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수록 산책 - 걷다 보면 모레쯤의 나는 괜찮을 테니까
도대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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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글일수록 감정의 늪에 빠지기 쉽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누군가가 "얘, 너 지금 너무 감정에 빠진 거 아냐?" 하고 일깨워주면 좋겠지만 엉뚱하게도 누군가 곁에 있으면 사적인 글이 잘 나오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몸의 온도를 잴 수 있는 체온계처럼 감정의 높낮이를 측정할 수 있는 감정계가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감정 지수가 50을 넘을 때마다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해 놓고 글을 쓴다면 비교적 건조한 감정으로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그런 글은 쓰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도대체'의 <그럴수록 산책>을 읽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하는 말인데 '도대체'는 작가의 필명인 듯하다. 나도 '도대체' 작가의 책은 처음인지라 필명인지 본명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에이, 그래도 필명이 맞겠지 설마 본명이겠어? 암튼 작가는 책날개에 올린 자신의 소개글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량 기질 아버지와 부지런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두 분의 중간이 되지 못하고 '게으른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한량이 되었다.'라고.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의 책을 선뜻 고를 수 있었던 데에는 책의 제목에 '산책'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도 시간만 나면 '산책'을 즐기는 산책광(까지는 아니고)에 가까운 산책 애호가 중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암튼 나 역시 산책을 좋아하는 건 확실하니까. 특히 나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 숲길을 걷는 걸 더없이 좋아하는 까닭에 숲 속 친구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만나온 사람인 것처럼.

 

"동네 뒷산에서 꿩의 울음소리를 처음 들은 날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전까지 꿩이 어떻게 우는지 알지 못했고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나 "꿩!" 하고 울었기 때문입니다. 꾀꼴꾀꼴 울면 꾀꼬리가 된다거나, 뻐꾹뻐꾹 울면 뻐꾸기가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꿩마저 꿩 하고 우는 새였다니 허를 찔린 기분에 기가 막히기까지 했답니다."  (p.28)

 

작가는 네 컷 만화와 일반 산문을 섞어 씀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프롤로그를 지나면 1장 '살아 있으니까, 모두 잘했어', 2장 '아무도 초조해하지 않고, 각자 다른 빠르기로', 3장 '오늘은 나도 수고가 많았으니까!', 4장 '그다음엔 봄이 와, 알았지?'의 총 네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작가가 산책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새와 꽃과 나무, 심지어 숲의 벌레 등을 보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여러 생각의 갈래들을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담백한 어조로 쓰고 있다. 숲에서 만난 생명체들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형태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된다고 작가는 말하려는 듯했다.

 

"어느 날 저는 무척 의기소침한 심정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해온 일이 와르르 무너졌고, 그간 쌓은 경력도 모두 소용없게 된 듯 느껴지는 일이 있었거든요. '나에게 과연 희망이란 게 있을까?' 생각하면서 걷다가 노란색 칠이 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어두운 밤에 계단이 잘 보이라고 노란 칠을 한 모양이었죠. 그런데 그 노란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면서 어쩐지 힘이 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계단이 노란색인 이유만으로요. 마치 제게 희망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p.199)

 

내가 매일 아침 걷는 등산로에는 올해 들어 버려지는 쓰레기들이 늘어만 간다. 산 주변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이 대부분 입주를 마쳤기 때문이다. 새로 이사를 온 주민들이 나들이 삼아 찾는 곳이 바로 내가 걷는 등산로인 까닭에 나는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을 때가 많다. 성격상 버려진 쓰레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지라 때로는 가져간 비닐봉지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양 손 가득 쓰레기를 들고 내려오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숲에서 자주 보던 청설모도 이제는 아주 가끔 목격될 뿐이다. 인간의 손을 탄 산은 그렇게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작가와 같은 마음 따뜻한 산책가들만 숲을 찾는다면 산은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유난히 비가 잦았던 5월 한 달을 보낸 나는 숲의 파괴를 남의 일처럼 생각할 수 없어 가슴이 아프다. <그럴수록 산책>을 읽는 모든 이가 작가처럼 따뜻한 마음이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그것은 산책의 나날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나의 희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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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믿는다.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 기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정신적 기능 역시 퇴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화' 혹은 '늙음'만으로 모든 노인을 '애'로 폄훼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에 대한 역정 혹은 신에 대한 분노가 더해지는 까닭에 고집스럽고 성질 사나운 전형적인 '노인 애'의 모습이 추가적으로 더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늙음에 대한 겸허한 받아들임 또는 수용의 자세를 보임으로써 자신보다 젊은 사람들들로부터 노인 다움에 대한 적절한 존경이나 대우를 받지는 못할망정 알 수 없는 대상(신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에 대한 투정이나 자기부정(여전히 늙지 않았다고 믿는)을 일삼음으로 인해 젊은이들로부터 '애'(보다 못할 수도 있는)와 같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정신적, 육체적으로 어느 것 하나 성한 게 없는 시기를 겪게 마련이다, 게다가 기대수명이 높아짐에 따라 우리가 '애'로 살아야 하는 기간은 점점 늘어만 가는 추세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애'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경험보다는 사적인 경험이 많은 '노인 애'로 살아간다는 건 지금처럼 변화가 빠른 사회에서는 득보다 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사회 구성원들과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사사건건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킬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경험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 또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 30대의 이준석 최고위원이 돌풍을 일으키는 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정치는 결국 '애'가 아닌 '성인'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성장기에 있는 '애'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노인 애'의 시기에 접어든 노인에게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게 국가의 미래를 위해 옳은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를테면 80세든 83세든 국민적 합의가 있는 선에서 그 이상의 고령층에게는 정치적 은퇴 혹은 안식년의 차원에서 배려를 하는 게 어떨까 하고 말이다. 자신의 경험을 젊은이들에게 전승하고 싶다면 자문이나 조언으로도 충분할 텐데 굳이 본인이 직접 정치 전면에 나서거나 투표장에 간다는 건 번거롭지 않겠는가. 그런 번거로운 일을 굳이 하겠다고 나서는 청개구리 영신이 붙은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며칠 동안 비가 내려 선선하던 날씨는 쨍하고 해가 나면서 초여름 날씨처럼 더워졌다. 산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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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결혼생활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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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버거운 일이다. 누구에게나. 아니라고 우겨도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자식을 낳기 위한 생물학적 결합일 뿐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논리를 들어 결혼에 이르는 사람은 내 주변에서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혼은 그렇게 복잡다단한 이유들을 충족해야만 비로소 성사되는 고난도 방탈출 게임과 같은 것이기에 성공한 자에게 주어지는 성취감은 높지만 결혼과 동시에 시작되는 상대방의 내면을 캐는 초고난도 방탈출 게임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한다.

 

"나에게 결혼생활이란 무엇보다 '나와 안 맞는 사람과 사는 일'이다. 생활 패턴, 식성, 취향, 습관과 버릇, 더위와 추위에 대한 민감한 정도, 여행 방식, 하물며 성적 기호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나와 다를 수 있지?'를 발견하는 나날이었다. 나중에 이 질문은 점차 '이토록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어째서 이렇게 오래 같이 살 수가 있지?'로 변해갔지만."  (p.8)

 

임경선 작가의 산문집 <평범한 결혼생활>은 기혼자라면 누구나(라면 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공감할 수 있는 문구로 시작하여 서로의 '다름'과 '맞지 않음'에 대한 결론도 나지 않을 난상토론으로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체념이나 포기를 가장한 '자세 낮춤' 혹은 오지 않은 미래의 '죽음'과 결부 지어 어정쩡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구성은 기혼자들 대부분이 겪는 일반적인 삶의 형태라고 보아도 무방할 테지만 작가는 자신만이 겪는 특수한 형태의 결혼생활임을 번번이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부부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일 수도 있고, 나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 당신들도 실망하거나 위축될 것 없다는 식의 색다른 위로일지도 모른다.

 

"그와 내가 한날한시에 죽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적을 터이니 남편과 나, 둘 중 누군가는 먼저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남겨진 사람은 남은 삶을 사는 동안 떠나간 사람과 함께 보아온 숱한 풍경들을 플래시백처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미지는 모호하고 순서는 뒤죽박죽, 심지어 세부사항은 왜곡된 채로. 그렇다 하더라도 '나와 같은 풍경을 참 많이 보았다'라는 실감만은 그저 기분 탓이 아닌, 분명한 사실로 남을 것이다."  (p.129)

 

여담이지만 내가 임경선 작가를 눈여겨보게 된 시초는 작가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하루키 작품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읽는 나의 '하루키 덕질'에 비해 하루키에 대한 작가의 애착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열정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2001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 만난 지 3주 만에 결혼을 결심하고 세 달 만에 부부가 돼서 20년간 함께 살아오고 있다고 했다. 그에 부합하는 사연은 책의 중간에 삽입된 청첩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네 페이지에 걸친 이들의 교환일기 같은 청첩장은, 처음 만난 날부터 사랑에 빠진 순간까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연애 시절의 불같던 사랑도 영원할 수는 없다. 결혼생활은 가끔씩 있는 이벤트가 아닌 피할 수 없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일 년에 서너 번 스치듯 만나는 게 결혼생활이라면 우리는 서로에게 항상 애틋하고 그리운 존재로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은 채.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고민을 하면서 지내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우리는 연애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상대방의 습관을 하나하나 발견해 가기도 하고, 그런 습관들 중 어떤 것에는 익숙해지고, 또 다른 어떤 것에는 죽을 때까지 치를 떨기도 하는 법이다.

 

"결혼 초기엔 남편과 밤새워 싸우며 맞담배를 꽤 많이 피웠다. 둘 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어설프게 전공한 탓인지 우리의 싸움은 물건을 던지거나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몸싸움을 하기보단 부엌 테이블에 마주앉아 꼬장꼬장 질겅질겅 서로의 말꼬리를 붙잡는 양상을 띠었다. 답이 없는(부부 싸움은 대개가 답이 없다) 300분 토론이 끝이 나면 옆의 재떨이는 신경질적으로 비벼 끈 담배꽁초들로 수북했다."  (p.103)

 

이와 같은 글을 책으로 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녀가 작가라는 직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혼생활이란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렇고 그런 일상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까닭에 무한반복의 일상을 통해 서로의 '다름' 속에서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한다. 산 정상을 향해 의미도 없이 돌덩어리를 굴리는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결혼생활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결코 정복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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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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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마치 잘 찍은 한 장의 스냅사진과 같다. 순간을 포착함에 있어 영상이 아닌 글로 표현하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일 뿐, 무심히 흘려보낼 수 있는 삶의 한 순간을 마치 사진을 찍듯 그려낸다는 게 작가만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작가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아무리 단편소설이라지만 소설이 이렇게 짧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볍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독자는 더없이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고, 삶에서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냈던 많은 순간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수없이 많은 '보통의 순간'들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했던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잔잔한 슬픔과 그리움 속에 휩싸인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 애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 하나 유쾌한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름답지도 푸근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늘 생각나는 것은, 그 여름날의 일이다. 유난히 날씨가 좋았고, 내가 침울한 여자아이였다는 것. 정육점에서 일했던 기와무라 히로토. 보라색 립스틱. 엉뚱한 것만 믿는 열일곱 살짜리 여자애였다는 것."  (p.39 '뒤죽박죽 비스킷' 중에서)

 

책에는 표제작인 '울 준비는 되어 있다'를 포함하여 12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작가가 쓴 '작가 후기'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 소설집은 '단편집이기는 하지만 온갖 과자를 섞어놓은 과자 상자가 아니라, 사탕 한 주머니'이고, '색깔이나 맛은 달라도, 성분은 같고 크기도 모양도 비슷비슷'한 소설들로 꾸려져 있다. 독자들에 따라 각자가 체감하는 느낌은 전혀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결국 촘촘한 시간의 낚싯바늘에 꿰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모양새가 조금씩 달라진다 해도 본질적으로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런 그리움으로 인해 현재의 삶이 애잔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나츠키를 데리고 언젠가 파리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밤, 파리에서 걸쭉하고 뜨거운 생선 수프를 먹여 주고 싶다. 바닷속 생물들의 생명 같은 맛이 나고 온갖 향신료의 맛이 섞인, 뼈까지 영양이 녹아드는 생선 수프다. 나는 그 풍요롭고 행복한 음식을 다카시가 아닌 남자에게 배웠다."  (p.187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중에서)

 

아침나절 요란하게 내리던 비는 모두 그쳐 조용하다. 사랑도 그와 같으리라. 열병처럼 타오르던 사랑도 결혼을 하고, 특별하지 않은 가정을 꾸려 한 해 두 해 지내다 보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취약한 부분부터 좀이 슬어 어느 순간, 그렇게 튼튼하다고만 여겼던 인연의 끈도 툭 하고 끊어지는 날이 결국 오고야 마는 법이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관통하면서 특별하지 않았던 과거의 어느 순간을 몹시도 그리워한다.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말이다.

 

"자유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고독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p.163 '손' 중에서)

 

작가가 말한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사실이라면 나는 자유를 통과할 기나긴 고독의 시간을 위해 짧게 우는 연습을 반복해야겠다. 요란하게 내리던 비도 그치고 사람들은 어쩌면 저 농밀한 고요 속에서 조용히 울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별을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도 그렇게 슬픈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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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은 듯하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비가 내리는 통에 기분도 우울하고 몸도 찌뿌듯한 게 영 개운치가 않다. 코로나 정국으로 가뜩이나 심란한 터에 날씨마저 우중충하니 절로 부아가 치미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작은 일에 감정을 폭발했다가는 '꼰대'라는 낙인을 면키 어렵거니와 어린 친구들에게 선배로서 영 면이 서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고 무뎌지는 감성을 되살리기 위해 평소보다 아침 산책 시간을 조금 늘렸고, 잠자리에 드는 시각을 조금 앞당겼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 인천의 모 병원에서 대리수술로 의심되는 정황이 여럿 발견되었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 사실 이런 의심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외과 수술실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수술실은 마치 어느 자동차 정비 공장의 공구를 모두 옮겨다 놓은 듯 망치 등의 익숙한 공구들도 보이고, 듣도 보도 못한 최신 장비들도 비치되어 있다. 그러나 최신 장비들은 의사들도 손에 익지 않은 까닭에 판매 사원들로부터 사용법을 배우고 익혀 손에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적인 테스트를 거쳐야 하지만, 외과의사가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수술을 미루고 돈도 되지 않는 모의 시술을 반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장비를 다루는 데 익숙한 판매 사원을 수술에 참여시키고 의사는 그저 수술실 참관자로 참여하는 게 백 번 수월한 일인 것이다. 그러한 일은 비단 외과의사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약이 쏟아져 나오는 작금의 현실에서 의사들 역시 신약에 대해 공부하고 자신이 진료하는 환자에게 맞는 최선의 처방을 고심해야 하지만 하루에 많게는 수백 명의 환자를 보는 의사들이 잠을 줄여가며 신약을 검색하고 열정적으로 공부에 매진하는 의사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러니 학창 시절 자신이 배웠던 약만 주야장천 처방하는 게으른 의사가 속출하는 게 아닌가. 이런 사정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아마도 의사의 수를 늘리는 것일 테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악을 쓰는 까닭에 상황이 개선되길 기대한다는 건 요원해 보인다.

 

대리수술을 색출하고 이에 관련된 의사와 대리 수술자들을 재판에 넘겨 본들 별반 실효성도 없다는 걸 뻔히 아는데, 게다가 대리수술로 환자가 죽어나가도 의사는 그저 가벼운 벌금형에 처해지거나 실형을 받더라도 3년이 경과하면 다시 의사 면허를 갱신할 수 있으니 피해를 본 환자만 억울할 수밖에. 이런 억울함을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건강을 자신이 돌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부디 건강하시라. 아프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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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5-27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를 잘 지적하신 글입니다.

꼼쥐 2021-05-28 16:1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붕붕툐툐 2021-05-2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우리 모두 아프지 말아요. 내 몸의 주인은 의사가 아니라 나 자신이니까 내 몸을 더 아껴줍시다!

꼼쥐 2021-05-28 16:16   좋아요 1 | URL
코로나 정국을 길게 겪으면서 건강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건강은 결국 의사가 지켜주는 게 아님을 깊이 깨닫곤 하지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