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윤후명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영어를 공부하면서 외워도 외워도 늘 어렵기만 했던 단어들은 동식물의 이름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어려서부터 늘 곁에 두고 익혀도 세월이 가면 잊혀지는 것이 그들의 이름이거늘 제 나라 말이 아닌 외국어로 어찌 그들의 이름을 세세히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매일 아침 산을 오르며 만나는 풀과 나무의 이름을 우리말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의 산문집에는 식물학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던 작가의 이력 탓에 많은 식물의 이름이 등장한다. 유별난 식물 사랑이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거리던 어느 봄날. 내가 알지 못하던 식물의 이름을 익히고자 화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필기도구를 챙겨 들고 방문한 화원에서 그 생감새를 눈과 머리로 기억하고 이름을 하나하나 빼곡히 적어가던 중 나는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두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었다. 종류의 많음도 그랬지만 이름을 적고 지나쳤던 식물을 다시 대하면 번번이 다른 이름과 뒤섞여 가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매일 아침이면 산을 찾는다. 이름도 모르는 나무와 풀과 꽃. 그 속에서 나는 온전한 평화를 누리곤 한다.
세상에 나고(生) 사라질(滅) 때 모든 동물은 본의 아니게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다. 인간은 어미라 불리우는 한 여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남는 자에게 잊혀지지 않는 슬픔을 남겨둔 채로 죽는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 죄를 보상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것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 원죄에 대한 작은 죄씻음이다.
살아 있는 것 중에 스스로 나고 자라 고통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식물 말고 또 있을까.
그 선(善)함과 드러내지 않는 겸손이 작가를 그토록 매료시키지 않았을까?
자신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글, 수사(修辭)만을 앞세운 글, 뭔가 보여주겠다는 글만의 글이 내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늘 '자연을 교재로, 역사를 부교재로'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 마음이 들꽃 한 송이로 내 안에 피어나기를 비는 마음이다. 한 송이 하늘하늘 피어난 너도바람꽃이 이 지구를, 우주를 대변하는 모습임을 내 글이 당당하게 읊을 때, 내 문학도 비로소 우주를 유영(遊泳)할 수 있으리니.(P.105)
그렇게 꽃과 함께 한 그의 인생에 꽃처럼 아름다운 지인들과 문우들에 대한 추억 그리고 전쟁통에 재혼한 어머니와 그의 계부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문학에 대한 소신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 등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와 삶의 진지한 성찰이 묻어나는 글은 꽃처럼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듯하다. 때로는 젓갈처럼 곰삭은 맛이 난다.
세월을 건너뛰는 돌다리처럼 이어지지 않는 추억의 편린이 애잔하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잘 살게나'하고 말하는 그의 덕담이 들리는 듯하다.
내 등을 토닥이는 투박한 손길의 촉감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