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거라, 네 슬픔아 - 양장본
신경숙 지음, 구본창 사진 / 현대문학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시인이거나 시인이었던 사람의 글을 좋아한다. 나의 이러한 오래된 습성은 문장의 리듬감을 중시하는 '겉멋'에서 발원하는지도 모른다. 정작
나는 노래를 잘 부르지도, 그렇다고 리듬감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면서 혀끝에 착착 달라붙는 찰진 글을 쓰는 작가의 글만 편애하는 건 어찌 보면
'겉멋'일 수 있다. 나는 이런 책을 읽고 있노라, 뻐기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만 주장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리듬감이 뛰어난 글일수록 오래 두고 읽어도 지루한 감이 없기 때문이다. 의미야 어찌되었든, 사상의 깊이가 어떻든지 간에 책을 읽으면서
나는 봄날의 새싹처럼 야릇한 흥분을느끼는 것이다.
이병률 시인의 산문집은 이제 워낙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끌어서 그가 시인이 아닌 에세이스트로 착각할 정도이지만 최영미 시인이나 한강
시인(나는 여전히 한강 작가를 소설가가 아닌 시인으로 기억한다.), 또는 황인숙 시인이나 안도현 시인 또는 류시화 시인 등 시인의 산문집은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묘한 구석이 있다. 운문을 고집하던 시인이 산문을 쓰면서 겪는 낯선 시선, 시인의 몸에 배인 운문적 글쓰기의 오래된 습관이
책의 곳곳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읽을라치면 물아일체의 경지가 이런 것이로구나, 생각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하고 있음이다.
시가 사랑받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는 시인의 산문집이 워낙 많아져서 예전처럼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게 사실이지만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아서 이따금 나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오래 사귄 동지인 양 살가운 인사를 받기도 한다. 단지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시인의 산문집만을 항상 고집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소설가의 산문집도 좋아하는데 그럴 경우
국내외의 몇몇 작가로 한정되곤 한다. 신경숙 작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표절 시비에 휘말린 게 작년 여름이었으니 작가는 벌써 1년 전에 잊혀진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부재가 가족의 빈자리인 양
느껴질 때가 더러 있어서 그럴 때마다 나는 몇 권 되지도 않는 그녀의 산문집을 별 의미도 없이 뒤적여보곤 한다. 신경숙의 <자거라, 네
슬픔아>는 신경숙의 글과 구본창의 사진이 어우러진 영상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종류의 책은 사진과 글이 영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아서 사진집이거나 에세이집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아쉬워 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구본창의 사진이 신경숙의 글을 방해하지 않을
뿐더러 신경숙의 글이 구본창의 사진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나는 느낌이다.
"문득문득 눈앞이 시어지며 저리 아름드리로 저리 넓은 품을 지닌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다. 봄날의 찬란한 귀룽나무를 보고 있을 적엔 내가 영원히 싸워야 할 것 같은 허무가 아득히 지워지며 갸륵하게도 뭔가를
생산해내고 싶어서 귀밑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한다." (p.133 '귀룽나무 아래서' 중에서)
신경숙의 글은 저마다의 가슴 밑바닥에 숨겨두었던 지난 슬픔을 조용히 다시 불러내어 가만가만 어루만지기도 하고 잊혀졌던 옛슬픔을 한껏 휘저어
놓기도 한다. 그녀의 글이 늘 그렇듯 이 책에서도 작가의 한쪽 발은 과거에 담근 채였다. 작가와 내가 나고 자란 시간과 공간이 다를지언정 과거로
향하는 애잔한 정서만큼은 하나로 이어지는 까닭에 나는 언제나 작가의 글에 중독되는 것이다.
"나의 시선은 우연인 것 같으나 그 응시 속에는 어린 시절의 어떤 기억들이 찰랑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빨래를 하러 가는 어머니 뒤에는 꼭 내가 있었다. 어머니는 위에 앉고 나는 아래에 앉아 빨래를 빨았다. 어머니가 큰 옷을 빠는 동안 나는
손수건이나 걸레 따위를 주물럭거렸다." (p.209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중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면 할 말을 잊은 것처럼 할 일이 없어지는 사람들이 있다.'에서 보듯 작가는 한 문장에서 하나의 영상을 그려내곤 한다.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풍경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이 떠오르기도 하고, 왠지 모를 울음이 왈칵 쏟아질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글은
어렸을 적 자신의 어머니, 똘망똘망한 눈으로 한없는 애정을 담아 바라보던 그 어머니의 눈매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마치 모든 기억은 다 슬프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래전 사람들에게 풍경은 쉬엄쉬엄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았을 때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풍경은 사라졌다. 풍경은 타고 가는 차의 앞 유리창이나 옆 유리창의 크기로 축소되었으며 그마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서 멀어져간다." (p.234 '백미러 속 풍경'중에서)
새벽의 어둠 속을 걷다 보면 내가 그 길로 내처 걸으면 내 어릴 적 동무들과, 마을 사람들과, 보고 싶었던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산의 정상에서 발길을 돌릴라치면 내딛는 발에 힘이 빠져 휘청이곤 한다.
살아온 시절이 마치 꿈만 같아서 무너질 듯 허망해지는 것이다. 지난 과거는 지금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잊혀짐의 대상, 체념과 허망함의
대상이 아니라 용서와 공존의 대상, 이따금 꺼내어 매만져야 할 서글픈 아름다움이라는 걸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오늘은 슬픔이 추억처럼
아름다운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