단어를 배우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발췌한 책 중에서 저자가 제안한 단어를 쓰면 훨씬 더 바람직하게 문장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에세이를 삶글로 바꾸는 것이라던가, 스크랩을 갈무리로 바꾸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의 예가 되겠네요. 마찬가지로 밤은 날밤으로 두는 게 좋지, 생률과 같은 정체불명의 어려운 말로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자가 제시한 108가지 이야기에 모두 동의는 못하지만, 저자의 말이 옳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우리나라사람이 우리나라말을 아끼며 즐겨 쓰는 것은 옳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야 할 길이 매우 멉니다. 그렇기에 이 책이 그 대장정의 첫 발자국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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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3-25 06:43   좋아요 0 | URL
국어사전에서 '톺아보다'라는 낱말을 찾아보셔요.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고 '오자'라고 말한다면, 어쩐지 너무 싱겁네요.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거나 살피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일은 어려울는지 모르지만, 마음을 기울여 생각한다면, 말에 담을 넋을 살필 수 있어요. 님이 쓰신 글에서 한 가지만 짚어 본다면, '마찬가지'라는 낱말은 외따로 쓸 수 없어요. '이와 마찬가지'처럼 쓰든지 '그와 마찬가지'처럼 쓰거나 해야 올발라요. 그런데, 이런 말씀씀이를 둘레에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둘레 사람들도 제대로 모르니까, 모두들 잘못 말하거나 글쓰는 줄 모르면서 얄궂거나 뒤죽박죽이 되고 만 말로 넋을 담아내요.

말과 글로 사랑을 빚지 못하기 때문에, 말과 글로 사랑을 빚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제 생각으로는, 에세이를 굳이 삶글로 바꾸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그냥 수필이라 하면 돼요. 삶글로 쓰고 싶으면 삶글이라 하면 되지요. 시를 포엠이라 할 까닭이나 소설을 노블이라 할 까닭이 없다고 여기면, 수필은 그냥 수필이라 하고, 때로는 산문이라 하면 넉넉하니까, 에세이를 이야기할 까닭이 없을 뿐입니다.)

가연 2012-03-25 09:53   좋아요 1 | URL
아, 죄송합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한번만 찾아보았으면..ㅠ 너무 생소한 단어라 오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자 부분은 지우도록 할께요. 그 부분에 대해서 사과드릴께요. 오자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웠습니다.

(톺아보다를 오자로 착각했습니다. 본문에는 톺아보다를 돌아보다로 고치는게 맞지 않을까 라고 적었는데 제가 잘못 알았었기에 지금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된장님이 이 책을 쓰셨죠? 책 앞부분을 읽다가 알라딘 서재에서 머물고 계신 것을 봤지요. 사실 그래서 리뷰를 쓸까 말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는데... 보통은 이렇게 글을 쓰느니 안쓰는 것을 택하지만 평가단이라서 일단 이렇게 쓰기는 했네요. 다른 책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책을 쓰신 분이 글을 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니깐 부담이 많이 되네요. 하지만 이왕 썼으니 조금 말씀드리면, 된장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만, 글 자체에서 좀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이야기드리면, 에세이편에서 보시면 ('수필'이라는 말마디에 당신들 글을 꿰어맞추었습니다, 조그맣든 크든 내 깜냥껏 우리 말과 글로 새로운 낱말을 빚어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적혀있지요. 저는 이 문장을 수필이라는 말 자체에도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으신 거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삶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문단 뒤에는 더이상 '수필' 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구요. 뒤에는 '문자 한 마디 자랑질' 이라는 말이 '해몽'을 언급하면서 나옵니다. 이는 '에세이'나 '수필'(같은 한자어니깐 이 단어를 빗댄 것이 더 가능성 높다고 판단했지요)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문자 자랑질이다, 라고 해석이 되었구요. 이 흐름은 마치 삶글이 대안이다, 라는 판단을 내리셨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지요. 물론 책에서는 삶글로 쓰자, 라고 적혀있지는 않지만 흐름을 보건데 가장 적합한 것은 삶글이나 마음글이겠구나, 라는 판단을 내리는데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수필'에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은 듯한 문장, 삶글에 할애된 꼭지 등..) 다시 덧글을 보니.. 이번에는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셔서.. 댓글에서는 수필, 때로는 산문으로도 넉넉하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네요. 그렇다면 수필이라는 말은 꿰어맞추기는 했지만 '문자자랑질'이 아니라는 것인지, 혹은 문자자랑질이지만 그냥 써도 괜찮다, 라는 말씀이신건지.. 사실 책 전체 주제에서 보자면 문자자랑질에 해당하든 안하든 영어 대신에 쓰이는 말로는 적합하겠지만, 그렇다면 굳이 책에 문자자랑질, 이라는 말씀을 쓰실 필요가 있었는지.. 이런 부분이 조금 어색하였습니다. 차라리 삶글로 쓰자! 라고 주장하신다면 훨씬 글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삶글을 언급한 이유는, 저 개인적으로는 삶글이라는 단어가 참 좋다고 여겨서 저렇게 써두었습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확인하지 못했을 단어겠지요. 사실 제 글이 많이 부족하고.. 하시는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해석할 여지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글의 흐름은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그 후에 '꼭 할 필요는 없지만', 라고 적혀있으면 이렇게 해야 되는지, 아니면 그냥 하던대로 써도 되는 것인지.. 분간이 힘들지요. 사실은 이런 글을 잘 안쓰는데.. 평가단이라서 이렇게 적어두기는 했네요ㅠ 본문에서도 밝혔다시피 제가 이런 책을 쓰기는 정말 어렵겠지요. 지적하는 것은 그에 비해서 훨씬 쉬울테니 말입니다.

숲노래 2012-03-25 12:54   좋아요 0 | URL
어느 쪽으로 적든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는 '글쓴이'와 '말하는이' 마음에 따라 달라요. 어느 마음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느냐에 따라, 아주 쉬운 말글을 쓰더라도 '문자자랑질'이 돼요. 이를테면 '톺아보다'라는 낱말도 문자자랑질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낱말을 처음 듣던 예전에는 문자자랑질이라고 느껴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낱말을 지식인 아닌 여느 흙일꾼 할아버지가 입으로 읊는 말을 한 번 들은 다음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꼭 흙일꾼 할아버지가 이 낱말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자리 어느 흐름에 맞추어 글을 쓰느냐에 따라 느낌과 결은 사뭇 달라져요.

문학을 이야기하는 글을 쓸 때에는 '삶글'이라는 낱말을 아직 사람들 앞에서 쓰기 힘들어요. 이때에는 그냥 수필과 산문이라고 처음 이야기하면서, 나중에 사이사이 '삶글'이라는 낱말을 곁들일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시나브로 '수필 = 산문 = 삶글'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요사이에는 '에세이'를 넘어 '르포'라는 말까지 들어와요. 수필이든 산문이든 자유롭게 쓰는 글이지만, 자꾸 영어를 끼워맞추면서 글 테두리를 넓힌다고 해요. 이런 흐름에서는 한국말로 또 새로운 말을 빚을 수 있어야겠지요.

제가 이 책에서 '글쓴이가 밝힌 풀이글이나 이야기'가 '대안'이나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되풀이해서 말하는 까닭은, 이 책을 교과서로 삼지 말고, 스스로 말밭을 일구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좋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삶이 달라, 스스로 좋아하며 받아들이는 말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다 다른 결을 스스로 살피면서 날마다 내 넋을 북돋우면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떤 말을 넣을 때에 서로 즐거운가를 깨달을 수 있어요.

이 낱말은 써야 하고 저 낱말은 안 써야 한다는 틀이란 없습니다. 이런 틀이 있다면 굴레가 될 뿐이에요.

님이 쓰신 이 글에서 한 가지를 짚어 보면, "-하고 계시다"라고 적은 대목이 있는데, "-하고 있다" 아닌 '계시다'를 넣는다고 높임말이 되지 않아요. 틀린 말법이랍니다. 더구나, "-하고 있다" 또한 영어 '-ing', 이른바 현재진행형을 일본사람이 '-중(中)'으로 번역하면서, 이 말투가 한국말에 "-하고 있다"로 탈바꿈했어요. 그러니까, '계시다'를 '있다'로 고쳐야 알맞지만, 더 밑을 살피면 '있다'를 넣은 "-하고 있다"부터 잘못 쓴 말이에요. "적혀 있지요"부터 틀리게 쓴 글입니다. "적혔지요"라고만 적어야 올발라요.

그러나, 올바르게 쓰든 잘못 쓰든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어떻게 쓰든 '내 마음을 얼마나 잘 드러내거나 나누려 하느냐'가 대수롭습니다.

대수로운 대목을 살펴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비로소 말을 새로 익히며 글로 사랑꽃을 피우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쓴 책에 실린 이야기를 '동의하든 동의 안 하든' 아무것도 대단하지 않아요. 옳은 대목이 없고 그른 대목이 없어요. 동의하느냐 동의 안 하느냐로, 책을 따져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스스로 아름답게 돌볼 내 말삶을 깨달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도록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으니, 이 대목을 짚지 못하면, 이 책을 읽었어도 안 읽은 셈이라고 할밖에 없습니다.

가연 2012-03-25 14:12   좋아요 1 | URL
음.. 사실 동의한다, 혹은 옳다... 라고 쓴 것은 그냥 답글만 달려고 하니깐 너무 딱딱해보여서 끼워넣은 말인데, 졸지에 책을 안 읽은 사람이 되었군요;ㅎ

더 이야기를 진행시켜도..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듯 하니 무익할 것 같네요. 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저자이시고 하니 제가 책을 곡해한 것 같다고 여기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앞서 답글에서도 달았듯 이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좀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이 책이 밑거름이 되어야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밑거름이라면 바탕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요? 바탕이 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수는 없지요. 그래서 얼마나 적절한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데 그걸 밑거름으로 삼는게 좋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라면 당황스럽지요. 수학의 공리도 아니구.. 랄까, 이렇게 쓰면 너무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보이려나요ㅠ 사실 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아(고 있다고 저는 스스로 생각을 하지만 님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겠지요.)는데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런 부분들이 저같은 사람들에게는 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락방 2012-03-25 21:38   좋아요 0 | URL
가연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가연님의 글솜씨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리뷰를 읽으니 새삼 감탄스러워요. 저는 이 책을 읽는다면 가연님과 비슷한 감상이 나왔을 것 같은데, 가연님처럼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리뷰를 써내지는 못할것 같거든요. 소설가 이승우는 자신의 책,[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에서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읽어야 한다, 라고 했는데 가연님이 이렇듯 무슨 말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게 글을 '잘 쓰신'건 '잘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맛폰으로 가연님의 서재를 둘러보다가 댓글을 달고([초속 5센티미터]에 말이죠.-안 달 수가 없었어요!), 안되겠다 스맛폰으로 댓글 남기는 건 너무 답답해, 라고 생각해서 이리 들어왔어요.

:)

가연 2012-03-26 12:21   좋아요 0 | URL
아하하.. 그저 부끄럽네요ㅠ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비판(?)하는 글은 성향상ㅠㅠㅠ 별로 적고 싶지가 않은데, 이미 써놓고 변명같지만ㅠ 제가 아직 모르는게 많고 부족한 것도 많으니.. 그래서 적고 싶지 않았는데 신간을 두 권씩 받는게 기쁘니ㅠㅠㅠ 별 수 없이 평가단으로 이렇게 써버렸네요. 아직 부족한게 많은 글입니다. 담에는 더 좋은 글을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ㅎ

그리고 초속 5센티미터..ㅎㅎ 이글에 댓글을 이렇게 남겨주신것도 감사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초속 5센티미터에 댓글달아주신것도 매우 기쁘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ㅎㅎㅎ 그 글은 상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글이라...

희선 2013-08-21 00:42   좋아요 0 | URL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시가 생각났습니다 재미있는 시예요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하게 하는...


우리말 사랑 1



자고 일어나
달리기를 하면 발목 삘까봐
조깅을 한다.
땀이 나
찬물로 씻으면 피부병 걸릴까봐
냉수로 샤워만 한다.
아침밥은 먹지 못하고
식사만 하고
달걀은 부쳐 먹지 않고
계란 후라이만 해 먹는다.

일옷은 입지 않고
작업복만 골라 입고
일터로 가지 않고
직장으로 가서
일거리가 쌓여 밤샘 일은 하지 않고
작업량이 산적해 철야작업을 하고
핏발선 눈은
충혈된 눈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는 반찬을 사러
가게로 가지 않고
슈퍼에 간다.

실컷 먹고 뒤가 마려우면
뒷간으로 가지 않고
화장실로 가서
똥오줌은 누지 않고
대소변만 보고 돌아와
오랜만에 아내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다 잠이 들면 될 텐데
와이프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다 잠이 든다.



서정홍



자기 전에 읽어서 그랬는지 꿈속에서 또 읽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를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말을 잘 쓰기는 해야죠 저는 어려운 말보다는 쉬운 말로 쓰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이오덕 님이 쓴 글(우리글 바로쓰기 1~5)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책을 읽었더니 다른 책 읽는 게 쉽지 않더군요 지금은 시간이 좀 지나서 나아졌지만...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고쳐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정말 그래요(초등학교 교과서 지금은 어떨지) 많이 배우지 않고 책을 거의 읽지 않은 분이 우리 말을 더 잘 쓴다고도 하셨는데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지 않고 책을 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누구나 알기 쉽게 말하고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더 많죠 어떤 책에서 책을 볼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보라고 했는데, 얼마 전에는 글을 쓸 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을 봤습니다(거기에 쓰여 있었던 것은 자신이 글을 쓰는 게 아니고 소설신이 말해주는 것이어서, 하는 게 있었지만...^^)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늘 잊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 말을 잘 쓰는 것은 좋지만, 말의 느낌이라는 것이 있으니 거기에 맞는 말을 쓰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도 없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책 읽으면서 왜 이런 말(영어, 한자말)로 쓴 거야 할지도...^^ 사실 이것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희선

가연 2013-08-28 00:22   좋아요 0 | URL
이오덕 님의 글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러나 쉬운 말로 풀어야 한다는 말씀엔 동감합니다. 그리고 우리 말이 사실 좀 많이 외국어들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뭐랄까, 한편으로는 외국어를 쉽게 표기할 수 있어서 이렇게 나타나는것이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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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경쟁 -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
맹찬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따뜻한 경쟁.

 

 

 

 

 

1.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저는 탐탁지 않은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보통 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 전에, 잘 아는 책이 아니면 인터넷으로 검색하거나 다른 책들을 찾아보면서 책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모아보려고 노력하는데, 이 책의 제목으로 검색을 하자 이 책의 저자의 아내 되시는 분이 본인이 활동하는 카페에 올린 잡담 겸 알림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글의 덧글들에는 한 번 주문해서 읽어볼께요, 하는 댓글이 몇 개가 달려있었고 말이지요. 그 후 다시 검색을 하자, 이번에는 저자의 블로그에 서평이 올라온 인터넷 주소가 모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실 책을 쓴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책이 잘 알려지기를 바라고, 책이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며, 동시에 많이 팔렸으면, 하는 생각을 감출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사실 인터넷에서 저렇게 글을 올리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본인의 책을 본인이 홍보하겠다는데 이상할 것도 없고, 적어도 돈 주고 알바를 시켜서 본인이 아닌 척 홍보하는 것 보다는 훨씬 당당하고 좋지요. 그러나 저는 적어도 책에 있어서는, 책 자체로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책을 알리는데 있어서는 단순한 광고문구가 아닌, 적어도 독자의 주체적인 생각이 함께 하여야만 한다고 여기고 있기에, 저런 모습이 솔직히 좋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요즘 세상은 정보 과잉의 세상이기에, 훌륭한 책도 많은 정보들에 밀려서 묻혀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막연히 훌륭한 책이라고 해서 잘 알려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훌륭한 책이 훌륭하다고 알려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을 거라면 굳이 출판할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일방적으로 정보를 알리기 위한 것이라면 냉전시대의 국가에서 뿌리는 선전 용지와 다를 바 없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일종의 편견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네, 사실 저는 이런 편견을 조금 가진 채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2.

 

 

  지금껏 인문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면, 점차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이었지요. 인문관련 서적을 읽고 있을 때는 잘 못 느끼지만, 소설이라던가 그 외에 에세이를 읽고 있을 때는 정말 스스로가 빨리 읽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별로 비슷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야기하자면 마치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달고 뛰다가, 잠시 벗어두며 뛰면 스스로가 빨라지고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지요. 물론 다른 장르가 생각할 부분이 적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인문계통의 책들이 생각을 훈련시킨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시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종의 정신적 운동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는 생각보다 매우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이 책은 딱딱한 이론을 정립하거나 빈틈없는 논리 전개로 차갑게까지 여겨지는 그런 인문 서적은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에세이에다가 사회현실을 섞은 그런 책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읽어나가면서 점차 저는 제가 품고 있던 편견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책은 읽을 만한 책이다, 라고 말이지요. ‘따뜻한 경쟁’ 이라는 책은 이미 제목에서 모든 것을 다 함축하고 있습니다. 경쟁을 하되 따뜻하게 하자. 그렇다면 어떤 게 따뜻한 경쟁인가? 이 책에서는 따뜻한 경쟁을 스위스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실패를 용납할 수 있는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며, 다양한 경쟁이 이루어질 때를 말하고, 공교육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상태에서 여러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경쟁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이지요. 우리 속담에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라는 말이 있던가요, 궁지에 사람을 몰아넣지 않는 것, 이 경쟁이 끝나도 아직 살아갈 길이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따뜻한 경쟁의 요체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따뜻한 경쟁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낄 수 밖에 없지요. 고3수험생들은 수시로 대학에 이미 합격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수능을 마치고 자신의 인생이 끝난 듯한 느낌을 받으며, 회사에 입사할때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서 스펙을 쌓지 않을 수 없으며, 입사하는 것에 계속 미끄러지면 이윽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도 있고 말이지요. 하지만 공무원 시험은 수능보다 더 어렵습니다. 수능이야 치고 난 뒤에는 세상이 끝난 것 같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러 길을 택할 수 있게 되지만, 공무원 시험은 정말로 자신의 평생직장을 구하는 것이라 더 신경 쓸 수 밖에 없고, 더 목숨을 걸며 준비할 수 밖에 없지요. 전국을 둘러보면 수많은 경쟁자들이 있습니다. 예전에야 네 꿈이 뭐니? 라고 물었을때 9급 공무원이라고 말하면 꿈이 낮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9급 공무원이라도 감지덕지라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이들 중 저학력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부분 대학을 나왔고 고등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이지요. 비싼 돈 들여서 대학의 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대학에서 받은 교육을 써먹지 못하고 대부분 전혀 다른 곳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대학이라고 딱히 무슨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졸업생들이 다시 대학에서 조교나 강사로 일하지 않는 한, 그러니깐 직접적으로 대학에 관여된 일자리를 구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 몰라라, 식으로 내버려두게 됩니다. 이런 사회적 문제의 근원은 무엇에 기인할까요?

 

 

3.

 

 

  이 책의 저자는 코리안 패러독스와 스위스 패러독스라는 용어를 정의하며 저 현상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먼저 코리안 패러독스란 대학 진학률이 80퍼센트가 넘는데도 젊은이가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현상을 뜻하며, 스위스 패러독스란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은 스위스가 매우 높은 국가 경쟁력을 유지하는 현상입니다.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젊은이가 대학을 진학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젊은이의 집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대학은 나와야 먹고 살 수 있다, 라는 말에서부터 주변에 모두가 대학을 나왔다, 요즘 세상에 고졸을 봤느냐, 나와서 뭘 하며 살 건데, 라는 말들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 젊은이는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모의 말에 따르게 되며, 그 중 정말 한 둘은 나와서 살겠다고 부모와 인연을 끊다시피 하면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모색하려고 하지만 세상의 험악함에 질려서 결국 좌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언론에서는 이야기합니다. 개천에서 용났다, 고학생에서 대기업 회장이 되었다, 등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힘든 생활을 거쳐서 결국 잘살게 되었다는 사례가 언론에 날 정도라면, 얼마나 드물면 그렇게 언론에 기사화되겠냐고 말입니다. 물론 저 의지를 본받으며 잘 해나가면 여러분들도 할 수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기사화된 것이리라고 짐작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기사화가 된다는 것 자체가 그런 현상, 개천에서 용난다거나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우뚝 선다거나 하는 현상이 드물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대학에 진학했다고 해서 딱히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겨우 겨우 기업에 취직하는데 급급할 뿐이고, 대부분 그렇게 취직도 하기가 쉽지 않아서 학교 졸업을 차일피일 미루고 말지요. 게다가 대기업들은 쉬쉬하면서도 아무래도 수능 성적에서 상위권에 위치하는 대학들, 소위 말하는 명문대생들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명문대가 아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이중, 삼중으로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전공한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을 인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지요. 일부는 대학교 간판을 바꾸기 위해서 편입을 하거나, 대학원을 명문대로 간다거나 하기도 하지만 거기에서도 차별은 끊이지 않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든지 진학하지 않든지 문제점이 끊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에 무조건 진학시키려합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저런 문제점조차도 겪지 못하게 되고, 좀 더 넓게 말하자면 최소한의 기회조차도 박탈된다는 이야기이며,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개천에서 용나는 그런 사회는 이미 예전에 끝났으니깐 그렇겠지요. 그 바탕에는 기술직에 대한 천시가 어느 정도 깔려있다고 봅니다. 대학에 가서 고등교육을 받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기술직은 힘들기만 하고 돈을 별로 못 벌고,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대접을 많이 해주지 않습니다. 어느 직업이든 톱니바퀴처럼 꼭 사회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직업들인데 신분이 마치 조선시대처럼 나뉘어져있으니, 불만이 쌓이고 자신의 자녀만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요. 교육만이 유일한 신분상승의 길이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는 길이, 경쟁의 방법이 단 하나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스위스의 입장은 다릅니다. 스위스에서는 직업교육을 받는 것을 장려하며, 대학 졸업장에 대한 집착이나 콤플렉스가 없다고 합니다. 공교육에서는 선생님은 학생에게 ‘꼭 네가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며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꼭 전합니다. 우리는 스위스의 롤렉스 시계를 시계 중에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시계내부의 부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모두 대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학위를 가지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마이스터’라는 이름으로 대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충분히 존중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직업이 시계수리공이라고 한다면 뒤돌아서서 수군거리지만, 스위스에서 직업이 시계수리공이라고 한다면, 게다가 롤렉스 시계를 만든다고 한다면 대단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이들은 많은 보수를 받고 개인의 상황판단만으로도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술직에 비하면 전혀 딴판이지요. 직업을 고를 때 중요한 것은 본인의 적성과 흥미, 재능도 맞아야겠지만, 보수와 사회적 인정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스위스는 우리나라에 비하여 다양한 길을 열어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

 

 

  하지만 따뜻한 경쟁, 이라는 이 책의 모든 내용에 수긍이 가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스위스와 우리나라의 비교가 정말 가능한가, 라는 것이지요. 몇 가지 수치를 따져보겠습니다. 스위스의 인구는 2008년기준으로 758만명이고 크기는 4만1290제곱킬로미터입니다. 우리나라는 2010년기준으로 4875만명입니다. 나라의 크기는 10만 210제곱킬로미터이고 말이지요. 스위스의 인구가 2년 사이에 급증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최소 서너배는 인구차이가 나며, 나라의 면적도 두배 이상 납니다. 그리고 스위스는 내륙국이고 우리나라는 반도국가라는 점도 생각해볼만한 점입니다. 저자는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스위스의 시민들이 깨어있는 시민들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스위스가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된 배경은 저렇게 인구수가 적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하리라 여겨집니다. 저 정도 인구수라면 깨어있는 시민들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이 있고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 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 단체는 각자의 목소리에 뒤덮여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대표할 사람들을 뽑아서 정치를 시킵니다. 그러나 스위스는 어쩌면 그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국가가 아닌가, 굳이 대표자의 귄위를 강화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혼란에 빠지지 않는 그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렇다면 스위스의 정치 체제나 교육 체계를 단순히 우리나라에 끌어들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가 되겠지요. 책에서는 직접민주주의의 한계점을 이야기하면서 구색을 맞추려 하고 있습니다만 곧이어 시민들이 스스로 자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용을 넘겨버립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스위스의 예를 들다가 갑자기 브라질의 시민참여의 사례로 건너뛰는 부분은 그저 자신이 경험한 부분을 최대한 많이 넣으려는 욕심이 아닌가, 정도로까지 보입니다. 이왕 다른 국가를 더 넣을 생각이었다면 시민참여부분뿐만 아니라 책의 주제에 맞게 경쟁부분에서도 다른 나라들을 충분히 조사하는 것이 옳겠지요. 책의 말미에는 뜬금없이 한반도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름의 의도가 있었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전체적인 주제와 겉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남북한이 따뜻한 경쟁을 한다는 말이나 남북한이 공존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닌 이상은 말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의도로 적어둔 것이라고 할지라도 사실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청년들의 경쟁 문제는 따뜻한 경쟁과 서로의 공존이 해답이 될 수 있지만, 남북한 관계는 (물론 중간 중간에 공존도 하고 경쟁하는 시기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며 근본적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고 할지라도 해답자체가 다른 이야기들을 억지로 넣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긍정적입니다. 단순히 따뜻한 경쟁을 하자, 라고 원론적으로 외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어떤 방식을 택하면 좋을까, 모색해본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경쟁 이외에 다른 길을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스위스처럼 학교에서 교사들이 아이들을 붙잡고 대학을 안가도 이쪽으로 가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어, 라고 이야기하는 모습들, 기술직에 있는 사람이 잘릴 위험이 없이 관리직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모습들 등을 말이지요.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스위스는 스위스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에다가 서로의 인구나 상황도 다르니 영영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 저렇게 교사들이 학업 지도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하다고 할 것이며,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봉급 문제로 넘어가게 되고, 블루칼라들의 지위가 높아지더라도 화이트칼라들은 여전히 블루칼라들에 대해서 배타적일 것이고 그러다보면 블루칼라들은 배타적인 태도를 이기지 못해 그들끼리 조직을 만들고 맞서 싸울 것이며 그러다보면 혼란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재해있다고 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잠시나마 머릿속에서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정답조차 알지 못하고 헤매는 것 보다 최소한 정답이라도 안다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스위스의 체제가 정답일지는 좀 더 세월이 흘러봐야 알겠습니다만, 적어도 교육만이 거의 유일한 상위 계급으로의 통로가 되어버린 우리나라보다는 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남들에게 따르게 하려 할 때에 날카로운 논리를 내세우며 서로를 논박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논리와 논리가 있으면 설령 상대방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합리적인 이상 이해하고는 따를 수 있으나, 감정과 논리가 맞서게 되면 서로를 항상 엇나가게 되고, 감정과 감정이 맞서는 경우에는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는 한 상대방의 감정에 거의 대부분 평행선을 달리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논리가 아니더라도, 차가운 논박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같은 꿈을 꾸게 만들면 됩니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요. 이 책이 우리사회에 만연한 차가운 경쟁을 이기고 서로가 존중받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꿈’의 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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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3-12 14:36   좋아요 0 | URL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가연 2012-03-13 12:30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빵가게재습격 2012-03-13 13:21   좋아요 0 | URL
가연님 여쭤보고 싶은게 한가지 있는데, 혹시 과학사 책으로 많이 읽는 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과학의 탄생>을 제외하고 표준적(?)으로 많이 읽는 과학사 책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데, 염치불구 부탁드릴께요.^^;

가연 2012-03-13 16:54   좋아요 0 | URL
아.. 부탁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만, 죄송하게도 제가 과학사에 관련된 책을 그리 많이 접하지 못해서 추천드릴만한 책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안 읽은 책을 읽은 것처럼 말씀드릴수는 없으니..ㅠㅠ 지금 예로 들어주신 과학의 탄생, 이라는 책도 방금 빵가게재습격님이 언급해주셔서 찾아보았습니다. 지금껏 제가 몇몇 과학사, 라고 이름이 붙은 관련 책들을 접해보긴 했으나, 대부분 고대(과학과 철학의 구분이 없던 시대)로부터 거슬러올라가서 아래로 내려오는 구성을 큰 틀로 가졌었는데, 고대의 과학을 다루는 부분은 철학의 역사를 다룬 책들만 못하고, 진정한 의미의 과학이 시작된다고 개인적으로 여기고 있는, 과학적 방법론이 대두되는 시기에 있어서는 과학철학관련 서적을 보는게 나은 것 처럼 보여서 전반적인 과학사를 다루는 책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고 여겨지지 않아서 ㅠㅠㅠ 별로 흥미를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게다가 물리나 화학을 기준으로 보는가, 생명과학을 기준으로 보는가(저는 사실 물리를 좋아하지만 배운 것은 생명과학분야를 배웠기에...)에 따라서 책의 선택도 매우 달라질 수 있을테고 말이지요. 괜히 죄송스러워서 이렇게 길게 주절거려놓았습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해서 저보다 과학 관련 책을 훨씬 많이 읽은 분께 부탁드리는게 옳을 듯 합니다.

빵가게재습격 2012-03-13 22:30   좋아요 0 | URL
어이쿠, 댓글을 보니 제가 죄송하네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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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침묵의 봄.

 

 

 

 

 

 

  1955년의 어느 날, 당신이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섬에 있었다면 정말 진풍경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양이들이 낙하산을 메고 마치 공수작전에 임하듯이 엄숙하게 하늘에서 뛰어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지금이라면 정말 저런 일이 상상도 안 되고, 누구나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었겠지만, 저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보르네오 섬의 지나치게 늘어난 쥐를 없애기 위해서 그 천적인 고양이를 영국 공군의 도움을 받아서 공수해온 것이지요. 이를 우리는 ‘보르네오 섬 고양이 공수 작전’ 이라고 후에 일컫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공수작전이 시행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원인은 말라리아에 있습니다. 보르네오 섬은 아열대 기후로 기온이 높고, 습지가 많아서 모기가 들끓었는데, 아시다시피 말라리아는 모기를 숙주로 하는 전염병입니다. 모기가 많으니 자연스레 말라리아의 유병률도 늘어날 수밖에요. 세계보건기구에서는 말라리아를 퇴치하기 위해서 그 숙주인 모기를 없애기로 마음을 먹고 마을에 DDT를 대량 살포합니다.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살포는 마을을 말라리아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만들었습니다만, 그 대신 흑사병이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너무 놀란 세계보건기구는 바로 조사에 착수하는데, 흑사병이 찾아온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DDT에 바퀴벌레가 오염이 되고, 바퀴벌레를 도마뱀이 먹고 오염되어버리고, 오염된 도마뱀은 별로 행동이 민첩하지 않았기에 고양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었지요. 그 결과 고양이들은 마찬가지로 DDT에 오염되어버리고, 결국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마을에 고양이들이 씨가 마르자, 고양이들의 또 다른 먹잇감이었던, 그리고 상대적으로 DDT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쥐들이 날뛰게 되고, 쥐를 숙주로 하던 흑사병이 마을을 마치 사신처럼 그의 소매로 휘감았던 것이지요. 이 늘어난 쥐들을 없애기 위해서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저 작전, ‘보르네오 섬 고양이 공수 작전’ 이 펼쳐졌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마을을 닥친 재앙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고양이들은 무난히 쥐들을 포식했지만, 그렇게 쥐들을 모조리 먹어치운 후에는 다시 도마뱀에게 그 이빨을 들이대었고, 도마뱀들마저 고양이의 배를 채우는데 희생이 되자, 이번에는 그 도마뱀들의 먹잇감이었던 나방의 애벌레가 집들의 나무를 갉아먹으면서, 지붕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악의 연쇄반응은 바로 한 화학물질, DDT의 남용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요.

 

 

  환경학 분야에서 고전으로 일컫어지는 ‘침묵의 봄’은 바로 저런 DDT와 같은 화학물질들에게 그 포격을 정조준 합니다. 유기인산화계열의 살충제든 염화탄화수소계열의 살충제든 어느 화학물질이든지 나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화학물질의 나쁨은 여러 연구를 통하여 뒷받침되고 저자인 레이첼 카슨이 듣고 수집한 경험들로부터 증명됩니다. 정말 미량의 DDT를 페인트에 섞어서 피부에 노출시켰는데 각종 문제점이 일어났습니다. 뼈마디가 아프고 정신상태가 혼미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살충제를 살포하는 화학적 방제법이 아닌 다른 방식의 방제법을 이용한다면, 예를 들어서 천적을 이용한다거나, 곤충을 불임시키는 화학 처리를 한다거나, 특정 초음파를 이용한다거나 등의 방식으로, 우리가 위험에 처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DDT를 비롯한 화학적 살충제의 해악은 최근 연구들에서도 더욱 더 많이 밝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방세포에 잔류하여 차곡차곡 축적이 되던 화학물질들은 그 지방세포가 연소될 때, 마치 댐이 무너지듯이 우리의 혈류로 뿜어져 나옵니다. 갑작스레 뿜어져 나온 이런 화학물질들은 생체를 교란시키고 이상 반응을 일으키게 하며 이윽고 죽음에 이르게까지 합니다. DDT가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는 초등학생들도 학교에서 배워갑니다. 생체축적물질이라는 사실까지 덤으로 말이지요.

레이첼 카슨이 이 책을 쓰고 난 뒤, 미국 전역에서는 DDT의 해로움에 대해서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DDT 등의 살충제를 쓰지 않도록 하는 운동이 점화되었습니다. 이런 운동은 누구나 생각해보면 자명해보이지만, 이 책이 설파하기 전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운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잠깐 다른 방향으로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자 합니다. 과학자에 가까운 저로서는 여기서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화학물질이 상당히 나쁜 것들이라는 것을 몇 번이고 밑줄 치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그녀가 가져온 모든 예시는 화학물질은 사악하고, 죽음의 비술에 쓰이는 물질이며, 고대의 악마를 불러낼만한 것이다, 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적절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은 72악마를 부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악마들을 사역하여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고 그랬었다지요. 마찬가지로, 이런 화학물질들도 꼭 사악한 물질들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DDT를 가지고 단적인 예를 들자면, 물론 DDT를 농업에서 퇴출시킨 것은 옳은 결정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제 작업들, 앞서 보르네오 섬의 이야기에서도 나왔듯 말라리아를 방제하는 것에서까지 쫓아낸 것은 잘못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DDT가 쫓겨난 뒤, 두 배 이상 비싼 살충제가 DDT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환경적으로 그나마 친화적인 살충제이겠지요. 그런데 이 살충제는 동일한 비용으로 이전의 DDT가 커버했던 지역의 반밖에는 커버할 수 없습니다. 이제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을 생각해봅시다. 과연 그 곳에 있는 나라들이 두 배 이상 비싼 저 약들로 말라리아 방제를 쉽게 해나갈 수 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DDT는 분명, 초기에 발견되었던 것처럼 기적의 약도 아니고, 이후 연구를 통하여 수많은 해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 등의 질병을 통하여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이 살충제를 쓰면 앞으로 암이 걸릴 수 있으니 당신들에게 사용할 수 없겠습니다.’ 라고. 과연 그 사람들은 앞으로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는 암을 위해서 지금 당장의 말라리아를 그냥 참고 견딜까요?

물론 DDT 등의 화학물질의 효과가 단순히 시간이 흐른 후에 나타나는 것도 아닐 것이고, 그 중에는 즉각적으로 생명에 위협을 줄 수도 있는 효과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DDT와 같은 해악이 알려진 화학물질들을 다시 사용하자, 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사악한’ 물질들을 안 쓰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악한’ 힘이라도 빌려야 살아나갈 수 있는 곳들에게서까지 엄격하게 종교재판 하듯이 잣대를 들이대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너무 신성하게 여기며 환경운동에 단편적으로 책 내용을 가져가는 자세는 위험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애초에 그런 태도는 저자 자신도 이 책에서 지양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충분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부분이 이 책 ‘침묵의 봄’ 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얼마나 ‘사악한’ 물질을 남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앞서 저는 첫 문단을 ‘이 모든 것은 DDT의 남용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라고 마무리 지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남용’ 입니다. 어쩌면 세계보건기구는 DDT를 가지고 성공적인 말라리아 방제 작업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충분한 연구를 바탕으로 적절한 곳에 적절한 양을 가지고 이용했다면 말이지요.

 

 

  MSG라는 화학 물질이 있습니다. 이 화학물질은 우리가 상품명 ‘미원’ 이라고 일컫는 물질인데, 요리에 집어넣으면 그 맛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다섯 가지 맛이 혀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그 맛은 정말 만들어내기 어렵지요. 그런데 이 MSG는 요즘 우리 식품계에서 퇴출당한 상태입니다. MSG를 많이 먹으면 소위 말하는 ‘중국 음식 증후군’, 그러니깐 마구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울렁거리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며, 시력도 나빠진다고 하지요. 그런데 2010년에 우리나라 식약청에서 MSG를 평생 먹어도 크게 문제가 없다, 라는 내용을 발표하였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이야기입니다. 저 MSG는 토마토에도 들어있고, 다시마에도 들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마토를 많이 쓰는 이탈리아 음식이 감칠맛이 있고, 다시마를 우려낸 국물로 육수를 쓰는 국수가 맛있는 것입니다. 천연의 MSG와 합성된 MSG가 과연 분자식에서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동일한 탄소수에 동일한 결합구조일텐데 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적절한 양입니다. 그저 토마토에 들어있는 정도의 MSG를 요리에 쓴다면, 다시마로 우려낼 정도의 MSG를 쓴다면 크게 문제가 없고 동시에 맛있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다만 저렴한 가격으로 맛을 내려고 하다 보니 음식점에서 MSG를 많이 쓰게 되고, 이윽고 이런 저런 증후군들이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욕심에서 기인합니다. 이제 다시 DDT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DDT도 MSG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영웅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지만, 그 영웅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인간이라는 말이 있던가요, 마찬가지로 사실 이런 화학물질은 ‘그저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에 사악함을 부여하고, 선함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저 거기 있었던’ 물질을 찾아서 쓰는 것도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이 선한 용도에 맞게 소량을 쓰고 욕심을 버리며 깊은 연구를 한다면 이 책에서 순수한 악처럼 보이는 DDT도 선한 물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욕심입니다. 충분한 연구도 없이, 아니, 하다못해 충분한 고려도 없이 비용 절감 등과 같은 문제들을 위해서 적절하지 않은 양을 적절하지 않은 곳에 쓰게 만드는 인간의 욕심이 바로 문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욕심을 잘 줄일 수 있느냐에 우리 인간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것이 이 책 ‘침묵의 봄’ 이 진실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p. s. 책 자체는 좋은 책이지만... 너무 제가 반항정신이 투철한 것이려나요..ㅎㅎ

       하지만 화학물질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라는 글들은 분명 많이 올라올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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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3-10-22 01:0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마태우스라고 합니다. 님의 리뷰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이렇게 좋은 리뷰를 읽을 수 있다니, 오늘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연 2013-10-22 12:57   좋아요 0 | URL
헉.. 알라딘의 그 마태우스님이신가요? 이런 초 마이너블로그에 찾아와주셔서 순간 사칭이 아닌가, 잠깐 생각했습니다만.. 하하하하하... 그럴 리 없겠죠? 좋은 리뷰라고 칭찬해주시니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