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의 추억을 세세히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삶에 있어 작은 행복이 아닐까?
하루하루가 즐겁고, 온갖 모험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은 지친 일상에 활력소로 작용할테니까.
1951년 아이오와 주 디모인에서 태어난 빌 브라이슨의 어릴 적 이야기는 70년대 우리네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세계 전체 부(富)의 95%를 차지하고 있었던 1950년대의 미국 생활상이 전적으로 우리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냉장고와 세탁기가 등장하고 일반 가정집에 자동차 보유 대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던 1970년대를 생각하며 그의 이야기는 마치 나의 추억인듯 빠져들게 되었다.
빌 브라이슨은 엄밀히 말해 유럽인은 아니다. 미국 태생이지만 20여년 동안 영국에 살면서 < 더 타임즈 > 나 < 인디펜던트 > 등 거의 모든 매체에 기고를 해 온 칼럼리스트이자 여행작가이고, 몇 년 전부터는 다시 미국에 돌아가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은 특정 문화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냉정한 관찰에서 비롯된 유머와 재치가 넘친다. 일단 어떤 사물, 어떤 사람이든 그의 눈에 띄어 그의 머릿속을 통과하는 순간 즐거운 얘깃거리로 바뀐다. 

추리닝 한 벌이면 운동복이자 잠옷이며 외출복까지 겸했던 우리의 70년대 그 시절은 차림새처럼 몸도 마음도 자유로웠다.  최소한 나이키 운동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봄이면 물 오른 나무처럼 겨우내 숨죽였던 아이들 팔뚝에 기운이 돌고, 주체할 수 없는 기운에 윗동네 아이들과 밤늦도록 전쟁놀이.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을 흉내내어 망토처럼 보자기를 뒤집어쓰고는 골목을 내달리던 일.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이 과도하게 넘치는 아이들은 종종 동네 목욕탕의 김서린 여탕 유리창을 힐끔거리거나 영화 두 편을 동시상영하는 영화관 주변을 맴돌았다.  가끔 헌책방 아저씨로부터 구입한 외국의 성인잡지를 학교에 몰래 가져와 영어공부에 목마른 친구들에게 한 장씩 찢어 돈을 받고 팔기도 했었는데, 수업시간에 서랍에 숨겨놓고 보다가 선생님께 들켜 혼이 나기도 했었다.

  발가벗은 여자를 보고 싶어하던 우리를 위해서는 <플레이보이>를 멋지게 장식한 사진들이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덜 알려진 남성용 정기간행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그런 잡지를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도 동쪽 끝에 줄줄이 늘어선 허름한 잡화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목소리를 두 옥타브쯤 낮추고 1939년생이라고 주장하며 하느님한테라도 맹세할 수 있다고 무표정한 점원에게 거짓말하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P.169)

빌 브라이슨의 표현은 사실관계에 그치지 않고, 모험심과 호기심 가득한 어린 아이의 감정을 섞어 배를 잡고 한참을 웃게 한다.  그의 고백을 신부님이 들었으면 웃음을 참지 못한 신부님이 고해실 밖으로 뛰쳐 나가거나, 냉전체제의 두 주역인 흐루시초프와 아이젠하워가 웃으며 악수를 하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빌 브라이슨은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문장으로 핵무기 경쟁과 같은 당시의 커다란 사건들도 만화책의 지어낸 이야기인듯 심각하거나 우울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나 자신의 기억들을 그저 단순하게 나열만으로 그쳤다면 이야기는 얼마나 밋밋하고 재미없었을까?
오늘 하루를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어준 저자에게 감사라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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