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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마치 잘 찍은 한 장의 스냅사진과 같다. 순간을 포착함에 있어 영상이 아닌 글로 표현하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일 뿐, 무심히 흘려보낼 수 있는 삶의 한 순간을 마치 사진을 찍듯 그려낸다는 게 작가만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작가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아무리 단편소설이라지만 소설이 이렇게 짧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볍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독자는 더없이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고, 삶에서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냈던 많은 순간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수없이 많은 '보통의 순간'들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했던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잔잔한 슬픔과 그리움 속에 휩싸인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 애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 하나 유쾌한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름답지도 푸근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늘 생각나는 것은, 그 여름날의 일이다. 유난히 날씨가 좋았고, 내가 침울한 여자아이였다는 것. 정육점에서 일했던 기와무라 히로토. 보라색 립스틱. 엉뚱한 것만 믿는 열일곱 살짜리 여자애였다는 것." (p.39 '뒤죽박죽 비스킷' 중에서)
책에는 표제작인 '울 준비는 되어 있다'를 포함하여 12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작가가 쓴 '작가 후기'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 소설집은 '단편집이기는 하지만 온갖 과자를 섞어놓은 과자 상자가 아니라, 사탕 한 주머니'이고, '색깔이나 맛은 달라도, 성분은 같고 크기도 모양도 비슷비슷'한 소설들로 꾸려져 있다. 독자들에 따라 각자가 체감하는 느낌은 전혀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결국 촘촘한 시간의 낚싯바늘에 꿰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모양새가 조금씩 달라진다 해도 본질적으로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런 그리움으로 인해 현재의 삶이 애잔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나츠키를 데리고 언젠가 파리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밤, 파리에서 걸쭉하고 뜨거운 생선 수프를 먹여 주고 싶다. 바닷속 생물들의 생명 같은 맛이 나고 온갖 향신료의 맛이 섞인, 뼈까지 영양이 녹아드는 생선 수프다. 나는 그 풍요롭고 행복한 음식을 다카시가 아닌 남자에게 배웠다." (p.187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중에서)
아침나절 요란하게 내리던 비는 모두 그쳐 조용하다. 사랑도 그와 같으리라. 열병처럼 타오르던 사랑도 결혼을 하고, 특별하지 않은 가정을 꾸려 한 해 두 해 지내다 보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취약한 부분부터 좀이 슬어 어느 순간, 그렇게 튼튼하다고만 여겼던 인연의 끈도 툭 하고 끊어지는 날이 결국 오고야 마는 법이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관통하면서 특별하지 않았던 과거의 어느 순간을 몹시도 그리워한다.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말이다.
"자유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고독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p.163 '손' 중에서)
작가가 말한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사실이라면 나는 자유를 통과할 기나긴 고독의 시간을 위해 짧게 우는 연습을 반복해야겠다. 요란하게 내리던 비도 그치고 사람들은 어쩌면 저 농밀한 고요 속에서 조용히 울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별을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도 그렇게 슬픈 것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