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시(詩)란 잘 배열된 문장이나 화려한 수사(修辭) 또는 문학적 기교가 아닌 살아 있는 실재 또는 영혼의 유체이탈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시는 단순히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암흑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생동하는 그 무엇이며, 하늘에 둥둥 떠다니다 어느 시인의 눈에 띄인 실재적 대상이나 그 분위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기보다 '낚는다'거나 '건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곤한다.  
대체로 좋은 시인이란 마음에 매의 눈을 지닌 사람이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야만 시는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시적 기교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다.  시적 기교는 시의 생명력에 가치를 더하는 부차적인 것이기에 생명력이 없이 오직 기교에만 의지하여 시를 쓴다면 그야말로 죽은 시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뿐이다.
마음에 매의 눈을 지니고 더하여 장인의 세공술까지 겸비한 시인은 그리 흔치 않다.
그래서일까 시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는 '시는 어렵다'와 '시는 유치하다'는 입장으로 양분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시를 기피하는 합당한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인성교육이 사라진 우리네 교육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입과 코와 마음이 열려있어야 한다.  이들을 통하여 음식과 공기와 인성(人性)이 끝없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지난 주말에 분당의 한 대형서점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분당의 중심지에 위치한 탓에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은 곳인데 그들의 차림새는 남녀를 구분할 것 없이 알몸이거나 겨우 가린 정도로 비춰졌다.  한여름의 오후 시간대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을 오르는 여자친구의 뒤를 책으로 가리며 뒤쫓는 남자를 '매너가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가관이다'라고 해야 할지...
다소 보수적인 내 성향을 감안하여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인성이 사라진 인간의 실체를 보았다.  인성이 사라지면 아주 작은 심리적 충격도 견디지 못할뿐만아니라 그들에게는 동물적 잔인함과 성적 쾌락의 탐닉만 남게 된다.
갈수록 잔인하고 흉포화 되는 범죄와 높은 비율의 성범죄는 결코 법으로만 제어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오명에 더하여 성범죄율 세계 1위라는 오명을 더할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주파수를 온 우주와 자연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성을 마음껏 호흡하는 일이다.  
수없이 되내어 읽어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시 한편을 곁에 둔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무더위 속에서도 한편의 시에 심취한 젊은이의 모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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