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뻬 씨의 행복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오유란 옮김, 베아트리체 리 그림 / 오래된미래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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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구성의 소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독특한 문체와 표현으로 꾸며진 그런 소설이다.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석 달쯤 지냈을 때 맡게 되는 매케하고 칼칼한 먼지 냄새가 난다고 할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치 장마 기간의 축축하고 눅눅한 대기 속에서도 내 옷을 털면 마른 먼지가 풀풀 날릴 것만 같은 그런 소설이다.  내가 느끼는 작가의 분위기는 그랬다.
불행하지도 않으면서 불행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정신과 의사를 하는 꾸뻬씨.
책에서는 중국을 제외하고 지명을 말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정신과 의사가 가장 많은 나라’와 같은 표현에서 그것이 미국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이런 표현은 마치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여행을 떠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제 독자로서의 임무를 잊고 작가 또는 꾸뻬씨와 같이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의 한 무리가 되는 것이다.
여행은 먼저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익숙한 일상과의 이별이 그것이다.  쿠뻬씨가 자신의 연인 클라라와 이별하듯이.
꾸뻬씨는 자신이 어렸을 때 읽었던 만화  <푸른 연꽃>에 나오는 무척이나 지혜로워 보였던 중국 노인은 행복의 비밀을 알 것만 같아 그런 노인을 찾아 중국으로 떠난다.
아,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이 여행의 목적은 행복의 비밀을 찾는 것이다. 
성실한 꾸뻬씨는 비행기 안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얻은 행복의 비밀도 꼼꼼히 메모한다.  중국에는 그의 고등학교 친구 뱅쌍이 은행에서 근무한다.  꾸뻬씨보다 일곱 배나 많은 돈을 버는 뱅쌍은 늘 일에 묻혀 산다.  자신이 목표하는 삼백만 달러를 위하여.  뱅쌍은 꾸뻬씨에게 고급 술집에서 일하는 잉리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소개해 주고 꾸뻬씨는 그 여인과 사랑을 나눈다. 
여행은 가끔 자신의 이성에서 벗어나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꾸뻬씨는 한 사원에서 자신이 찾던 노승을 만나지만 그 노승은 꾸뻬씨가 여행을 마치고 다시 찾아오라고 당부한다.   꾸뻬씨는 가난한 흑인의 나라로 가는 비행기에서 자신과 같은 정신과 의사인 마리 루이즈를 만나고 그 나라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치료하는 꾸뻬씨의 친구 장 미셀을 만난다.  여전히 메모는 계속된다.  우리는 그가 정신과 의사임을 주목해야 한다.
꾸뻬씨는 루이즈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상강도에게 차량과 함께 납치된다.  그들의 포로가 되어 죽음에 직면했던 꾸뻬씨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세계에서 가장 정신과 의사가 많은 나라로 향한다.  그는 기내에서 아픔을 호소하는 자밀라를 치료한다.  그녀는 자신의 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생각한다.  꾸뻬씨는 이제 정신과 의사가 많은 나라에서 고등학교 때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 친구 아녜스와 그녀의 남편 제이크를 만난다.  그리고 심리학을 연구하는 아녜스의 주선으로 행복을 연구하는 위대한 교수 던칸을 만나게 된다.  꾸뻬씨는 자신의 메모를 그 위대한 교수에게 보여주고 많은 대화를 나눈다.  여행을 마치고 꾸뻬씨는 다시 중국의 노승과 만난다.  여기서 잠깐 꾸뻬씨의 메모를 훑어보자.
배움1- 행복의 첫번째 비밀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배움2- 행복은 때때로 뜻밖에 찾아온다.
배움3-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이 오직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배움4- 많은 사람들은 더 큰 부자가 되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배움5- 행복은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산속을 걷는 것이다.
배움6- 행복을 목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배움7-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배움8- 불행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다.
배움9- 행복은 자기 가족에게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배움10-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배움11-행복은 집과 채소밭을 갖는 것이다.
배움12-좋지 않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가 더욱 어렵다.
배움13-행복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배움14-행복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배움15-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배움16-행복은 살아 있음을 축하하는 파티를 여는 것이다.
배움17-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다.
배움18-태양과 바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
배움19-행복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배움20-행복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배움21-행복의 가장 큰 적은 경쟁심이다.
배움22-여성은 남성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더 배려할 줄 안다.
배움23-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꾸뻬씨는 노승에게 자신의 메모를 보여 주고 가르침을 기대한다.  그러나 노승은 그가 마음공부를 훌륭히 해냈다고 칭찬하며 같이 걷자고 권한다.
  "진정한 지혜는 이 풍경속에서 한 순간에 발견할 수도 있고, 아니면 언제까지나 깊이 감추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노승의말에 꾸뻬씨는 자신이 노승과 함께 바라보는 자연에서 새로운 배움을 얻는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아, 나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꾸뻬씨와 그의 연인 클라라, 친구 뱅쌍과 잉리, 장 미셀, 아녜스와 남편 제이크의 뒷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 대해 더이상 말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에 내가 느낀 배움 한 가지를 덧붙이며 끝맺고 싶다.
배움24-행복은 결코 특별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평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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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2010-03-29 17:47   좋아요 0 | URL
서평 잘 읽었어요.
꼼쥐 님이 마무리한 배움 24번의 행복 이야기도 좋네요.
좋은 책을 더 빛내준 것만 같은 님의 서평을 읽으니 기뻐요.
감사합니다. ^^ 얼른 읽어봐야 겠어요.

꼼쥐 2010-03-30 08:28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알라딘에서는 댓글 달기도, 다른 블로그를
방문하기도 불편한 구조로 되어있어서
서로 담 쌓고 지내는줄 알았는데 이렇게 제 예상을 깨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이 차창밖 풍경처럼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때때로 이 흐린 하늘이 어서 빨리 개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과, 내 옆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나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줄 새로운 사람이 앉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과, 끼니때마다 찾아오는 허기를 달래줄 홍익회 아저씨가 카트를 밀며 나타나기를 바라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유아기적 사고를 하며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지금 향하는 방향이 처음에 목적했던 곳으로 가고 있는지,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내려서 걸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깐씩 스치기도 하지만 나는 또 무심히 창밖을 보며 그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작은 변화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수도 없이 봐왔을 그 풍경이 지겹기도 하련만 나는 가끔 습관처럼 박수를 치며 감탄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를 둘러싼 그 풍경에 항상 익숙한 것은 아니어서 변하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풍경이라고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우길 때가 있다. 

나이에 따라 사람의 피부만 말라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생각도, 감정도 점차 시큰둥하고 시니컬한 상태가 되면 마치 생각에서도 각질을 털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곤 한다.

내가 여행을 하는 것인지, 풍경이 나를 납치라도 하는 것인지 나의 여행은 한참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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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리멘 지음, 류해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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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도 알지 못하고, 떠올릴만한 추억도 없다.
고향 뒷산에 있는 할아버지의 산소만 기억할 뿐이다.
저자인 레이첼 레멘에게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과 어린 시절 그녀에게 마음으로 전해주신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그녀와 함께 하고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가끔 삶이 버겁고 힘겹다고 느낄 때.
그럴 때마다 지난 시절을 떠올리고 위로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 되고 마음 든든한 것일지.....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카발라(kabbalah : 유대교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랍비로서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온 러시아 이민 1세대였다.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을 간직한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그녀의 부모님은 낯선 땅에서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전문적 지식과 능력이라고 믿었다.  의대 1학년 때 크론이라는 희귀병으로 쓰러졌을 때도 가정 간호사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기숙사에서 그녀를 돌보며 학업을 독려했었다.  할아버지의 자녀들과 손자들은 대부분 의사나 간호사였다.  세상에 깃든 거룩함을 느끼며 삶을 축복으로 느끼는 할아버지와 일상의 평범한 삶을 뛰어넘는 재능과 탁월함을 추구하는 부모님 세대 사이에서 가치관의 갈등을 느꼈던 그녀가 전문의로서 영적인 치유와 섬김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 것은  의사가 된 후 35년이 지나서였다고 고백한다.  
소아과 의사를 그만두고 중증의 질병을 지닌 사람들을 치유하는 심리적인 접근 방식을 개발하고 의사들에게 그 필요성을 교육하는 일에 투신하는 선두 주자로, 20년 동안 암 등의 중병을 앓는 환자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있는 그녀의 소소한 일상과 할아버지의 추억을 담은 이야기.
고통과 상실의 아픔을 겪는 환자들과 그 가족을 상담하면서 그녀가 깨달은 삶의 지혜와 짧은 이야기들이 불쑥불쑥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나는 몇번이고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억눌러야 했다.

  청교도들이 누비 이불을 만들 때 누비 이불의  대가는 그가 만드는 누비 이불마다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린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구슬로 목걸이를 만들 때 살짝 깨진 구슬을 하나 꿰어 넣었다고 한다.  그것을 '영혼의 구슬'이라고 불렀다.  영혼을 지닌 것은 어떤 존재도 완벽할 수가 없다.  당신이 만들어가는 삶의 천에 '영혼의 구슬'과 같은 올이 하나 들어갈 수 있다면 당신이 꿈꾸었던 삶의 천보다 더 멋진 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P.266)

감정의 개입이 조금도 용납되지 않는,  오직 과학적 지식과 뛰어난 재능만으로 환자를 대하는 것을 교육받았던 저자가 인간의 불완전성과 삶의 신비, 삶의 축복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이별을 했던 할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닦아놓은 '사랑의 길'이 아니었을까?   

  섬김은 영혼의 일이다.  진정한 섬김이란 우리 안에 있는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영혼의 움직임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선을 향한 전환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어떤 전환은 아주 작고 어떤 전환은 크다.  이 모두가 매우 중요하다.  탐욕, 무절제한 열망, 무감각, 무의식의 사슬 등 많은 것들이 우리를 진정한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남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얽어매는 사슬보다 영혼이 더 강하다는 증거다.(P.298)

자신의 재능으로 봉사하기 보다는 자신의 영혼으로 고통과 상실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고자 했던 레이첼 레멘은 책을 읽는 모든 독자의 가슴에서 향기를 뿜어내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섬김의 꽃'을 피우려 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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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아침을 먹고 혼자 산책을 나섰단다.
잔뜩 흐린 하늘과 바람이 부는 날이었지.
그 길에서 나는 노란 산수유꽃을 만났지.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꽃망울을 터트리는 가녀린 산수유꽃이 얼마나 장하던지.....
오늘은 네게 그 꽃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단다.
믿지 못하겠다고?
그래.  세상엔 가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곤 한단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수화기를 통해 멀리 떨어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한번쯤 생각해 보았다면 너는 분명 기적을 믿는 것이란다.


아들아

산수유꽃에게 물었단다.  매년 봄철 한때 잠시 피었다 지는 것이 지겹지 않느냐고.
너무 유치한 질문이었지?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아주 많이 부끄러워 했단다.
  "우리는 순간을 나누어 영원을 얻는 것이랍니다.  벌과 나비에게 꿀을,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에게 향기와 아름다움을.  이런 것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죠.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얻는답니다.  우리가 주는 것에 비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우리는 매년 그 신비에 감탄한답니다.  당신네 인간들은 오히려 순간적인 것에 탐닉하고 영원한 것을 멀리하더군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알고 있는 이 자연스러움을 인간 중에는 지혜로운 자만 그리 한다고 들었어요."

 
아들아

나는 사랑, 믿음, 기쁨, 행복, 관심, 우정 등 영원한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반평생을 보냈는데 이것이 보편적 진리였다는 사실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단다.
어쩌면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 자리를 주었던 하느님이 몹시 후회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더구나.
삶은 화려할수록 금세 사라지는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평범한 것에 삶의 신비는 자신의 모습을 꽁꽁 숨기곤 하지.
어느 책에선가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는 것이지만 관계마저 끝내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는구나. 



아들아 


순간적인 것을 많이 나누렴.
순간적인 것을 탐하면 탐할수록 소중하고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한단다.
나의 아들은 순간을 미련없이 주고,  영원을 얻는 삶을 살았으면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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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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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추억을 세세히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삶에 있어 작은 행복이 아닐까?
하루하루가 즐겁고, 온갖 모험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은 지친 일상에 활력소로 작용할테니까.
1951년 아이오와 주 디모인에서 태어난 빌 브라이슨의 어릴 적 이야기는 70년대 우리네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세계 전체 부(富)의 95%를 차지하고 있었던 1950년대의 미국 생활상이 전적으로 우리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냉장고와 세탁기가 등장하고 일반 가정집에 자동차 보유 대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던 1970년대를 생각하며 그의 이야기는 마치 나의 추억인듯 빠져들게 되었다.
빌 브라이슨은 엄밀히 말해 유럽인은 아니다. 미국 태생이지만 20여년 동안 영국에 살면서 < 더 타임즈 > 나 < 인디펜던트 > 등 거의 모든 매체에 기고를 해 온 칼럼리스트이자 여행작가이고, 몇 년 전부터는 다시 미국에 돌아가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은 특정 문화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냉정한 관찰에서 비롯된 유머와 재치가 넘친다. 일단 어떤 사물, 어떤 사람이든 그의 눈에 띄어 그의 머릿속을 통과하는 순간 즐거운 얘깃거리로 바뀐다. 

추리닝 한 벌이면 운동복이자 잠옷이며 외출복까지 겸했던 우리의 70년대 그 시절은 차림새처럼 몸도 마음도 자유로웠다.  최소한 나이키 운동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봄이면 물 오른 나무처럼 겨우내 숨죽였던 아이들 팔뚝에 기운이 돌고, 주체할 수 없는 기운에 윗동네 아이들과 밤늦도록 전쟁놀이.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을 흉내내어 망토처럼 보자기를 뒤집어쓰고는 골목을 내달리던 일.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이 과도하게 넘치는 아이들은 종종 동네 목욕탕의 김서린 여탕 유리창을 힐끔거리거나 영화 두 편을 동시상영하는 영화관 주변을 맴돌았다.  가끔 헌책방 아저씨로부터 구입한 외국의 성인잡지를 학교에 몰래 가져와 영어공부에 목마른 친구들에게 한 장씩 찢어 돈을 받고 팔기도 했었는데, 수업시간에 서랍에 숨겨놓고 보다가 선생님께 들켜 혼이 나기도 했었다.

  발가벗은 여자를 보고 싶어하던 우리를 위해서는 <플레이보이>를 멋지게 장식한 사진들이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덜 알려진 남성용 정기간행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그런 잡지를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도 동쪽 끝에 줄줄이 늘어선 허름한 잡화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목소리를 두 옥타브쯤 낮추고 1939년생이라고 주장하며 하느님한테라도 맹세할 수 있다고 무표정한 점원에게 거짓말하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P.169)

빌 브라이슨의 표현은 사실관계에 그치지 않고, 모험심과 호기심 가득한 어린 아이의 감정을 섞어 배를 잡고 한참을 웃게 한다.  그의 고백을 신부님이 들었으면 웃음을 참지 못한 신부님이 고해실 밖으로 뛰쳐 나가거나, 냉전체제의 두 주역인 흐루시초프와 아이젠하워가 웃으며 악수를 하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빌 브라이슨은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문장으로 핵무기 경쟁과 같은 당시의 커다란 사건들도 만화책의 지어낸 이야기인듯 심각하거나 우울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나 자신의 기억들을 그저 단순하게 나열만으로 그쳤다면 이야기는 얼마나 밋밋하고 재미없었을까?
오늘 하루를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어준 저자에게 감사라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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