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 - 황인숙의 엉뚱한 책읽기
황인숙 지음 / 이다미디어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글을 읽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읽었던 책에 대해 짧게나마 글을 쓴다는 건 또 다른 일인 듯싶다. 평론가가 아닌 이상 말이다.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것이다. 괜히 어쭙잖은 말 한마디로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이러쿵 저러쿵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해 감나라 배나라 간섭하는 꼴로 비친다면 아무래도 득보다는 실이 많지 않겠는가.

 

그래서인지 작가들의 독서일기는 흔하지도 않지만 그(또는 그녀)가 읽었던 텍스트보다 소감을 기록한 글이 더 어려워 독자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위 작가라는 놈이 그 정도밖에 쓰지 못하느냐 누가 따지기라도 하는 듯 한껏 멋을 부려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거나 잘 알지도 못하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비교하는 등 일반 독자들의 기를 사정없이 찍어 누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시 작가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황인숙 시인의 독서 후기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은 편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숫제 작가가 아닌 일반인의 글을 옮겨놓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작가도 이런 사실이 뭔가 모르게 께름칙했는지 작가는 책의 머리말에서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독후감이나 서평이라는 것은 책읽기의 침전물이거나 흔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침전물이나 흔적을 밖으로, 몸뚱어리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그리 마땅치 않았다. 독후감을 쓰고 있노라면, 칠칠치 못하게 뭔가를 질질 흘리며 걸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p.6)

 

'황인숙의 엉뚱한 책읽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작가가 읽었던 38권의 책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기록한 독서 후기인 셈이다. 작가는 그것을 '제대로 된 것이 아닌' 혹은 '정통 방식이 아닌' 일종의 서평이나 독후감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으로서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해서는 결벽에 가까운 완벽을 추구하는 그녀이기에 그녀의 책을 읽는 독자가 일상의 사소한 일과 결부된 생활인으로서의 그녀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몸빼바지 차림의 편안한 옷을 입은 그녀가 아무도 없는 집안을 활보하는 듯한 그런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내 나이가 돼도, 아니 내 나이의 곱절이 되어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 '미움'의 앙칼진 톱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에게는 용서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사람들, 용서하게 될 자신을 상상만 해도 용서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 미움과 증오만이 힘인 사람들. 나는 지금 가산 카나파니의 소설들을 통해 화들짝 발견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다." (p.39)

 

"사막의 꿈" "행복하기 위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사랑도 없이 돈도 없이" 등의 각기 다른 제목의 5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도리스 되리의 "나 이뻐?', 피에르 신부의 '단순한 기쁨',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공선옥의 '멋진 한세상', 파트릭 모디아노의 '신원미상의 여자' 등 우리가 한번쯤 읽었거나 누군가의 서평으로부터 대강의 줄거리를 전해 들었던 친근한 제목의 책들이 등장한다.

 

"내 인생에 통과 의례로 논술 시험이 없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운을 넘어 횡재다. 지금 이 나이에도 누군가 갑자기 어떤 주제에 대해 내 생각을 펼쳐보라고 하면 '정말이지 특별히 할 말이 없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스무 살 때는 오죽 눈앞이 캄캄하고 머릿속이 하얘졌을까." (p.206)

 

나도 이따금 책을 읽고 더러 마음이 내키면 '책읽기의 침전물이나 흔적'을 몸뚱어리 바깥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일종의 서평이나 독후감'에도 이르지 못하는, 말하자면 낙서에 가까운 글이지만 나는 몇 년째 블로그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블로그는 삶의 유희나 오락의 장으로서 기능하는 셈인데 이게 때로는 엉뚱한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댓글의 개수나 공감 또는 추천을 누른 횟수에 일종의 시샘 아닌 시샘을 느끼는 경우이다. 나중에 생각하면 헛웃음만 난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 무슨 추태인가, 하고 말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속에서 하찮은 나를 끝없이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독후감을 쓴다는 건 책에서 발견한 부끄러운 내 모습을 쉼 없이 드러내는 일이 된다. 그리고 블로그는 타인의 시선에서 그것을 검증하도록 한다.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끝없이 평가된다. 나는 그것을 가끔 잊고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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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부부로 사는 나로서는 집이라는 게 그저 잠만 자는 숙소의 개념에 가까운 게 사실이지만 요즘 나는 집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나의 숙소는 씻고, 잠자고, TV를 보며 잠시 쉬는 등 집으로서의 제 기능을 발휘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요리라고 해봐야 나는 기껏해야 출출할 때 허기를 달랠 목적으로 라면이나 끓여 먹는 정도이니 집은 그저 휴식과 위생의 목적만 충족하면 족했다.

 

그러던 것이 내가 사는 아파트의 바로 위층에 젊은 부부가 이사를 오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그 전에는 연로하신 노부부 두 분만 살았기 때문에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절간처럼 아주 조용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위층의 소음은 내가 사는 아래층으로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이따금 베란다의 낡은 세탁기로부터 울려퍼지는 탁한 소음만이 위층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일깨워주곤 했다. 그런데 위층에 새로 이사를 왔다며 젊은 새댁이 떡 한 접시를 들고 나타난 건 불과 한 달 전 어느 날 저녁이었고, 그때부터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참고로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은 지 20년도 넘은 소형 아파트이다. 물론 나처럼 혼자 살기에는 다소 넓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래된 아파트의 층간 두께가 얇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위층에 워낙 조용한 사람들이 살았던 까닭에 나는 그 사실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었다. 그런데 웬걸, 젊은 부부의 소곤대는 말소리며, 삐걱 하고 방문 여는 소리며, 화장실 샤워기의 물 떨어지는 소리며, 변기 내리는 소리며, 온갖 소음이 마치 확성기를 통하여 내 귀에 전달되는 것처럼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오죽하면 나는 위층과 우리집 사이에 구멍이 뚫린 게 아닌가 의심하여 방이란 방의 천장을 모두 샅샅이 살펴봤었다. 그러나 멀쩡했던 천장에 갑자기 구멍이 뚫린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 집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문제는 생활소음이 아니었다. 늦은 밤에나 귀가하는지라 생활 소음은 오히려 문제 될 게 없었다. 집에 들어가자 마자 간단히 씻고 잘 준비를 한 후 침대에 누워 책을 보다가 졸리면 시도 때도 없이 자는 까닭에 그 이후의 시간이 문제였다. 위층에서는 내가 막 잠들었거나 기상 알람이 울리기 한 시간쯤 전의 고요한 시간을 골라 나의 수면을 방해했다.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침대의 삐걱거림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샤워기의 물소리... 나는 어둠 속에서 괜히 부끄러워지는 그 소리를 견디느라 잠을 설치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라는데 애국 부부의 노고(?)에 대해 격려는 못할지언정 항의는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나는 매일 잇속만 차린 건축업자의 실수(?)를 탓하고 있다. 나는 요즘 신혼을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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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2-0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의 회춘에 박수를 보냅니다^^;

꼼쥐 2016-12-08 16:51   좋아요 0 | URL
회춘은 안 되면서 매일매일의 피곤함만 늘어난 것 같아요. 이걸 누구에게 하소연도 할 수 없고 말이죠.

syo 2016-12-06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생활소음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야말로 ˝생활˝소음이군요.^^

꼼쥐 2016-12-08 16:5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그야말로 ˝생활˝소음인 셈이죠. 관리실에조차 털어놓을 수 없는...

오거서 2016-12-06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웃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군요. ㅎㅎ 젊은 부부가 이런 상황을 알까요, 모를까요… 그것도 궁금합니다. ^^

꼼쥐 2016-12-08 16:54   좋아요 0 | URL
아마 모를 거예요. 제가 유난히 잠귀가 밝아서일 수도 있고, 혼자 사는 집이라 적막해서 더 크게 들릴 수도 있고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ㅎ
 
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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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발간된 책 중에 어떤 것은 '혹시 이  책이 아주 오래전에 씌어졌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계속해서 드는가 하면 과거에 발간되었던 또 다른 어떤 책은 '작가는 이미 죽어서 사라졌지만 그가 천국에서 보내온 글을 지금 살아있는 사람 누군가가 그대로 받아적었다가 최근에 발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최근에 발간된 책이 케케묵은 고릿적 얘기를 하고 있거나 아주 오래전에 나온 책이 요즘 세태를 정확하게 꼬집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450여 년 전에 태어난 셰익스피어가 쓴 책이 요즘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현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소설이나 희곡도 그렇지만 개인의 생각을 담은 산문집도 그런 경우가 더러 있다. 나는 금년에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과 에세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과 에세이도 좋아하는 편이다. 두 사람은 다른 듯하면서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1997년 <타임퀘이크>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은퇴를 선언했던 커트 보네거트는 이후 잡지 <인디스타임스 In These Times>에 때로는 자신의 가정사를, 때로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때로는 미국의 사회정치에 대한 비판의 글을 발표하였고 <나라 없는 사람>은 그가 <인디스타임스>에 연재했던 약 5년간의 에세이를 모아 엮은 책이다.

 

"어떤 좋은 소식이건 끝이 있다. 우리 행성의 면역계는 인간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p.104)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소설가로 분류되는 그는 정치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의식과 60년대 반전운동에 매진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휴머니스트이자 유머리스트였다. 특히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통렬한 블랙 유머는 읽는 이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만들지만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나면 뭔가 가슴 밑바닥에서 퍼지는 찌르르한 느낌이 전해져오곤 한다. 말하자면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그의 글은 독자들에게 웃음과 감동, 머리를 끄덕이게 하는 깨달음을 안겨준다.

 

"조지 W. 부시는 주변에 C학점상류계급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1) 역사와 지리를 전혀 모르고, (2) 백인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3) 이른바 기독교도이며, (4) 정말 놀랍게도 정신병자, 즉 영리하고 번듯하게 생겼지만 양심은 전혀 없는 자들이다."    (p.99)

        · · · · · · (생략) · · · · ·

"우리의 소중한 헌법에는 비극적 결함이 있지만 그걸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결함은 바로 미치광이 환자들만이 우두머리가 되고자 나선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등학교에서도 그랬다. 정서 장애가 분명한 아이들만 반장 선거에 출마했다."    (p.101)

 

그가 쓴 위의 글을 '조지 W. 부시' 대신에 '트럼프'로 바꿔 놓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글이다. 예나 지금이나 '미치광이 환자들만' 우두머리가 되고자 나서고 있으니 말이다. 정서 장애가 분명한 아이들만 반장 선거에 출마하는 것도. 형을 따라 코넬 대학 화학과에 입학했던 커트 보네거트는 항상 영어 교사를 꿈꾸었다고 말한다. 화학을 전공한 후 테네시 대학, 시카고 대학 등을 오가며 공학자와 작가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하던 그는 1943년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징집되어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사흘밤낮에 걸친 연합군의 폭격으로 삼십만 명의 시민들이 몰살당했던 드레스덴 폭격 사건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때의 기억은 23년이 흐른 후에 <제5도살장>이라는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인디애나폴리스의 독일계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커트 보네거트는 과학과 예술 양쪽에 재능이 뛰어났던 형과 누나, 그리고 삼촌에 이르기까지 대가족 사이에 낀 그는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수임을 일찌감치 터득했고, 라디오 방송의 코미디 로를 들으면서 웃기는 재주를 갈고 닦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만일 부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싶은데 게이가 될 배짱이 없다면 예술을 하는 게 좋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예술은 생계수단이 아니다.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하라. 라디오에 맞춰 춤을 춰라. 이야기를 들려주라. 친구에게 시를 써보내라. 아주 한심한 시라도 괜찮다. 예술을 할 땐 최선을 다하라. 엄청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p.32)

 

전장에서 끔찍한 일을 경험했던 작가는 소방수, 영어교사, 자동차 외판원 등의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글쓰기를 계속했다.생전의 커트 보네거트는 타계한 SF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뒤를 이어 미국 휴머니스트 협회의 면예회장을 맡는다. 회원들과 커트 보네거트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장례식에서 "아이작은 지금 천국에 있습니다"라는 농담을 주고받았고, 작가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도 이렇게 말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인생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끔찍함을 농담과 웃음으로 희석시켰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와 단짝 친구와 두 딸이 죽은 후였다."    (p.126)

 

대통령에 대한 패러디와 농담이 난무하는 요즘, 국민들은 시국의 혼란과 작금의 시련을 그렇게나마 애써 견뎌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던 커트 보네거트의 염원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끔찍하여 국민들은 농담이고 뭐고 모두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닐지. 커트 보네거트는 실의에 찬 우리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할런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천국에 있습니다."라고. 그 한마디 농담에 시름을 잠시 내려 놓으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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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작가 이문열을 생각할 때면 짠한 생각이 먼저 든다. 보수에도 물론 여러 갈래가 있어서 그는 그 중 가장 야만적인 보수에 속한다고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전한 보수를 지향하는 일반적인 보수주의자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에게는 분명 '아무런 억압 없이 자신의 의견이나 사상, 주장 따위를 외부에 나타낼 수 있는 자유', 즉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 논리의 비약이나 의도적인 폄훼조차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는 그런 경우조차 종종 표현의 자유로 용인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2003년에는 한나라당의 공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던 그는 2016년 12월 2일자 조선일보에 '보수여 죽어라, 죽기전에... 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촛불집회를 북한의 '아리랑 축전'에 비유함으로써 구설수에 올랐다. 그의 표현은 이러했다. "그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와 일사분란한 통제 상태에서 '아리랑 축전'에서와 같은 거대한 집단 체조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더라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지난 주말 시위 마지막 순간의, 기계로 조작해도 어려울 만큼 정연한 촛불 끄기 장면과 그것을 시간 맞춰 잡은 화면에서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했다."

 

일본 경도제대를 졸업하고 남로당 간부로 역임했던 이문열 작가의 아버지 이원철을 감안할 때 그가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권력 앞에 비굴할 정도의 절대 충성을 보여야 했을런지도 모른다. 6·25가 발발했던 당시 서울대 농대 관리자였던 이원철은 9·28 서울수복 당시 만삭의 아내와 어린 4남매, 그리고 늙은 어머니를 남한에 남겨둔 채 월북하여 북한의 농업연구소에서 육종학자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이문열 작가에게 북한은 자신의 아버지를 품어준, 고향의 향수를 자극하는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서는 더욱 광적으로 북한을 비난하고, 남한 정권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어찌 가엾지 않겠는가.

 

"죽기 좋은 계절이다. 참으로 많은 죽음이 요구되고 하루라도 빨리 그 실현이 앞당겨지기를 요란하게 기다리는 시절이다."로 시작되는 그의 칼럼은 사실 별 의미도 없다. 부친의 월북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서 받았을 연좌제의 피해를 막아내기 위해 또는 어떤 수세미로도 지워지지 않는 빨갱이 낙인을 지우기 위해 그동안 그는 발악을 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광신적인 충성서약이 그를 반공의 망령에 덧씌워진 채 살아가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영혼이 없이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 되었다. 우리가 그에게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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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6-12-0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픔을 해학으로 받아낸 이문구와는 참 대비되는 인간입니다. ㅠㅠ

꼼쥐 2016-12-05 15:32   좋아요 1 | URL
이문열이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라는 말은 이제 거둬야 할 것 같습니다. 창피한 일이죠.
 
자거라, 네 슬픔아 - 양장본
신경숙 지음, 구본창 사진 / 현대문학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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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인이거나 시인이었던 사람의 글을 좋아한다. 나의 이러한 오래된 습성은 문장의 리듬감을 중시하는 '겉멋'에서 발원하는지도 모른다. 정작 나는 노래를 잘 부르지도, 그렇다고 리듬감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면서 혀끝에 착착 달라붙는 찰진 글을 쓰는 작가의 글만 편애하는 건 어찌 보면 '겉멋'일 수 있다. 나는 이런 책을 읽고 있노라, 뻐기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만 주장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리듬감이 뛰어난 글일수록 오래 두고 읽어도 지루한 감이 없기 때문이다. 의미야 어찌되었든, 사상의 깊이가 어떻든지 간에 책을 읽으면서 나는 봄날의 새싹처럼 야릇한 흥분을느끼는 것이다.

 

이병률 시인의 산문집은 이제 워낙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끌어서 그가 시인이 아닌 에세이스트로 착각할 정도이지만 최영미 시인이나 한강 시인(나는 여전히 한강 작가를 소설가가 아닌 시인으로 기억한다.), 또는 황인숙 시인이나 안도현 시인 또는 류시화 시인 등 시인의 산문집은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묘한 구석이 있다. 운문을 고집하던 시인이 산문을 쓰면서 겪는 낯선 시선, 시인의 몸에 배인 운문적 글쓰기의 오래된 습관이 책의 곳곳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읽을라치면 물아일체의 경지가 이런 것이로구나, 생각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하고 있음이다.

 

시가 사랑받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는 시인의 산문집이 워낙 많아져서 예전처럼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게 사실이지만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아서 이따금 나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오래 사귄 동지인 양 살가운 인사를 받기도 한다. 단지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시인의 산문집만을 항상 고집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소설가의 산문집도 좋아하는데 그럴 경우 국내외의 몇몇 작가로 한정되곤 한다. 신경숙 작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표절 시비에 휘말린 게 작년 여름이었으니 작가는 벌써 1년 전에 잊혀진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부재가 가족의 빈자리인 양 느껴질 때가 더러 있어서 그럴 때마다 나는 몇 권 되지도 않는 그녀의 산문집을 별 의미도 없이 뒤적여보곤 한다. 신경숙의 <자거라, 네 슬픔아>는 신경숙의 글과 구본창의 사진이 어우러진 영상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종류의 책은 사진과 글이 영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아서 사진집이거나 에세이집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아쉬워 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구본창의 사진이 신경숙의 글을 방해하지 않을 뿐더러 신경숙의 글이 구본창의 사진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나는 느낌이다.

 

"문득문득 눈앞이 시어지며 저리 아름드리로 저리 넓은 품을 지닌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다. 봄날의 찬란한 귀룽나무를 보고 있을 적엔 내가 영원히 싸워야 할 것 같은 허무가 아득히 지워지며 갸륵하게도 뭔가를 생산해내고 싶어서 귀밑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한다." (p.133 '귀룽나무 아래서' 중에서)

 

신경숙의 글은 저마다의 가슴 밑바닥에 숨겨두었던 지난 슬픔을 조용히 다시 불러내어 가만가만 어루만지기도 하고 잊혀졌던 옛슬픔을 한껏 휘저어 놓기도 한다. 그녀의 글이 늘 그렇듯 이 책에서도 작가의 한쪽 발은 과거에 담근 채였다. 작가와 내가 나고 자란 시간과 공간이 다를지언정 과거로 향하는 애잔한 정서만큼은 하나로 이어지는 까닭에 나는 언제나 작가의 글에 중독되는 것이다.

 

"나의 시선은 우연인 것 같으나 그 응시 속에는 어린 시절의 어떤 기억들이 찰랑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빨래를 하러 가는 어머니 뒤에는 꼭 내가 있었다. 어머니는 위에 앉고 나는 아래에 앉아 빨래를 빨았다. 어머니가 큰 옷을 빠는 동안 나는 손수건이나 걸레 따위를 주물럭거렸다." (p.209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중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면 할 말을 잊은 것처럼 할 일이 없어지는 사람들이 있다.'에서 보듯 작가는 한 문장에서 하나의 영상을 그려내곤 한다.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풍경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이 떠오르기도 하고, 왠지 모를 울음이 왈칵 쏟아질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글은 어렸을 적 자신의 어머니, 똘망똘망한 눈으로 한없는 애정을 담아 바라보던 그 어머니의 눈매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마치 모든 기억은 다 슬프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래전 사람들에게 풍경은 쉬엄쉬엄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았을 때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풍경은 사라졌다. 풍경은 타고 가는 차의 앞 유리창이나 옆 유리창의 크기로 축소되었으며 그마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서 멀어져간다." (p.234 '백미러 속 풍경'중에서)

 

새벽의 어둠 속을 걷다 보면 내가 그 길로 내처 걸으면 내 어릴 적 동무들과, 마을 사람들과, 보고 싶었던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산의 정상에서 발길을 돌릴라치면 내딛는 발에 힘이 빠져 휘청이곤 한다. 살아온 시절이 마치 꿈만 같아서 무너질 듯 허망해지는 것이다. 지난 과거는 지금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잊혀짐의 대상, 체념과 허망함의 대상이 아니라 용서와 공존의 대상, 이따금 꺼내어 매만져야 할 서글픈 아름다움이라는 걸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오늘은 슬픔이 추억처럼 아름다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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