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어제는 네가 처음으로 기차여행을 했다지?
점심을 서둘러 먹고 이모부와 사촌 여동생 이렇게 셋이 떠났던 깜짝 여행.
너는 내게 설명할 것이 참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왜 그렇지 않았겠니.
네 흥분된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들뜨게 되더구나.  하지만 조금은 늦은 시각이라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어야만 했단다.
비록 하루 동안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네가 들려준 평택 마린센터 14층 전망대의 모습은 동행하지 못한 나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겠더구나.


아들아

요즘 나는 '삶이 깜짝파티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순간순간 기쁜 일들만 이어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니란다.
때로는 시시하고 따분한 일도, 때로는 슬프거나 화나는 일도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이 내 앞에 처음으로 펼쳐진 깜짝 파티가 아니겠니?
"에이, 그게 뭐 깜짝파티예요?  그렇다면 나는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다시 한번 바라보렴.
세상을 살면서 똑같은 경험은 두번 다시 하지 못하는 법이란다.  네가 자주 듣는 엄마의 잔소리도 그때그때마다 모두 다를뿐 아니라 그 순간의 하늘과, 그 순간의 바람과, 그 순간의 태양도 모두 새로운 것이란다.


아들아

우리가 다음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상하거나 이러이러하게 되리라 기대한다면 아무리 기쁜 일도 그 기쁨은 반감되거나 시큰둥한 일이 돼 버린단다.
그리고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너를 위해 최상의 깜짝파티를 준비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단다.  네가 화내거나 짜증낸다면 너는 상대방의 행동을 미리 예상했거나 네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기를 은근히 기대했기 때문이란다.  상대방이 너의 예상이나 기대에 못 미치면 너는 너의 기대감 때문에 실망하게 되는 것이지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단다.
이렇게 생각하면 네가 만나는 상대방이 비록 화를 낼지라도 너는 담담히 또는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상대방이 네게 준비한 깜짝파티를 즐길 수 있는 것이란다.
언젠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맞는다 해도 너는 다음 순간에 다가올 깜짝파티에 대한 설레임으로 큰 슬픔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아들아

네가 조금 더 자라 나의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되면 너와 와인을 같이 나누며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건배사를 들려주고 싶구나.
레치얌!
히브리어로 '삶을 위하여!'라는 뜻이라는구나. 
나이 든 할아버지가 어린 손녀와 잔을 부딪히며 외쳤던 말이라는데 근사하지 않니?
나는 그날을 위해 좋은 와인 한병을 준비하마.  내 아들의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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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시(詩)란 잘 배열된 문장이나 화려한 수사(修辭) 또는 문학적 기교가 아닌 살아 있는 실재 또는 영혼의 유체이탈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시는 단순히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암흑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생동하는 그 무엇이며, 하늘에 둥둥 떠다니다 어느 시인의 눈에 띄인 실재적 대상이나 그 분위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기보다 '낚는다'거나 '건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곤한다.  
대체로 좋은 시인이란 마음에 매의 눈을 지닌 사람이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야만 시는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시적 기교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다.  시적 기교는 시의 생명력에 가치를 더하는 부차적인 것이기에 생명력이 없이 오직 기교에만 의지하여 시를 쓴다면 그야말로 죽은 시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뿐이다.
마음에 매의 눈을 지니고 더하여 장인의 세공술까지 겸비한 시인은 그리 흔치 않다.
그래서일까 시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는 '시는 어렵다'와 '시는 유치하다'는 입장으로 양분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시를 기피하는 합당한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인성교육이 사라진 우리네 교육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입과 코와 마음이 열려있어야 한다.  이들을 통하여 음식과 공기와 인성(人性)이 끝없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지난 주말에 분당의 한 대형서점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분당의 중심지에 위치한 탓에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은 곳인데 그들의 차림새는 남녀를 구분할 것 없이 알몸이거나 겨우 가린 정도로 비춰졌다.  한여름의 오후 시간대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을 오르는 여자친구의 뒤를 책으로 가리며 뒤쫓는 남자를 '매너가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가관이다'라고 해야 할지...
다소 보수적인 내 성향을 감안하여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인성이 사라진 인간의 실체를 보았다.  인성이 사라지면 아주 작은 심리적 충격도 견디지 못할뿐만아니라 그들에게는 동물적 잔인함과 성적 쾌락의 탐닉만 남게 된다.
갈수록 잔인하고 흉포화 되는 범죄와 높은 비율의 성범죄는 결코 법으로만 제어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오명에 더하여 성범죄율 세계 1위라는 오명을 더할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주파수를 온 우주와 자연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성을 마음껏 호흡하는 일이다.  
수없이 되내어 읽어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시 한편을 곁에 둔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무더위 속에서도 한편의 시에 심취한 젊은이의 모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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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윤후명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영어를 공부하면서 외워도 외워도 늘 어렵기만 했던 단어들은 동식물의 이름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어려서부터 늘 곁에 두고 익혀도 세월이 가면 잊혀지는 것이 그들의 이름이거늘 제 나라 말이 아닌 외국어로 어찌 그들의 이름을 세세히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매일 아침 산을 오르며 만나는 풀과 나무의 이름을 우리말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의 산문집에는 식물학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던 작가의 이력 탓에 많은 식물의 이름이 등장한다.  유별난 식물 사랑이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거리던 어느 봄날.  내가 알지 못하던 식물의 이름을 익히고자 화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필기도구를 챙겨 들고 방문한 화원에서 그 생감새를 눈과 머리로 기억하고 이름을 하나하나 빼곡히 적어가던 중 나는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두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었다.  종류의 많음도 그랬지만 이름을 적고 지나쳤던 식물을 다시 대하면 번번이 다른 이름과 뒤섞여 가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매일 아침이면 산을 찾는다.  이름도 모르는 나무와 풀과 꽃.  그 속에서 나는 온전한 평화를 누리곤 한다.
세상에 나고(生) 사라질(滅) 때 모든 동물은 본의 아니게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다.  인간은 어미라 불리우는 한 여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남는 자에게 잊혀지지 않는 슬픔을 남겨둔 채로 죽는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 죄를 보상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것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 원죄에 대한 작은 죄씻음이다.
살아 있는 것 중에 스스로 나고 자라 고통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식물 말고 또 있을까.
그 선(善)함과 드러내지 않는 겸손이 작가를 그토록 매료시키지 않았을까?
  자신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글, 수사(修辭)만을 앞세운 글, 뭔가 보여주겠다는 글만의 글이 내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늘 '자연을 교재로, 역사를 부교재로'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 마음이 들꽃 한 송이로 내 안에 피어나기를 비는 마음이다.  한 송이 하늘하늘 피어난 너도바람꽃이 이 지구를, 우주를 대변하는 모습임을 내 글이 당당하게 읊을 때, 내 문학도 비로소 우주를 유영(遊泳)할 수 있으리니.(P.105) 
그렇게 꽃과 함께 한 그의 인생에 꽃처럼 아름다운 지인들과 문우들에 대한 추억 그리고 전쟁통에 재혼한 어머니와 그의 계부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문학에 대한 소신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 등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와 삶의 진지한 성찰이 묻어나는 글은 꽃처럼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듯하다.  때로는 젓갈처럼 곰삭은 맛이 난다.
세월을 건너뛰는 돌다리처럼 이어지지 않는 추억의 편린이 애잔하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잘 살게나'하고 말하는 그의 덕담이 들리는 듯하다.
내 등을 토닥이는 투박한 손길의 촉감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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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산행길에는 늘 만나는 사람만 만나게 된다.
아침 운동이라는 것이 저마다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하는 것이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은 한결같다.
그런데 새로운 인물과 마주칠 때도 더러 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월요일에 보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세트로 구입한 듯한 운동복을 입고, 장갑과 모자와 심할 경우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모습은 전문 산악인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과 몸에 걸친 것들이 모두 새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아침 운동이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것과 같다.
그렇게 차려 입으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대개는 길어야 사나흘이 지나지 않아 모습을 감추곤 한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은 얼굴도 익숙하려니와 그 차림새도 수수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건 물건이건 오래된 것이 좋은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엊그제는 서모 개그맨의 부인이 운영하는 쇼핑몰 "쉬 이즈 앳 홈"이 구설수에 올랐었다.
 
대나무 소쿠리(33만원)                                              회색 쿠션(44만원)

가격이 조금 과한가?
앤틱이라면 다 용서가 되는 세상 아니던가.
한동안 더위가 심했던 탓인지 큰 웃음을 선사하는 분들이 종종 눈에 띈다.
무더위에 지친 국민들에게 살신성인하여 웃음을 주려는 그 모습이 눈물겹다.
같은 날 강모 국회의원이 대통령까지 거론하는 저질 개그로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왠지 한참을 웃다가도 뒷맛이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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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누구나 턱턱 막히는 순간이 있다.
평소 같았으면 눈 감고도 걸었음직한 익숙한 길에서 몇번이고 부딪히고 넘어졌던 기억처럼 순탄하던 내 인생길의 작은 돌부리에 걸려 앞 못 보는 맹인처럼 나뒹구는 순간, 우리는 좌절하게 된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에 겨워 축제를 즐기는데, 나만 홀로 불행의 나룻배를 타고 외딴 섬으로 향하는 듯한 느낌 또는 애정 어린 손길로 나를 감싸주던 삶의 미소가 한순간에 돌변하여 내 멱살을 부여잡고 마른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 치는 듯한 그런 기분.
나는 그 흙바닥에 누워 대상 없는 그 누군가에게 돌팔매질이라도 하고 싶었던 그런 기억은 내 남은 인생에서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잔혹한 신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오늘 만났던 후배의 한탄에 나는 그보다 더한 일도 겪었노라 말한들 그의 고통이 감해지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지고 싶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나를 야속하다 여기지는 않을지...

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었던 소설가 박완서가 생각났다.
그녀가 사는 이 나라에는 올림픽 축제로 떠들썩했건만 온몸으로 아픔을 견뎌야 했던 그녀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을까?
 "자식을 앞세운 에미는 밤에 편히 잠들지 못한다. 추운 날은 내 자식이 얼어붙은 딱딱한 땅속에서 추위에 떨 것 같아 따스운 잠자리가 오히려 가시방석처럼 고통스러워 전전반측 잠 못 이루고, 더운 날은 더운 날대로 그 깊은 땅속에서 답답하고 무서워 어찌 견디나 싶어 쾌적한 냉방을 거부하고 홀로 가슴을 쥐어뜯는다." (`에미 마음, 여자 마음` 中) 고 썼던 그녀의 상실은 세월에 흘러 아득할 터, 이제는 여느 봉분과 다를 바 없는 동그마니 작은 묘소가 그녀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을 것이다.

살다보면 나만 홀로 겪는 듯한 그런 일들이 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나 아닌 누군가에게도 언제든 찾아오는 그런 일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내가 사는 하루하루는 인생의 작은 퍼즐조각이라고 하지 않던가.
죽음을 앞두고 내 인생의 전체 그림을 완성했을 때, 혹시 아는가?  그때의 아팠던 순간이 무지개로 빛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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